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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상 ==
공자가 스승으로서 제자들의 교육에 임할 때 목표로 삼은 것은 '군자(君子)'의 양성이었다. 군자란 원래는 한 나라의 정치에 참여하는 능력과 자격을 겸비한 귀족계층의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었으나, 공자는 그러한 지위나 신분에지위에 어울리는 도덕적 인격·능력·교양을정치적 능력을 지닌 사람으로 뜻을 확대하여 이러한 인재의 육성을 자기 교육의 목표로 삼았다. 교과서로는 춘추시대 이전의 여러 나라 민요나 주나라의 조정에서 의식이나 제사를 지낼 때 부르던 가요 등을 편집한 <[[시경]](詩經)> 또는 주가 천명(天命)을 받아 왕조를 창시할 시기의 왕조의 기록류를 정리한 <[[서경 (책)|서경]](書經)> 등 전통문화를 내용으로 하는 것이 쓰였으나, 한편 공자는 주의 권위가 쇠퇴하여 이윽고 땅에 떨어지는 춘추시대의 노나라 연대기 <[[춘추]](春秋)>를 편술(編述)했다는 말이 있듯이 영고성쇠가 거듭되는 난세(亂世)를 지켜본 사람이기도 했다. 전통문화를 내용으로 하는 교과서와 난세의 양상을 띠기 시작한 현실을 응시하는 눈, 이 두 가지가 공자의 교육을 설명하고 있다.
{{유가}}
공자가 스승으로서 제자들의 교육에 임할 때 목표로 삼은 것은 '군자(君子)'의 양성이었다. 군자란 원래는 한 나라의 정치에 참여하는 능력과 자격을 겸비한 귀족계층의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었으나, 공자는 그러한 지위나 신분에 어울리는 인격·능력·교양을 지닌 사람으로 뜻을 확대하여 이러한 인재의 육성을 자기 교육의 목표로 삼았다. 교과서로는 춘추시대 이전의 여러 나라 민요나 주나라의 조정에서 의식이나 제사를 지낼 때 부르던 가요 등을 편집한 <[[시경]](詩經)> 또는 주가 천명(天命)을 받아 왕조를 창시할 시기의 왕조의 기록류를 정리한 <[[서경 (책)|서경]](書經)> 등 전통문화를 내용으로 하는 것이 쓰였으나, 한편 공자는 주의 권위가 쇠퇴하여 이윽고 땅에 떨어지는 춘추시대의 노나라 연대기 <[[춘추]](春秋)>를 편술(編述)했다는 말이 있듯이 영고성쇠가 거듭되는 난세(亂世)를 지켜본 사람이기도 했다. 전통문화를 내용으로 하는 교과서와 난세의 양상을 띠기 시작한 현실을 응시하는 눈, 이 두 가지가 공자의 교육을 설명하고 있다.
 
공자의 군자교육(君子敎育)에서 중심이 되는 것은 '인의예지'였다. 공자의 경우 '예'란 아직 훗날의 유교처럼 덕목(德目)의 하나는 되지 못했었다. 그것은 공자가 존경했던 주공에 의해서 대성한 중국 고대의 전통문화라는 것과 가깝고 종교의례·제도·관습을 그대로 개괄하는 말이었다. 공자는 주공의 시대, 즉 주왕조 창시기의 사회 본연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시킴을 이상목표로이상적 목표로 삼았었다삼았다. 그는 그 이상목표를 단적으로 나타내는 예(禮)의 학습·습득(習得)을 제자들에게 부과했던 것이다. 그러나 난세(亂世)에 살고 인간을 응시하는 눈을 가졌던 공자는 예가 지니는 의미를 그것을 실천하는 인간에게서 추구했으며 예를 실천하는 인간에게서 인간의 주체성, 즉 '인(仁)'을 발견했다. 공자 교육의 중심은 '인'의 완성이나 혹은 인간형성을 궁극목표로 했던 것이다. 이전 문헌에 나오는 인이라는 말은 남자답다든가 훌륭한 풍채, 외모의 아름다움을 뜻함에 불과했으나 여기서 비로소 공자에 의해서 특별한 뜻을 지니게 되었다고 하겠다.
 
공자의 사상의 핵심은 '인'으로서 스스로 이를 명백하게 규정하지는 않았으나, 대체로 [[박애]]·덕·선,도(道),덕,선 등의 뜻을 지니고 있는 심오한 [[인도주의휴머니즘]]로서으로서, 정치적으로는 이름을 바르게 하고,이에 따라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책임과 본분을 다 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또 사회 생활에 있어서는 자기의 도리를 다하고<ref>진기(盡己)</ref> 남을 부축하며<ref>추기(推己)</ref>, 내가 싫은 것은 남에게 강요하지 않는다는 것을 비롯한 여러 가지 덕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인을 지향하고 예에 정진하는 사람이 군자요, 그렇지 못한 사람은 소인으로서, 군자가 덕을 생각할 때 소인은 이익만을 생각하며, 군자가 보편적임에 비하여 소인은 상대적이라고 역설, 인간을 인간적으로 이분하여 생각하였다. 그러나 인은 공자 스스로도 감당하기 어렵다고 할 만큼 어려운 것임을 시사하였다.
 
'인'은 공자가 생각하는 인간의 최고 도,덕(德)이었다. 덕이란 인간에게서 기대되는 개개의 훌륭한 자질이라고 중국인은 생각하며, 동시에 그것은 영향력 내지는 인격력으로서 남에게 감화를 미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중국인의 정치사상에서 근간을 이루는 [[덕치주의]](德治主義) 내지 정치에서의 도덕중심주의의 근거라고 하겠으며, 공자의 정치사상 근저에도 이 직관(直觀)이 있다. 그는 처음에 위정자 특히 최고 책임의 소재자(所在者)인 군주에 기대를 걸어 각국을 역방하면서 자기 주장을 설명했었다. 뛰어난 덕(德)으로써 백성을 다스리고 백성의 덕을 높여 그 결과 도덕이 고루 퍼져 세상이 저절로 평화가 된다는 바로 그것이 공자의 정치사상이었다. 그러나 이 사고방식은 난세(亂世) 아래의 제후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제자를 교육하고 제자들에게 '인'의 학습을 시킴으로써 고전(古典)의 지식이나 정치기술과 함께 인격적인 '덕을 겸비하는 군자가 되도록 하고, 그들로 하여금 정치의 요로에 참여케 함으로써 난세를, 유혈이 따르는 강권주의가 아니라 평화적인 방법으로 평정하려 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