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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식진'''(寔進, [[615년]] ~ [[672년]])은 [[백제]] 출신의 [[당나라|당(唐)]]의 군인. 백제가 멸망한 뒤 당으로 건너가 '좌위위대장군(左威衛大將軍)'에 올랐다. [[2006년]]에 그의 묘지명이 [[낙양|낙양(洛陽)]]의 시장에 나타났으며, [[2007년]] [[길림성]]의 격월간 역사잡지인 <동북사지(東北史地)>에 기존의 다른 백제 유민들의 묘지명과 함께 처음 소개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고 더불어 백제 유민 예식진의 존재도 확인되었다.
 
== 개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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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씨 집안의 출자와 중앙 진출 ===
==== 예씨의 유래 ====
기록상 예씨라는 성을 쓴 사례는 [[후한|후한(後漢)]] 때의 [[예형]](衡)이 유일한데, 이를 들어 흔히 예식진의 선대는 중국인으로, 백제가 [[대방군|대방(帶方)]]의 옛 땅을 차지하기 위해 [[고구려]]와 대치하는 과정에서 백제로 편입된 것으로 보는 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예씨의 존재를 후한대 이후로는 찾아볼 수 없다는 점과 『예식진묘지명』에서 그의 선대의 연원을 중국과 관련지어 언급하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무작정 중국계 성씨로 단정할 수만은 없다는 주장도 있다. 예씨의 출자와 선대에 대해 묘지는 조부인 예다까지만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흑치상지묘지명』이나 『천남생묘지명』등 한국 관련 중국 묘지명에서 묘지 주인공의 증조부까지 언급하고 있는 것과 대조적인 것으로, 예씨 집안이 예다 이전까지 백제 조정에서 별다른 영향력을 갖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냐는 해석도 존재한다.
 
==== 예씨 집안과 웅진 ====
한편 조부와 아버지, 그리고 예식진 본인이 모두 웅천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에서 웅진(웅천)과의 지역적 연관성을 가진 집안으로 볼 수 있는데, 예()라는 글자에 '친묘(親墓)' 즉 아버지의 신위를 모신 사당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 것에 착안해, 웅진에 묻힌 선대 백제왕들의 무덤을 관장하는 등의 제사 주관 의무를 위임받은 가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이와 관련해 예씨 집안이 예씨라는 성을 칭하게 된 것은 [[사비성|사비성(泗沘城)]] 천도 이후라는 주장이 있다.<ref>이도학,「백제 사비성 시대 연구」2010, p312</ref>
 
예씨 가문이 백제 조정의 주요 세력으로 득세하게 된 시점은 대체로 [[백제 무왕|무왕(武王)]] 시기로 추정하고 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무왕은 재위 28년(627년) 7월 이후 '신라가 침략한 땅'인 한수 유역을 회복하기 위해 웅진성에 머무르면서 대규모 병력을 일으키고, 또한 수도 사비성의 궁궐을 중수하는 과정에서 웅진성에 머무르기도 하는 등 웅진에 대한 관심을 보였다. 또한 무왕 시대에는 왕효린 등의 중국계 가문이나, 웅진 시절 정계 외곽으로 밀려나 소외되었던 해씨ㆍ백씨 등의 옛 가문들이 대거 기용되었는데<ref>이도학,「백제 무왕의 계보와 집권 기반」『백제문화』34, 2005, 83쪽</ref>, 이 과정에서 웅진성 출신으로 그때까지 별다른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던 예씨 집안, 예식진의 아버지나 할아버지와는 어떤 형태로든 연결되었던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