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산 신씨

평산 신씨(平山 申氏)는 황해도 평산군을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시조는 고려 개국공신 신숭겸(申崇謙)이다.[1]

평산 신씨 (平山 申氏)
관향황해도 평산군
시조신숭겸 (申崇謙)
집성촌황해도 금천군
경기도 이천시
평안북도 영변군
충청남도 서천군, 예산군
전라북도 임실군
경상북도 칠곡군
경상남도 밀양시, 남해군
주요 인물신군평, 신개, 정비 신씨, 신영, 신상, 신명인, 신사임당, 신호, 신립, 신흠, 신감, 신경진, 신명규, 신임, 신완, 신만, 신유한, 신위, 신재식, 신명순, 신응조, 신헌, 신기선, 신응희, 신재영, 신석우, 신우선, 신우균, 신광희, 신돌석, 신태건, 신현구, 신태영, 신익희, 신광균, 신기석, 신현확, 신응균, 신상철, 신영균, 신구, 신낙균, 신동우, 신상진, 신의진, 신승훈, 신현준, 신대철, 신해철, 신동엽, 신하균, 신명철, 신현탁, 신세경, 신지민, 신혜정, 신아영, 신세휘, 신혜진, 더콰이엇, 신혜선
인구(2000년)496,874명 (14위)

시조편집

평산 신씨의 시조는 고려의 개국1등신신숭겸(申崇謙)이다. 신숭겸의 본래 이름은 삼능산(三能山)이며, 전라도 곡성현(谷城縣) 출신이다.[2] 태조(太祖) 왕건에게 평산에서 신(申)씨 성을 사성(賜姓)받았다. 태봉의 장군으로 있다가 배현경(裵玄慶), 홍유(洪儒), 복지겸(卜智謙) 등과 함께 궁예를 축출하고 왕건(王建)을 황제로 추대하여 고려를 개국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927년(태조 천수(天授) 10) 팔공산에서 견훤과의 전투 중 전사하였다. 이에 태조 왕건은 순절한 신숭겸에게 벽상호기위태사개국공삼중대광의경대광위이보지절저정공신(壁上虎騎衛太師開國公三重大匡毅景戴匡衛怡輔砥節底定功臣)을 추봉하였다. 시조 신숭겸의 묘소인 신장절공묘역(申壯節公墓域)은 강원도 춘천시 서면 방동리에 있고 음력 3월 3일과 9월 9일에 향사한다.

분파편집

군수공파(郡守公派), 참판공파(參判公派), 판윤공파(判尹公派), 감찰공파(監察公派), 진사공파(進士公派), 판사공파(判事公派), 이상공파(貳相公派), 전서공파(典書公派), 제정공파(齊靖公派), 온수감공파(溫水監公派), 대제학공파(大提學公派), 사간공파(思簡公派), 한성윤공파(漢城尹公派), 정언공파(正言公派), 문희공파(文僖公派), 장령공파(掌令公派), 봉상윤공파(奉常尹公派), 밀직공파(密直公派) 등 17개 분파가 있다.

인물편집

평산 신씨는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178명, 무과 급제자 90명을 배출하였다. 평산 신씨는 조선시대 정승(영의정,좌의정,우의정) 8명 ,육조판서 20여명.대제학 2명,공신 11명을 배출 하였다.

