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즙 파동: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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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무즙 파동'''(-汁波動)은 [[1965년]]도 대한민국 중학교 입시 문제에서 [[무즙]]과무즙과 관련된 문제에서 복수 정답을 인정해야 하는지에 대해 논란이 벌어졌던 사건을 부르는 말이다. 이 사건은 ‘치맛바람’이라는 말이 나올 만큼 지나칠 정도로 높은 [[대한민국]]의 교육열을 상징적으로 잘 드러낸다.
 
== 사건 개요 ==
[[1964년]] [[12월 7일]]에 치른 [[서울특별시|서울]] 지역 전기(前期) [[중학교]] 입시 자연 과목 18번 문제는 다음과 같았다.
 
{{인용문|다음은 [[엿]]을엿을 만드는 순서를 차례대로 적어 놓은 것이다.
# [[찹쌀]] 1kg가량을 물에 담갔다가
# 이것을 쪄서 [[밥]]을밥을 만든다
# 이 밥에 물 3L와 [[엿기름]] 160g을 넣고 잘 섞은 다음에 60도의 온도로 5∼6시간 둔다.
위 3.에서 엿기름 대신 넣어도 좋은 것은 무엇인가?}}
 
서울시 공동출제위원회는 보기 1번 ‘[[디아스타제]]’가 정답이라고 발표했으나, 2번 ‘[[무즙]]’을‘무즙’을 답이라고 선택한 학생들의 학부모들이 초등학교 교과서에 ‘[[타액|침]]과 [[무즙]]에도무즙에도 [[디아스타제]]가 들어 있다’는 내용이 있으므로 무즙도 답이라고 강력하게 반발했다. 실제로 일부 학부모들은 무즙으로 엿을 고을 수 있음을 보여, 무즙도 정답이라고 주장했다.
 
1960년대에는 중학교 입시도 오늘날의 대학입시 못지않게 치열하던 시절이었으며, 일부 사립 명문에 입학하려는 과열된 경쟁이 있었다. 문제 하나를 맞고 틀리는 것에 따라 당락이 결정되므로 학부모들이 무즙도 답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반발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한편, 교육 당국은 능숙하게 대처하지 못하면서 오히려 사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시험 다음날인 [[12월 8일]]에는 논란의 여지가 없다고 주장하다가, 반발이 가라앉지 않자 [[12월 9일]]에는 해당 문제를 아예 무효화한다고 발표했다. 이에 1번을 정답으로 선택한 학생들의 학부모들이 반발하자 다시 원래대로 디아스타제만 정답으로 인정한다고 발표하는 등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였다.
 
결국 이 사건은 법적 공방으로 이어졌다. 1점 차이로 명문중학교에 입학하지 못하게 된 38명(또는 39명)이40여 명이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1965년]] [[3월 30일]], 서울고등법원 특별부가 무즙도 정답으로 봐야 하며, 이 문제로 인해 불합격된 39명의 학생들을 구제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이때이 때 구제받은 학생은 경기중학교 30명(또는약 30여 31명), 서울중학교 4명, 경복중학교 3명, 경기여자중학교 1명이었다. 당시 교육위원회는 추가 입학을 반대했지만, 다시 학부모들이 시위를 벌였고 판결이 나온지 약 1달 뒤인 5월 12일에 전입학 형식으로 등교할 수 있게 되었다. <ref>{{웹 인용 |url = http://blog.joins.com/media/folderlistslide.asp?uid=n127&folder=3&list_id=8888484 |제목 = 수능 엿 먹일 물리 오답 논란 |확인일자 = 2009년 12월 7일 |저자 = 노태운 기자 |작성일자 = 2007년 12월 23일 }}</ref>
 
== 사건의 영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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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형들은 “[[12월 21일|21일]] 오후에 김 교육감이 ‘무즙으로도 엿을 만들 수 있다면 자연 18번의 복수정답을 인정하겠으며, 탈락자들을 구제하겠다.’ 라고 언약했다.” 고 주장했고, '''‘이 엿을 먹어보라’''' 는 구호와 함께 실제 무즙으로 엿을 만들어오는 등 시교위와 김 교육감의 무책임한 자세를 힐난했다.<ref>{{웹 인용 |url =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4122200209208015&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64-12-22&officeId=00020&pageNo=8&printNo=13282&publishType=00020 |제목 = 꼬리 문 소동 '자연 18번' 무우즙 엿 먹어보라 낙방 자모들 엿들고 시위 |확인일자 = 2011년 12월 8일 |작성일자 = 1964년 12월 22일 }}</ref>
 
'''‘엿 먹어라’'''라는 욕설이 이때부터 사용되었다는 주장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20세기]] 초부터 사용된 용어라는 반론이 제기되었고 정확한 어원을 확인하려는 시도는 성과 없이 끝났다.
 
== 주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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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같이 보기 ==
* [[대한민국의 창칼 파동]]
 
== 바깥 고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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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5040600209207009&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65-04-06&officeId=00020&pageNo=7&printNo=13370&publishType=00020 재채점 있을수 없다. 문교부서 "무즙" 판결에 표명] - 1965년 4월 6일 동아일보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503300032920300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65-03-30&officeId=00032&pageNo=3&printNo=5983&publishType=00020 '무우즙'도 정답 - 말썽난 중학입시 문제에 고법 판결] - 1965년 3월 30일 경향신문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분류:제3공화국]]
[[분류:대한민국의 교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