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카소바스 조약: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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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조약으로 인해 스페인은 포르투갈의 허락없이 포르투갈의 영해(북위 26도 이남지역의 대서양)로 항해할 수 없게 되었다. 이는 추후 양국간의 갈등의 씨앗이 되었다. 1493년 3월, 콜럼버스가 1차 항해를 마치고 귀국한후 스페인과 포르투갈 사이에 영토분쟁이 발생하였다. 스페인으로부터 지원받은 콜럼버스가 항해를 통해 몇몇 개의 새로운 섬들을 발견하고 귀국했는데, 그 섬들이 북위 26도 이남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이다. 양국간에 체결한 알카소바스 조약에 따르면 스페인은 북위 26도 이남 지역에 대해 항해를 할수도 없고 탐험과 개척이 금지되어 있었다. 따라서 콜럼버스는 이 조약을 위반하여 항해를 했을뿐만 아니라 콜럼버스가 발견한 새로운 땅은 포르투갈의 영토에 속했기 때문이었다.<ref>함규진 <조약의 세계사> 미래의 창</ref>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콜럼버스]]가 알카소바스 조약을 위반했음을 인지한 포르투갈의 [[주앙 2세 (포르투갈)|주앙 2세]]는 이 사실을 스페인에 통보하며 강력히 항의했다. 아울러 영토 반환을 요청하자 양국간에 분쟁이 발생했다. 양국은 분쟁을 해결하고자 교황청에 분쟁조정을 요청하였다. 교황 [[교황 알렉산데르 6세|알렉산데르 6세]]는 1493년 5월3일 칙령을 통해 중재안을 발표했으나제시했다. 그러나 교황의 중재안은 자신의 조국인 스페인에에 유리한 내용이 많았다. 포르투갈의 국왕 주앙 2세는 교황의 중재안이 포르투갈에게 너무 불리하다고 판단하여중재안을 불복하였다거부했다.<ref>이강혁 <라틴아메리카 역사 다이제스트 100> 가람기획, 102페이지</ref> 양국은 로마 교황청과 무관하게 단독으로<ref>윌리엄 번스타인 <무역의 세계사> 라이팅 하우스 264페이지</ref> 약 1년여의 협상 과정을 거쳐 1494년에 새로운 영토 경계선을 규정한 [[토르데시야스 조약]]을 체결하였다.<ref>이강혁 <라틴아메리카 역사 다이제스트 100> 가람기획, 102~103페이지</ref>
 
알카소바 조약은 식민주의 역사에서 획기적인 사건으로 여겨질 수 있다. 유럽 강대국들이 나머지 세계를 '영향력의 영역'으로 나누고 그러한 영역 내에 위치한 영토를 식민지화할 수 있도록 권한을 부여받으며, 그곳에 살고 있는 원주민들은 모두 동의를 구하지 않아도 된다는 원칙을 공식적으로 개괄하는 최초의 국제 문서 중 하나이다. 이것은 20세기 탈식민지화까지 유럽 열강의 이념과 실천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원칙으로 남아 있었다. 알카소바스 조약은 동일한 기본원칙에 근거한 많은 후기 국제조약과 기구들의 선례로 간주될 수 있었다. 여기에는 세계 탐험에서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입장을 더욱 성문화한 1494년 토르데시야스 조약과 4세기 후 베를린의 1884년 총회의 결의가 포함되는데, 이 결의안은 아프리카를 식민지 세력권으로 나눈 것과 거의 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