  • 신영(申瑛, 1499년(연산군 5년) ~ 1559년) : 조선 명종 때 호조판서, 한성부우윤
  • 신사임당(申師任堂, 1504년 ∼ 1551년) : 조선 중기의 여류예술가
  • 신립(申砬, 1546년 ∼ 1592년) : 조선 중기의 무신. 북변에 침입한 이탕개를 격퇴하고 두만강을 건너가 야인의 소굴을 소탕하고 개선했다. 함경북도병마절도사, 우방어사, 중추부동지사, 한성부 판윤을 지냈고 임진왜란 때 충주 탄금대에 배수진(背水陣)을 치고 왜군과 대결했으나 패했다.[3]
  • 신흠(申欽, 1566년 ~ 1628년) : 조선 중기의 문신. 동인의 배척을 받았으나 선조의 신망을 받았다. 뛰어난 문장력으로 대명외교문서의 제작, 시문의 정리, 각종 의례문서 제작에 참여하였다. 정주학자로 이름이 높아, 이정구, 장유, 이식과 함께 한문학의 태두로 일컬어진다. 1651년에 인조 묘정에 배향되었다.[4]
  • 신임(申銋, 1639년 ~ 1725년) : 조선 중기의 문신. 1657년(효종 8) 진사시에 합격, 1680년(숙종 6) 의금부도사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다가 효종릉의 사건으로 귀양간 아버지의 억울함을 격쟁(擊錚)하여 방환하게 한 뒤, 1686년 별시문과에 응시하여 병과로 급제하였다. 전적(典籍)·호조좌랑·경기도도사·정언(正言) 등을 거쳐 1696년 지평(持平)이 되었다. 이 때 서문중(徐文重)이 정승이 되자, 인현왕후 민씨(仁顯王后閔氏)가 복위될 때 희빈 장씨(禧嬪張氏)를 두둔하려 했다고 탄핵했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 경성판관으로 좌천되었다. 그 뒤 곧 병조정랑 등을 거쳐 연안부사, 수원부사, 황해감사·대사간·이조참의를 역임하고 개성유수로 임명되었으나 조정과 마찰을 빚어 파직되었다. 그 뒤 육조의 여러 벼슬과 도승지·대사헌 등을 역임하고, 1718년 지중추부사가 되면서 기로소에 들어갔으며 참찬과 공조판서를 역임하였다. 경종이 즉위한 뒤 병약하자 연잉군(延礽君)을 세제(世弟)로 책봉하고 대리청정하게 하려고 세자청정의 근거를 『세종실록』에서 초출하였다. 1722년(경종 2) 신임옥사가 일어나자 소론을 꾸짖고 동궁을 보호하는 소를 올려 제주도에 위리안치되었다. 영조 즉위 후 사면되어 돌아오는 길에 해남에서 죽었다.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경(忠景)이다.
  • 신억[ 申檍 ] 미상 ~ 미상

본관은 평산(平山). 1864년(고종 1) 좌의정 이유원(李裕元)이 조대비(趙大妃)에게, 치적이 뛰어나 수령직을 맡을 만한 인재 3인을 추천할 때 전 문천군수 신억도 함께 추천되었다.

곧 공충도관찰사에 임명되어 청주 상당산성(上黨山城)을 대대적으로 보수하였고, 부패한 향리의 숙정과 철저한 재결(災結) 조사를 통하여 선정을 하였다.

그 해 교리 강장환(姜長煥)이 영동군수의 부정을 무고한 사건이 일어나 강장환은 유배되었으나, 신억은 외신(外臣)으로서 내신(內臣)의 처벌을 논하였다고 하여 견책당하였다. 뛰어난 치적으로 좌의정 김병학(金炳學)에 의하여 임기 이후에도 연임하였다.

그 뒤 또 관아의 재정을 비축하고 군기를 보수한 공으로 가자(加資)되었다. 1866년 체임시 남연군(南延君) 묘의 제사를 주관하고 제문을 찬진(撰進)하라는 왕명을 받았다. 1873년 공조판서에 제수되었다. 시호는 효정(孝貞)이다.

  • 신재식[ 申在植 ] 1770 ~ ?

본관 평산(平山). 자 중립(仲立). 호 취미(翠微). 시호 문청(文淸). 판관(判官) 광온(光蘊)의 아들. 1805년(순조 5)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홍문관 벼슬을 거쳐 1818년 대사간이 되었다. 이어 강원도관찰사 ·이조참판을 거쳐 1826년 동지부사(冬至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831년 부제학(副提學)으로 함경도 마천령(摩天嶺) 이북에서의 전화(錢貨) 사용의 금지를 상소하여 실시되었다. 1835년(헌종 1) 대제학, 이듬해 동지사로 청나라에 다녀온 후 개성부유수(開城府留守) ·지경연사(知經筵事) ·공조판서 ·경기도관찰사 ·대사헌 ·이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문집에 《취미집(翠微集)》이 있다.

