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량 해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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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국2=[[일본]]
|지휘관1=[[이순신]]<br />[[김억추]]
|지휘관2=[[도도 다카토라]]<br />[[구루시마 미치후사]]†<br />[[가토 요시아키]]<br />[[와키사카 야스하루
|병력1=판옥선 13척
|병력2=전선 133척<br />수송선 200척 이상
|사상자1=전선
|사상자2=전선 31척 격침, 92척 파손 및 대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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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경 ==
=== 조선 수군의 재건 ===
[[이순신]]이 모함을 받고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에서 파직당한 뒤 [[원균]]은 새로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일본 수군과 접전을 벌였으나 [[칠천량 해전]]에서 대패하여
이 때 조선군에게 남은 전선은 겨우 12척에 불과하였다. 이순신이 1597년 [[음력 8월 18일]] [[회령포]]에서 전선 10척을 거두었고, 그 후 2척이 더 회수됨으로써 12척이 남은 전선의 전부였던 것이다. 나중에 명량 해전을 앞두고 또 1척이 추가되어
하지만 워낙 칠천량의
=== 일본 수군의 기동 ===
이때 어란포의 일본 수군은 [[구루시마 미치후사]]와 [[도도 다카토라]], [[와키사카 야스하루]], [[가토 요시아키]]가 지휘하는 330여 척의
일본 수군은 [[1592년]]의 전훈을 참조하여 내륙으로 깊숙이 진격하기 전에 반드시 [[서해]]의 해상권과 전라도를 장악하고자 하였다. 이순신이 복귀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13척의 전선만으로
한편, 이순신도 일본 수군의 기동 보고를 받고 장병들에게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요, 죽고자 하면 살 것이다.”라고 말하며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우고 출정하였다.
=== 울돌목에서의 접전 ===
울돌목(명량해협)은 수심이 얕아 실제 배가 항해할 수 있는 폭도 좁았고, 그 중에서도 [[밀물]] 때 넓은 [[남해 (한반도)|남해]]의 바닷물이 좁은 울돌목으로 한꺼번에 밀려와서 서해로 빠져 나가면서 해안의 양쪽 바닷가와 급경사를 이뤄 물이 쏟아지듯 빠른
조선 수군은 이 울돌목에서 결전을 벌일 계획이었으나 작전을 노출시키지 않기 위해서 5킬로미터 떨어진 [[벽파진]]에서 진을 치고 15일간이나 일본 수군을 유인하며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 수군 역시 그런 급류에는 이미 어느 정도 적응되어 있었고 오히려 그런 급류를 타고 수가 적은 조선 수군을 단숨에
일본 수군의 탄생지라 할 수 있는 일본의 [[시코쿠]](四國)의 [[미야쿠보]] 지역도 울돌목과 마찬가지로 엄청난 조류가 흐르며 물의 속도 또한 울돌목에 못지 않다고 한다. 특히
따라서 명량 해전에 참전한 일본 수군에게 울돌목의 빠른 물살은 그것만으로는 위험한 것이 아니었다. 학자들은 오히려 일본 수군이 울돌목으로 과감하게 진입한 것은 빠른 급류를 이용하여 조선 수군을 격파하고 전라도로 진격하려는 것으로 추정한다.
== 경과 ==
이순신은 항상 자신이 원하는 곳에서 싸웠다. 이번에도 이순신은 일본군이 조선군을 가볍게 보고 있다는 점을 이용하여 그들을 유인하고자 했다. [[음력 9월 7일]], 조선 수군은 벽파진 근처에서 일본 수군의 소함대를 물리쳤다. 일본 수군은 조선 수군이 13척뿐임을 알고,
벽파진으로 우수영을 옮긴 이튿날인 [[음력 9월 16일]] 오전, 일본 수군 200여 척이 순조(順潮)를 타고 [[울돌목]]으로 들어섰다. 이 중 70여 척이 입구 쪽에 남고 나머지 133척이 해협으로 진입했다. 이때 해류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즉, 일본 수군이 해류의 흐름과 일치하는 순방향이었다.
