모리요시 친왕: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태그: m 모바일 웹 고급 모바일 편집
48번째 줄:
일본 학계에서는 [[2017년]] 시점까지도 모리요시 친왕의 생모에 대해서 확정하지 못했는데<ref name="kameda4">亀田 2017, pp. 12–14.</ref> 『마스카가미』(増鏡) 등의 사료로부터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민부경 삼위」(民部卿三位)라고 불렸다는 것과, 고다이고 천황과의 만나기 전에는 고다이고 천황의 할아버지인 가메야마 천황(亀山天皇)과의 교제 관계가 있었고 세이호인(聖護院)의 준후(准后) 손친 법친왕(尊珍法親王)이라는 황자를 낳았다는 것 두 가지뿐이다.<ref name="kameda4"></ref> 자세한 것은 민부경삼위 항목 참조. 당시는 어머니의 지위가 황자의 출세에 있어서 중요하였기 때문에, 일본의 사학자 가메다 도시카즈(亀田俊和)는 모리요시 친왕은 처음부터 황위 계승 다툼에서 누락되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주장하기도 하였다.<ref name="kameda4"></ref>
 
애초에는 여섯 살 때 소운 법친왕(尊雲法親王)으로써 천태종(天台宗) 3대 문적(門跡)의 하나인 미정문적가지이 몬제키(梶井門跡) 산젠인(三千院)에 들어가 승려가 되었다.<ref group="주석">한편 에도 시대의 야나기하라 노리미쓰(柳原紀光)는 『속사우초』(続史愚抄)에서 고다이고 천황이 즉위한 분포(文保) 2년 2월 26일에 소운 법친왕이 입실하였다고 기록하였는데, 이는 고후시미 상황(後伏見上皇)의 아들인 손인 법친왕(尊胤法親王)의 입실 기사를 잘못 기재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ref> 일본의 군담소설 《[[태평기]]》(太平記)는 어린 나이였지만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안다고 할 정도로 총명한 머리를 지니고 있었으므로 히에이 산에 들어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승려들의 신뢰를 모으게 되었다고 하였으며<ref group="주석">『太平記 巻第一』民部卿第三位殿ノ御腹也。御幼稚ノ時ヨリ利根聡明ニ御座セシカバ、君(帝)御位ヲバ……関東ノ計トシテ叡虜ニテ任務ヲレザリシカバ、御元服ノ義ヲ改、ラレ梨本ノ門跡ニ御入室有リテ……一ヲ聞イテ十ヲ悟ル御器量、世二叉類モ無リシカバ……</ref> 가레키(嘉暦) 2년([[1327년]]) 20살 정도의 젊은 나이에 천태좌주(天台座主), 즉 히에이산 엔랴쿠지(比叡山延暦寺)의 수장이 되었다(《천태좌주기》). 그의 천태좌주 임명은 아버지 고다이고 천황의 방침도 있었던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 미정문적의가지이 몬제키의 문주(門主) ・ 천태좌주가 되다 ====
쇼추(正中) 2년([[1325년]])에는 문적을 이어받아 문주(門主)가 되었고, 아버지 고다이고 천황의 방침에 따라 [[가레키]](嘉暦) 2년([[1327년]]) 12월부터 [[겐토쿠 (가마쿠라 시대)|겐토쿠]](元徳) 원년([[1329년]]) 2월까지, 12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두 차례에 걸쳐 천태좌주가 되었다. 다이토노미야(大塔宮)라는 궁호는 히가시야마(東山) 오카자키(岡崎)의 홋슈지(法勝寺) 9층탑 주변에 문실(門室)을 두었던 데서 연유한다.
 
《태평기》는 친왕이 무예를 좋아하였으며 불교 수행이나 학문에는 일절 관심이 없었고, 매일 승병들과 무예 훈련에 열중하는 특이한 천태좌주였다고 묘사하고 있다. 또한 친왕의 날램은 중국 전한 강도왕(江都王) 유건(劉建)의 딸 [[유세군|강도공주]](江都公主)에도 비견되었으며, 병풍 일곱 자조차도 뛰어넘고 고대 중국 한 고조의 책사였던 [[장자방]](張子房)의 병법을 익히고, 무기를 다루는 것에 대해서는 면허개전(免許皆伝) 즉 스승의 비밀스러운 기술까지 모두 전수받았다, 라고 적고 있다.
65번째 줄:
 
