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흠: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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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는 재주와 무용이 있다고 칭찬을 받았다. [[위풍]](魏諷)의 모반에 연루되어 사형에 처해질 뻔했으나, 아버지의 공으로 인해 [[조조]](曹操)가 사면해 주었다. [[태화 (위)|태화]](太和)연간에 오영교독이 되었고, 아문장이 되었다.
===양주의 관리===
전임하여 여강태수(廬江太守) 및 응양장군((鷹揚將軍)이 되었다. [[왕릉 (조위)|왕릉]](王淩)이 상주하여 문흠의 실정을 치죄하길 구해 중앙으로 불러들여졌으나, 당시 권세를 쥔 [[조상]](曹爽)과 동향이었으므로 문흠의 죄를 묻지 않고 오히려 후대하였다. 이에는 조상의 최측근 심복 [[정밀]]의 계책이 있었다. 다시 여강으로 돌려보내, 관군장군이 되었다. 이 때문에 문흠은 더욱 교만해지고, 허명을 높였다. 문흠은 육안 땅에 진영을 두고 오나라의 도망자나 반란자를 유인하여 변방에 피해를 주고 있었는데, [[적오 (오)|적오]]4년([[241년]]), [[주이]](朱異)의 습격을 받아 격파당했다. 적오 13년([[250년]]) 겨울 10월, 거짓으로 모반하여 주이를 유인했다. 그러나 주이가 거짓 투항으로 알고 신중하게 대처하였으므로, 아무 것도 얻을 수 없었다.
===관구검·문흠의 난===
조상이 주살된 후, 위로 차원에서 전장군에 임명되었으나 여전히 불안해했다. [[제갈탄]](諸葛誕)을 대신해 양주자사가 되었다. 양주의 군권을 쥔 제갈탄과는 사이가 나빠 모의를 함께하지 않았다. 마침 제갈탄 대신 [[관구검]](毌丘儉)이 진동장군(鎭東將軍) · 도독양주제군사(都督揚州諸軍事)에 임명되어 양주의 군권을 쥐었다. 문흠은 전공을 여러 차례 세우고 노획물을 부풀려 조정의 총상을 받고자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아 원한이 있었는데, 관구검이 이를 헤아리고 문흠을 후대하니 문흠은 관구검에 대해 두 마음을 품지 않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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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흠은 오나라에 망명하였으면서도 여전히 교만하였으므로 [[여거]](呂據) · 주이 등의 미움을 샀으며, 오직 손준만이 문흠을 비호했다.
 
이듬해([[256년]]), 손준에게 위나라를 칠 계책을 내었다. 8월, 여거 · 유찬 · 주이 · [[당자]](唐咨)와 함께 회수와 사수로 들어가도록 명령을 받았다. 손준이 죽자 여거 · 당자와 함께 표를 올려 [[등윤]](騰胤)을 승상으로 임명하도록 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조서를 받아 [[유찬]](留贊劉纂) · 당자와 함께 여거를 체포하고자 쳤다. 여거는 자살했다.
===제갈탄의 난===
이듬해([[257년]]) 6월, 당자 · 전단(全端) · 전역(全懌) · 왕조(王祚)와 함께 3만 군사를 이끌고 위나라에서 반란을 일으킨 제갈탄을 구원하여, [[왕기]]가 포위망을 완성하기 직전 성내에 들어가 주이와 호응하여 여러 차례 포위를 뚫으려 했으나 실패했다. 제갈탄의 부하 [[장반]](蔣班)과 [[초이]](焦彛)가 손침이 퇴각하기 전에 속히 공격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문흠은 이를 반대하였다. 제갈탄이 장반과 초이를 죽이려 하였으므로 둘은 위나라에 투항했다. 함께 구원을 온 전씨 일족들이 모조리 위나라에 투항하고, [[손침]](孫綝)도 주이를 죽이고 손은을손은으로 내세웠다가주이를 대신했다가 곧 귀국했다. 이듬해([[258년]]) 1월, 문흠은 전씨 일족들이 투항했으므로, 이쪽이 크게 불리하게 되어 저쪽이 방비가 없을 때 공격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제갈탄과 당자도 이를 옳게 여기고 포위망을 뚫고자 맹렬히 싸웠으나 결국 큰 피해만 입고 물러났다. 문흠은 위나라 군사를 내어 보내고 오나라 군대들로 성을 지키기를 원했으나, 제갈탄은 듣지 않았다. 안 그래도 나쁜 사이였는데 단지 어쩔 수 없이 협력하고 있던 것이 이제는 완전히 어그러져버렸다. 결국 제갈탄은 문흠을 죽였다.
===사후===
문흠이 제갈탄에게 주살당하자, 아들 문앙과 문호는 위나라 군대에 투항했다. 반란이 평정된 후, 두 아들들은 허락을 받아 문흠의 시신을 거두어 염하고 장례를 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