조선 수군 13척의 전선도 해협으로 들어서서 일본 수군을 맞이했다. 전투가 시작되자, 조선군 일부가
이순신은 구루지마를 끌어올릴 것을 명령했다. 갈고랑쇠에 낚여 배 위로 끌려 올라온 구루지마는 격전의 와중에 전사했다. 잘린 구루지마의 목은 기함에 높이 걸렸고, 조선 수군의 사기가 급격히 올라갔다. 반면에, 전투 중에 지휘관이 적군에 의해 참수되고 그 목이
거기에 또 하나의 악재가 일본 수군을 덮쳤다. 오후가 되자 해류의 방향이 바뀌었다. 이번에는 거꾸로 조선 수군이 순조가 되고, 일본 수군에 역조(逆潮)가 되었다. 지휘관을 잃고, 해류 때문에 앞으로 나가지도 못하고 너무 좁은 해역에 많은 배가 들어서는 바람에 뒤로 돌아서는 것도 쉽지 않아 일본 수군의 군함들은 마구 엉키었다. 조선 수군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포격전과 충파를 거듭했고, [[판옥선]]에 비해
오후
=== 결과 ===
일본군의 전선 333척 중 31척이 격침되었고, 90여 척이 심하게 파손되어 전선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하였다. 이로써 일본의 수륙 병진 전략은 또 한 번 좌절되었고 일본군은 내륙 깊숙이 쳐들어가지 못하고 남해안 일대에 서로 지원이 가능한 거리 내에 분산되어 왜성을 쌓고 농성에 들어가게 된다. 이후 [[정유재란]]은 농성하는 일본군을 조명 연합군이 수륙 양면에서 협공하는 공성전으로 바뀌었다. 조선의 전략적 승리였다.
그러나 이 전투의 패배가 일본군에 안겨준 심리적 타격은 더 컸을 것이다. 특히 칠천량에서 승리한 직후에 고작 13척의 이순신에게 패했다는 사실은, 파손된 90여 척은 수리 후 사용 가능했기에 잃은 배는 얼마 안 되지만, 이순신에 대한 두려움은 예전보다 더 커졌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후 바뀐 전쟁 양상과 더불어 2년간 별다른 해전은 벌어지지 않았다. 마지막 해전인 [[노량해전]]이 벌어질 때까지 2년간 해전은 3회를 기록했고, 나머지는 수군도 육군과 협력하여 남해안 일대의 왜성 공격에 참가한 것이었다. 물론 명나라의 화평 노력으로 소강 상태에 빠진 것도 한 이유다.
=== 승리의 원인 ===
조선 수군의 승리의
일본군 전함은 첨저선으로 뱃머리가 뾰족하고 판자의 연결에 쇠못을 사용한 [[아타케부네]](安宅船)고, 조선군의 전함은 뱃머리가 둥글고 나무못을 사용한 [[판옥선]]이다. 또한 판옥선의 크기는 일본군의 가장 큰 배인 아타케부네보다 컸다. 뱃머리가 둥글다는 것은 물에 잠기는 부분이 적어 회전이 용이하였고, 반면 쇠못은 녹이 슬어 부식되는 결과를 가져와 배의 안정성에 심각한 문제를 안겨주었고, 충격에 약해 쉽게 파손되었다. 조선 수군은 포격전만으로 전투를 수행하지 않았고, 필요한 경우나 불가피한 경우 충각전술로 일본군의 배를 부서뜨리는 돌격전법도 자주 구사했던 것도 이러한 배의 특성 덕분이었다. 다만 [[거북선]]이 없었다.
함포는 임진왜란 전체를 통틀어
또한 울돌목의 지형을 이용한 이순신의 전략과 병사들의 사기도 승리의 요인으로 들 수 있다.