==== 한냐지 잠복 ====
다이토노미야가 한냐지(般若寺)에 숨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고후쿠지(興福寺) 잇쇼인(一乗院)의 안찰법안(按察法眼) 고젠(好専)이 5백 기(騎)의 군사를 거느리고 한냐지를 탐색하러 왔다. 다이토노미야는 본당에 있던 대반야경(大般若経)을 담아두는 빈 상자에 몸을 숨겼다. 수색하러 온 병사 가운데 한 명이 불경이 든 상자를 뒤집어 조사해 보았지만 다이토노미야는 그곳에 없었다. 병사들은 한냐사에서 물러났지만, 탐색을 마친 병사 가운데 한 명이 본당에 상자가 하나 더 있었는데 그것을 조사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몇 명의 병사와 돌아왔다. 이를 눈치챈 다이토노미야는 병사들이 앞서 조사했던 상자로 옮겨 숨었다. 돌아온 병사들은 수색하지 않은 경통을 열어보았지만 그곳에 다이토노미야는 없었다. 순간적인 재치로 목숨을 건진 다이토노미야는 가신이 돌아오고 곧장 일행과 함께 구마노(熊野)를 목표로 출발하였다.
 
==== 환속 ====
83번째 줄:
4월, 친왕의 부황인 고다이고 천황이 유배지 오키 섬을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고다이고 천황은 나와 나가타카(名和長高, 훗날의 나와 나가히데名和長年)에게 받들어져서 후나가미 산(船上山)에서 막부 타도의 병사를 일으키라는 윤지(綸旨)를 냈다.
 
5월 7일, 고다이고 천황의 윤지를 받들어 북쪽에서 아시카가 다카우지, 서쪽에서 아카마쓰 엔신(赤松円心), 남쪽으로부터 지구사 다다아키(千種忠顕) 등의 군세가 로쿠하라 단다이를 습격, 로쿠하라 단다이를 함락시켰다. 가마쿠라를 목표로 동쪽으로 패주하는 도중에 호조 도키마스(北条時益)는 노부시(野武士)에게 습격을 당해 죽었고, [[호조 나가토키]](北条仲時)는 [[사사키 도요|사사키 다카우지]](佐々木高氏)가 보냈다고도 하는 노부시(野伏)<ref group="주석">『태평기』를 비롯하여 사사키 도요가 이에 직접 관여하였다는 동시기 사료는 없지만, 아시카가 다카우지와 도요의 사이에 밀약이 있었고 또한 오미 국(近江国) 반바(番場) 지역이 도요의 영지였다는 후세의 사사키 집안 관련 사료들을 통해 도요가 이 사건에 관여하였음을 상정하는 사학자 모리 시게아키(森茂暁)의 의견도 있다(森 1994, pp. 34-37).</ref>에 의해 길이 막혀서 다수가 자결하였다. 그리고 고다이고 천황은 막부가 옹립한 신임 천황으로부터 삼종 신기(三種の神器)를 돌려받았다.
 
구스노키 마사시게의 지하야 성 포위 공격으로부터 수도로 돌아온 [[닛타 요시사다]](新田義貞)는 5월 22일 모리요시 친왕의 영지를 받들어 이나무라가사키를 넘어 가마쿠라를 공격, 함락시켰다. 가마쿠라 막부의 호조 일문 283명이 도쇼지에서 자결함으로써 가마쿠라 막부는 멸망하였다.
98번째 줄:
 
==== 해임과 체포 그리고 가마쿠라 유배 ====
[[겐무]](建武) 원년([[1334년]]) 겨울, 모리요시 친왕과 아시카가 다카우지와의 대립은 격렬해졌다. 한편으로 고다이고 천황의 총비였던 아노 렌시(阿野廉子)은 자신의 소생인 노리요시 친왕을 차기 천황으로 삼고자 했고, 다이토노미야 모리요시 친왕은 그에 있어서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모리요시 친왕 실각에 대한 의견은 아시카가 다카우지와 같았던 아노 렌시의 참언으로 모리요시 친왕 지지파 무장들에 대한 은상은 줄어들고, 친왕의 세력이 간단하게 약화되면서 그의 입장도 불안정해졌다. 모리요시 친왕은 천황 측근의 기타바타케 지카후사에 의지하여 오슈의 병력을 교토로 파견받았지만 정이대장군의 입장 또한 희박해질 뿐이었다.
 
