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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요시 친왕

14세기 일본의 황족
막부 타도를 위해 출진하는 모리요시 친왕.

모리요시 친왕(일본어: 護良親王, 1308년 ~ 1335년 음력 7월 23일)은 가마쿠라 시대부터 난보쿠초 시대까지의 황족이다. 고다이고 천황의 후궁 소생의 아들이다. 구스노키 마사시게, 닛타 요시사다 등과 힘을 합쳐 가마쿠라 막부를 무너뜨리는데 큰 공을 세웠다. 다른 황족들과의 알력으로 암살되었다.

생애편집

엔쿄(延慶) 원년(1308년), 고다이고 천황(後醍醐天皇, 당시에는 천황이 아니었다)의 아들로 태어났다. 애초에는 여섯 살 때 소운 법친왕(尊雲法親王)으로써 천태종(天台宗) 3대 문적(門跡)의 하나인 미정문적(梶井門跡) 산젠인(三千院)에 들어가 승려가 되었다. 다이토노미야(大塔宮)라는 궁호는 히가시야마(東山) 오카자키(岡崎)의 홋슈지(法勝寺) 9층탑 주변에 문실(門室)을 두었던 데서 연유한다.

쇼추(正中) 2년(1325년)에는 문적을 이어받아 문주(門主)가 되었고, 아버지 고다이고 천황의 방침에 따라 가레키(嘉暦) 2년(1327년) 12월부터 겐토쿠(元徳) 원년(1329년) 2월까지, 12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두 차례에 걸쳐 천태좌주가 되었다.

일본의 군담소설 《태평기》(太平記)에는 승려임에도 친왕은 무예를 즐겨 단련을 게을리 하는 날이 없었다고 되어 있다. 겐코(元弘) 원년(1331년), 고다이고 천황이 두 번째 막부 타도 계획을 꾀한 겐코의 난이 일어나자, 친왕은 환속하여 참전하였다. 이후 영지를 내려 반막부 세력을 모았는데, 아카마쓰 노리스케(赤松則祐)나 무라카미 요시미쓰(村上義光) 등과 함께 도쓰가와(十津川), 요시노(吉野), 고야산(高野山) 등을 돌며 2년에 걸쳐 막부군과 교전하였고, 교토(京都)의 로쿠하라 단다이(六波羅探題)를 멸망시켰다.

그러나 막부 타도의 공로자였던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高氏)를 경계해, 막부를 타도한 뒤에도 교토로 가지 않고 시기산(信貴山, 지금의 나라 현奈良県 이코마 군生駒郡 헤구리 정平群町)을 거점으로 다카우지를 견제하였다. 부황이 행한 겐무 신정(建武新政)에서 친왕은 정이대장군(征夷大将軍) 병부경(兵部卿)으로 임명되어 상경하고, 다카우지는 진수부장군(鎮守府将軍)이 되었다. 친왕은 다카우지 견제를 위해 자신의 연척인 기타바타케 지카후사(北畠親房)와 함께 도호쿠 지방 지배를 목적으로 노리요시 친왕(義良親王, 훗날의 고무라카미 천황)을 쇼군으로 삼아 지카후사의 아들인 아키이에(顕家)가 무쓰노카미로써 보좌하는 형태로 무쓰 쇼군부(陸奥将軍府) 설치를 진언하였으나, 실현되지는 못한다.

그러나 다카우지 뿐 아니라 부황 및 그 총비인 아노 야스코(阿野廉子)와 반목하게 되고 다카우지를 암살하기 위해 병사를 모아 암살을 기도하나, 이 일로 정이대장군에서 해임되고 겐무(建武) 원년(1334년) 겨울에는 황위 찬탈을 시도했다는 이유로 고다이고 천황의 명을 받은 나와 나카토시(名和長年), 유키 지카미쓰(結城親光) 등에게 체포, 아시카가측에 넘겨져 가마쿠라로 압송되고, 가마쿠라 쇼군부(鎌倉将軍府)에 있던 다카우지의 동생 아시카가 다다요시(足利直義)의 감시를 받게 된다.

아버지 고다이고 천황과의 불화는 막부 타도 과정에서 막부 토벌의 윤지를 내렸던 부황을 제치고 친왕이 먼저 영지를 내린 데서 비롯되었다고 알려져 있으며, 황위 찬탈의 혐의는 친왕에게 억울하게 덧씌워진 것이다. 친왕이 실각할 전조는 모리요시를 지지하던 아카마쓰 엔신(赤松円心) 세력이 크게 저하된 것이었다.

이듬해 호조 도키유키(北条時行)가 반란을 일으키고(나카센다이의 난) 간토 각지에서 아시카가 군이 호조 군에게 패하는 가운데, 니카이도가타니(二階堂ガ谷)에 있는 도코지(東光寺)에 유폐되어 있던 모리요시 친왕은 다다요시가 보낸 후치베 요시히로(淵辺義博)에 의해 암살당하고 만다. 예전 정이대장군이 된 경험이 있는 모리요시 친왕이 도키유키에게 옹립될 경우, 모리요시 친왕이 황족 쇼군으로써, 호조 도키유키가를 싯켄(執権)이 되는 형태로써 가마쿠라 막부가 부활할 것으로 예상되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가마쿠라에 설치된 나리요시 친왕(成良親王)은 교토에 무사히 송환되었고, 모리요시 친왕 피살에 대해서는 문제가 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친왕이 피살되고 이틀 뒤 가마쿠라는 막부군에 의해 함락되었다.

사후편집

《태평기》에는 친왕이 도코지 땅에 세운 감옥에 갇혔고(감옥은 친왕을 제사지내는 신사인 가마쿠라 궁 부지 안에 복원된 것이 현존) 다다요시의 가신인 후치베 요시히로에게 살해된 모리요시 친왕은 공가(公家) 후지와라노 야스후지(藤原保藤)의 딸 미나미노가타(南方)로부터 조분받았다고 한다. 미나미노가타 소생의 아들은 훗날 승려로써 출가해 법명을 일예(日叡)라 하고, 가마쿠라의 묘호지(妙法寺)를 열었으며 이곳에서 부모의 명복을 빌었다고 한다.

모리요시 친왕의 친왕의 누이동생이 고다이고 천황의 명을 받들어 기타카마쿠라(北鎌倉)에 있는 도케이지(東慶寺)의 5대 비구니가 되어 요도니(用堂尼)라 불렸다고 한다. 도케이지에는 모리요시 친왕의 승려 시절 이름인 「소운 법친왕」이라 적힌 위패가 모셔져 있다.

모리요시 친왕의 묘소는 가나가와현 가마쿠라 시 니카이도에 있고, 일본 궁내청(宮内庁)이 관리하고 있다. 묘호지에도 묘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