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스코의 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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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조정의 대립이 깊어지는 가운데, 9월 6일, 헤이제이 상황은 헤이안쿄를 폐하고 헤이조쿄로 천도한다는 조칙을 내렸다. 이는 사가 천황에게 있어서는 생각치 못한 사건이었고, 천황은 일단 이에 따를 기색을 보이며 [[사카노우에노 다무라마로|사카노우에노 다무라마로(坂上田村麻呂)]], 후지와라노 후유쓰구(藤原冬嗣), 기노 다카미(紀田上) 등을 왕성 조영을 위한 조궁사(造宮使)로 임명한다. 이들은 모두 사가 천황의 신임을 받고 있던 측근들이었다.
 
천도 소식에 인심은 몹시 동요했고, 결국 천도를 거부하기로 결단한 사가 천황은 9월 10일에 사절을 보내 [[이세 국|이세(伊勢)]]·[[오미 국|오미(近江)]]·[[미노 국|미노(美濃)]]의 고쿠후(國府)와 관문을 봉쇄하게 하고는 나카나리를 체포해 우병위부(右兵衛府)에 감금해버린 뒤, 그를 좌천시키고 구스코가 가지고 있던 상시로서의 관위를 박탈하며 죄를 물을 것이라는 조를 내렸다. 또한 사카노우에노 다무라마로를 [[다이나곤|다이나곤(大納言)]]으로 승진시키고 후지와라노 후유쓰구는 식부대보(式部大輔), 기노 다카미는 [[오와리 국|오와리노카미(尾張守)]]에 임명하였다. 다음날 천황은 밀사를 헤이조쿄에 보내 후지와라노 마나쓰(藤原眞夏)·훈야노 와타마로(文室綿麻呂) 등의 몇몇 대관들을 소환했는데, 훈야노 와타마로는 상황파로 지목되어 좌위사부(左衛士府)에 갇힌다.
 
사가 천황의 움직임을 알게 된 헤이제이 상황은 격노하여 자신이 몸소 도고쿠(東國)로 가서 거병할 것을 결단하였다. [[주나곤|주나곤(中納言)]] 후지와라노 가도노마로(藤原葛野麻呂) 등의 군신이 극구 말리는 것도 듣지 않고 상황은 구스코와 함께 가마에 올라 동쪽으로 향했고, 사가 천황은 사카노우에노 다무라마로에게 상황이 동쪽으로 가지 못하게 막을 것을 명했다. 다무라마로는 출발에 임하여 일찌기 에미시(蝦夷) 정벌의 전우였던 훈야노 와타마로의 금고를 풀어줄 것을 요청했고, 와타마로는 사면받고 산기에 임명되었다. 이 날 밤 나카나리는 누군가가 쏜 화살에 맞아 살해되었다. 이는 헤이안 시대의 정권이 [[율령]]에 근거한 [[사형]]으로 처벌한 얼마 안되는 사례<ref>우와요코테 마사노리(上横手雅敬)는 9월 10일에 나카나리를 [[사도 국|사도노곤노카미(佐渡權守)]]로 좌천한다는 조를 냈을 뿐 다음 날에 시행한 사형에 관해서 조가 존재하지 않는 점, 양로율에 사형의 방법으로서 '사살(射殺)'을 언급하지 않았다는 점 등을 들어 나카나리의 사형은 율령(법률)에 근거하지 않는 사가 천황의 '린치(사적 제재)'였을 가능성을 지적하고 있다. 덧붙여 우와요코테는 천황은 본래 나카나리의 사형을 면해주기 위해 그를 좌천시킨다는 조서를 작성했지만 모종의 사정으로 이를 철회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기에 어쩔 수 없이 법에 근거하지 않은 조치를 취했다고 추정하고 있다.(上横手雅敬「『建永の法難』について」, 수록 : 上横手 編 『鎌倉時代の権力と制度』, 思文閣出版、2008年.)</ref>였으며, 이후 [[1156년]]의 [[호겐의 난]]으로 미나모토노 다메요시(源爲義)가 사형에 처해질 때까지 약 346년간 단 한 건의 사형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