더 이상 세력이 소모되는 것을 견딜 수 없었던 모리요시 친왕은 부황에게 다카우지의 야심을 지적하면서 다카우지 추토를 명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고다이고 천황은 다카우지의 실력을 두려워하면서도 겉으로는 융화를 모색했다. 초조해하는 모리요시 친왕은 다카우지와 어울리지 말라는 내용의 영지를 냈지만, 그 영지가 다카우지로부터 신다이켄몬인(新待賢門院, 아노 렌시)에게 넘어갔고, 다카우지는 병부경인 다이토노미야(大塔宮)의오토노미야의 영지가 고다이고 천황의 자리를 빼앗을 기도로 군사를 모으기 위한 것이라고 신다이켄몬인에 참언했다.
 
10월 모리요시 친왕의 맹우였던 구스노키 마사시게를 멀리 떨어뜨려 놓기 위해 기이 이모리 산(紀伊飯盛山)의 호조 잔당들이 일으킨 반란과 겐무 신정에 불만을 품은 [[야마토 국|야마토]](大和)와 [[셋쓰 국|셋쓰]](摂津), 기이 등의 무가에 대한 진압을 명하였다. 이 참언을 믿은 고다이고 천황은 격노했고, [[유키 지카미쓰]](結城親光), [[나와 나가토시]](名和長年)에게 명하여 청량전(清涼殿)에서 열린 연회 때에 모리요시 친왕을 체포했다. 고다이고 천황은 구속된 모리요시 친왕에 대한 충분한 심의를 행하지도 않고 그 신병을 아시카가 다카우지에게 넘겨버렸고, 고다이고 천황은 아시카가 다카우지에게 「모리요시 친왕의 영지는 짐의 소관한 바가 아니며, 모리요시 친왕이 독자적인 판단으로 행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115번째 줄:
7월, 약 10개월 동안 닛카이노가타니(二階堂ヶ谷)의 도코지(東光寺)에 유폐되어 있던 모리요시 친왕은 호조 도키유키 군세가 세력을 확대하고 스와 요리시게 등에게 옹립될 것을 경계한 아시카가 다다요시의 명에 의해, 후치베 요시히로(淵辺義博)에 의해 피살되었다. 향년 28세였다.
 
『태평기』에 따르면 후치베 요시히로는 토굴 속에 있던 친왕을 깔아 뭉개고 타치(太刀)로 목구멍에 찔러넣으려 했는데, 친왕은 "네가 나를 죽이러 온 놈이로구나."라 일갈하며 목을 움츠린 채 칼 끝을 입에 물고, 이빨로 부러뜨렸다. 격투 끝에 겨우 목을 벤 후치베가 친왕의 목을 들고 밖으로 나와 달빛에 비춰 보았는데, 친왕의 목은 두 눈을 부릅뜨고 이에는 칼끝을 물고 있는 처참한 형상이었다. 후치베는 너무나 소름이 돋은 나머지 친왕의 목을 대밭에 내던져 버렸다고 한다(그로부터 2년 뒤에 후치베 요시히로는 호조 도키유키 군세에 뜻하지 않게 피살되었다고 하였다).
 
모리요시 친왕은 예전 정이대장군에 임명되었던 적도 있었고, 모리요시 친왕이 호조 도키유키에 의해 옹립될 경우 황족 쇼군(宮将軍) ・ 모리요시 친왕 - 싯켄 ・ 호조 도키유키의 형태로 가마쿠라 막부가 부활할 것이 예상되었기 때문이다.<ref>阪田、2012年、P10</ref> 한편으로 가마쿠라에 있던 나리요시 친왕(成良親王)은 교토로 무사 송환되어 돌아왔고, 다다요시에 의해 모리요시 친왕이 피살된 것을 교토의 조정에서는 특별히 문제로 삼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친왕이 피살되고 이틀 뒤에 가마쿠라는 호조 군에 의해 함락되었다.<ref>阪田雄一「中先代の乱と鎌倉将軍府」(佐藤博信 編『関東足利氏と東国社会 中世東国論:5』(岩田書院、2012年) ISBN 978-4-87294-740-3))</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