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시 (중국):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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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6월 5일 (토) 13:35 판
호시(互市)란 중국 역대 왕조가 수륙 방면의 국경 지점에 두었던 공인 대외 교역장이다. 또한 이러한 의미에서 더 확신되어 명 왕조 후기부터 청 왕조 초기에 걸치는 중국의 대외 교역 행위 및 그 시스템을 가리키는 데에도 쓰이는 용어이기도 하다.
한대 호시에서 남월이나 흉노, 선비족 등 남북 이민족과의 교역을 행하고 있었음이 확인된다. 당대에는 대외교역을 행하던 해상의 포구들을 시박(市舶)이라 하여, 이들 항구에서의 호시를 관리하였다. [1]
명 왕조는 당초 해금 정책(海禁政策)을 취하여 조공(朝貢)이라는 형식을 따르지 않은 사적인 무역을 엄격히 금지하였다. 일본의 오우치 씨 등 사이고쿠 유수의 다이묘들과의 사이에서 행해졌던 감합무역(勘合貿易)의 경우도 일본측에 있어서는 조공 무역의 일환이었다. [2] 그러나 16세기 후반에 이르러 후기 왜구(後期倭寇)로 인해 해금 정책은 한계에 이르렀고, 조공 형식을 따르지 않는 사적인 무역도 용인된다. 이는 이후 청 왕조로도 이어져서 조공 체제 바깥에서 외교를 수반하지 않는 형태로 호시 체제가 형성되게 된다. 에도 시대(江戸時代) 일본 또한 이러한 호시 체제 아래서 청 왕조와의 교역을 행하였다. [3]
다만 청 왕조가 해금을 완전히 해제하고 자유 무역을 허용한 것은 아니었으며, 갖가지 규제를 두어 관리하고자 하였다. 그 가운데 하나가 서구 유럽 세계와의 교역을 광주(広州) 한 곳에 묶어두었던 이른바 광동 무역(広東貿易) 체제이다. 하나 이러한 규제 시도는 청 왕조 말기 아편전쟁과 그 결과로 체결된 남경조약으로 방기되기에 이른다. [4]
청대에 호시가 행해졌던 주요 지점은 다음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