당시 이순신은 [[울돌목]]에 쇠사슬을 설치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군은 해협에 설치된 ‘쇠사슬’을 전혀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목포]]의 해양 방어 사령부에는 지금도 수백 척의 배를 끌어당길 때 쓰는 ‘막개’가 있는데 학자들은 이순신 장군이 울돌목에서 이런 막개를 이용한 쇠사슬 전법을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울돌목의 폭은 280∼320미터 안팎이다. 여기에다 배를 끄는 데 필요한 쇠사슬의 길이를 감안하면 450미터 안팎의 쇠사슬이면 충분하다. 쇠사슬의 무게는 배의 무게를 감안하여 4톤 정도로 추정했다.
《[[역사스페셜|KBS 역사스페셜팀]]》은
{{인용문|수중 철쇄(쇠사슬)는 지금 [[진도대교]]가 있는 폭이 가장 좁은 자리에 걸었다. 양쪽에 막개를 박아놓고 쇠줄은 물 속에 잠기게 숨겨놓은 뒤 왜수군을 기다리는 것이다. 1597년 음력 9월 16일 오전 11시경, [[어란진]]에서 출발한 333척의 일본 수군은 우수영으로 흐르는 밀물을 타고 빠른 속도로 울돌목에 들어선다. 그들이 울돌목에 들어서자 수중 철쇄에 걸려 차곡차곡 쌓이며 서로 부딪쳐 여지없어 부서진다. 오후 1시경 밀물이 끝나고 물길이 멈춘다. 일본 수군은 좁은 수로에 갇혀 오도가지 못한 채 혼란에 빠져 있을 때 이순신 장군의 함선들이 전진하며 각종 [[화포]]를 빗발처럼 퍼붓는다. 다시 썰물이 되는 순간, 정지했던 물길이 거꾸로 바뀌어 왜수군 쪽으로 흐른다. 유리하던 조류마져 불리하게 변하자 조선 수군이 떠내려가는 일본 수군을 완전히 섬멸한다. }}
그러나 이런 명량 해전의 전투 위치와
먼저 전투 위치는 명량해협(울돌목)이 아니라 해협을 통과한 뒤 [[해남군]]을 따라 우측으로 구부러진 지점인 전라우수영(해남군 [[문내면]]) 앞바다라고 주장했다. 그 근거로 《[[난중일기]]》 음력 9월 16일자를 제시한다. 그 부분을 보면 “왜 함대의 접근 보고를 받고 전투 준비를 마친 뒤 바다로 나갔는데 곧바로 왜선 133척이 우리 전선들을 에워쌌다.”라고 되어 있다. 명량해협(울돌목)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장면이라는 것이 이민웅 교수의 주장이다.
또, 명량에서 쇠사슬을 설치해 왜선을 격퇴했다는 설명에 대해서도 후대 영웅담이 확대·재생산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설화]]
이 쇠사슬은 당시 전라우수사 [[김억추]]가 자신의 행적을 직접 기록한 《[[현무공실기]]》에 “철쇄(鐵鎖) 즉 쇠사슬과 철구(鐵鉤)로 적선을 깨뜨렸다.”란 기록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 기록은 과장이 많아, 사실이 왜곡되었을 가능성이 높으므로 철쇄설에 의문을 제기하는 하나의 근거로써 쓰인다.
이 문제는 오랫동안 이순신의 신화를 벗겨내고 사실을 조명하겠다는 소장파 학자의 주장이다. 따라서 앞으로 관련 전사 전문가들이 보다 정확한 검증 과정을 거쳐 결론을 내려야 할 것이다.
=== 마다시와 구루지마 미치후사 ===
《난중일기》에는 마다시(馬多時)로 기록되어 있으나 본명은 [[구루시마 미치후사]](來島通總)가 맞으며 일본의 유명한 [[해적]] 가문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 [[당항포 해전]]에서 이순신의 함대와 맞서 싸우다 전사한 [[구루시마 미치유키]](來島通之)의 동생으로 알려져 있다. 형의 원수를 갚고자 명량해전에서 선봉에 섰으나, 결국은 조선 수군과 전투에서 그 자신도 전사함으로써 가문이 멸문의 위기를 맞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 기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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