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천 최씨: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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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천 최씨'''(通川 崔氏)는 [[한국의 성씨]]로 시조는 고려 정종조정종(靖宗, 1018~1046, 재위 1035~1046)조 인물로 추정되는 최경현(崔景賢)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벼슬은 감찰어사와 중서좌상시 겸 판밀직사사라 기록하고 있다. 현재 문헌상 [[경주 최씨]]에서 분관된 것으로 보고있다. <ref>경주최씨 족보인 <아동최씨보>라는 책에 의하면 통천최씨 중시조이자 7세인 평장공 최록이 고운 최치원의 장손파장손파의 12대손 이라고 기록하고 있다.</ref>
 
== 역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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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세인 최운해장군이 고려말에는 왜적토멀로 문하평리에 오르고, 조선에 들어서는 개국원종공신에 봉해지고 병조판서에 오르고, 태종과 세종대에는 8세인 최윤덕(崔閏德, 1376년 ~ 1445년)이 좌의정에 오르고, 형제들과 손자들이 대부분 관직에 진출하여 가문이 융성하였으나, 세조의 왕위찬탈 과정에서 발생한 계유정난과 사육신사건, 연산조의 두번의 사화를 거치면서 많은 후손들이 피화되고 실전되었다. 근대에는 한국전쟁으로 남북으로 분단되면서 북한지역에 세거하고 있던 지파중에서 함흥에 세거하던 극히 일부만 확인하고 있다.</ref>
성씨의 기틀은 고려말 공민왕시대에 활약한 중시조인 7세 최록부터 10세 최숙손까지 4대에 걸쳐 무인 가문으로 조선의 기틀을 다지며 15세기에는 강원도의 대표적인 명문거족 성씨가 될 정도로 명문의 입지를 다졌다. 특히 태종과 세종의 신임을 받던 8세 최운해장군<ref>병조판서를 역임하였던 양장공 최운해장군의 사망으로 조선 개국 이후 법으로 고위관료에 대한 예장과 시호법을 정하게 되었다. 그리고 양장(襄莊)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무인 중 최고(最高)의 공을 가진 인물이라는 평이 남아있다. 사후 세종 16년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ref>와 9세 최윤덕<ref>세종시대의 국방정책을 주관하였다. 압록강변의 4군을 설치하였고 전쟁에 대비하여 축성의 중요함을 항상 강조하여 축성대감이라고도 불렸다. 시호는 정렬(貞烈)이고 종묘의 세종 묘정에 배향되었다. 조선 최초로 무관이면서 정승이 된 인물이다. 참고로 조선조에 무인 출신 정승은 총 5명이 배출되었다.</ref>에 의해 조선 초기의 명문가문의 입지를 다졌다. <ref> 계유정난이 일어날 당시 최윤덕의 장자 최숙손은 세종조에는 경상도와 전라도의 도절제사에, 문종의 승하시에는 궁성사면절제사가 되었고, 계유정난이 일어날 당시에는 사은정사로 중국에 다녀왔고,다녀왔다. 이후에 중추원부사에 제임하는제임하였다. 최경손은 세종조에 상호군을 지냈고, 최광손은 문종조에 용천군사, 최영손은 단종조에 사복시정에 있는 등 최윤덕의 아들 4형제가 모두 4품 이상의 중앙 벼슬에 있었다. 둘째 동생 최윤온은 사헌부감찰태종대에 사헌부감찰을 시작으로, 세종조에는 함흥소윤, 사헌부집의, 성천도호부사, 승정원 우승지, 충청도 병마절제사를 거쳐 단종조에는 판전농시사에, 있었다. 그의 아들 최교는 이미 세종대인 20대 초반에초반인 세종14년(1432년) 현감을능성현감을 지내는 등 많은 인물들이 조정에서 상당한 위치에 있었다.</ref>
 
그러나 정렬공 최윤덕의 사후 10여 년 만에 단종이 폐위되고 세조가 등극하는 과정에서 최윤덕의 아들 최숙손과 최영손, 장손 최맹한과 손자 최계한은 사육신 사건과사건에, 4남 최영손은 금성대군 사건으로 피화되었고,피화되었다. 동생첫째동생 최윤복의 아들인 최노를 비롯한 조카들과 후손들은 계유정난으로 피화되었다. 둘째동생 최윤온과 조카들은 계유정난에 김종서의 절친으로 정변이 일어나자 난을 피해 해남으로 낙남하였다. 성종조에 죽은 정렬공의 아들 최숙손과 손자들, 조카들이 복권되었으나 연산조에는연산조에 사화의 원인인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사초에 포함시긴 <김일손의 사초사건>에서 단종의 충신이었던충신이자 최맹한이최윤덕의 장손인 최맹한의 말이 시발점이 되는 등<ref>사육사건으로 유배형을 당했던 정렬공 최윤덕의 장손 최맹한은 단종의 억울한 죽음에 대해 한을 가지고 사림들에게 널리 토로한 것을 김일손이 전해 듣고 <<조의제문>>을 사초에 추가하였다. 이후 무오사화가 일어나 고일어나고 김일손의 공초에서 김일손은 '고 최맹한은 진실한 사람이라 그의 말을 믿고 기록하였다.'는 발언을 하였다. 이 사건으로 최맹한의 장자이자 정렬공의 종손인 최륜이 무오사화에 현감으로 재임하다 장수군으로 유배를 가게 되었고, 갑자사화에갑자사화에는 사약을 받고 죽었다. 처음에 정렬공 최윤덕장상 부조묘가 고향인 창원에 세워졌는데 정렬공의 종손인 최륜이 무오사화에 유배를 가면서, 정렬공의 제사라도 받들기 위해 유배지로유배지인 장수로 이건하였고, 결국 선영이 있는 창원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이건하여졸하여 현재현재는 장수군에 위치하고 있다.</ref> 전체 가문이 단종에 충의를 보이다 큰 화를 입었다. 이후 정조대에 단종의 충신단에 최윤덕의 4남 최영손과 최윤복의 아들 최노, 최노의 여동생 내은덕이 함께 별단에 배향되었다.
 
성종조에 사육신사건으로 유배되었던 인물들이 사면되어사면되면서 후손들이 벼슬길에도 나서고, 임진왜란 당시에당시에는 외교문서를 전담했던 간이당 최립과 선무원종공신으로그의 아들 최동망, 이천전투에서 분전하고 부상으로 사망하여 선무원종공신과 북도병마사에 추증된 최산정옥포공 등,최산정등 나라를 구하려 노력했던 인물들의 활약으로 사육사건으로 받았던 역적의 멍애를 어느정도 벋어나 과거의 피해를 복구할 수 있었다. 이후 고종조에는 전라좌도수군절도사를 지낸 최성온과 중추부동지사에 오른 최이헌 등이 가문을 알렷다.
 
== 인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