  • 신회[ 申晦 ] 1706년(숙종 32) ~ 미상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여근(汝根). 사간 신명규(申命圭)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신단(申鍴)이고, 아버지는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신사철(申思喆)이며, 어머니는 이규일(李揆一)의 딸이다.

1741년(영조 17) 진사가 되고, 1743년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 해 수찬(修撰)으로 등용되고 1746년 교리가 되었다. 1750년 승지가 되었으나, 그 해 사마시의 합격자 발표에 관한 절차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그의 주장이 공정성을 잃었다 하여 대간의 탄핵을 받아 종성에 유배되었다.

그 뒤 유배가 풀려 돌아와서 근신하던 중 1755년 병조판서에 복직되었다. 이듬해 예조판서가 되었다. 1762년 영조가 사도세자(思悼世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일 때 이에 적극 동조하였다. 그 뒤 황해도관찰사로 나갔다가 다시 이조판서로 들어왔다. 1772년 좌의정이 되고 이어서 영의정이 되었다. 그 뒤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1776년 영조가 죽고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가 즉위하자 왕의 죽음을 알리고 시호를 청하며 왕위계승을 고하는 고부 겸 청시승습사(告訃兼請諡承襲使)로 임명되었으나, 그가 일찍이 사도세자를 죽이는 일에 동조하였다 하여 정조의 노여움을 사서 파직되었다. 그 뒤 1784년(정조 8) 관작이 회복되었다.

  • 신사철 [ 申思喆 ] 1671 ~ 1759

본관은 평산(平山)이고 자는 명서(明敍)이다. 공조좌랑으로 재직하던 중인 1709년(숙종 35)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듬해에 정언이 되고 이후 노론의 후원하에 이조좌랑·교리·대사간·함경도관찰사·전라도관찰사 등을 지냈다.

1721년(경종 1) 경종 즉위 후에도 이조참의·좌참찬·도승지 등을 지냈으나, 신임사화(辛壬士禍)로 소론이 집권하자 장붕익(張鵬翼)·김재로(金在魯) 등과 함께 노론 김창집(金昌集)의 당(黨)으로 연루되어 함경도 종성(鐘城)에 유배되었다. 영조 즉위 후 노론이 집권하자 대사헌과 호조판서·예조판서 등 정권의 핵심에 기용되었다.

1727년(영조 3) 정미환국(丁未換局)으로 다시 노론이 추방되자 파직되었다가 이듬해 등용되어 강화유수(江華留守)·예조판서·형조판서 등을 지냈으며, 1745년 판중추부사로 기로소(耆老所)에 들었다. 만(晩)과 회(晦)의 두 아들이 정승직에 올라 남들의 부러움을 샀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영정이 소장되어 있다

  • 신익성[ 申翊聖 ] 1588년(선조 21) ~ 1644년(인조 22)

병자호란 때의 척화오신(斥和五臣)의 한 사람이다.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군석(君奭), 호는 낙전당(樂全堂)·동회거사(東淮居士). 우참찬 신영(申瑛)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개성도사 신승서(申承緖)이고, 아버지는 영의정 신흠(申欽)이다. 어머니는 병마절도사 이제신(李濟臣)의 딸이다. 선조의 부마(駙馬)이다. 정숙옹주(貞淑翁主)와 혼인하여 동양위(東陽尉)에 봉해졌다. 임진왜란 때는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에 올랐으며 1606년(선조 39) 오위도총부부총관(五衛都摠府副摠管)이 되었다. 광해군 때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이를 반대하다가 추방되어 쫓겨났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후 재등용되어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왕명으로 3궁(宮)을 호위(扈衛)하였다. 1627년 정묘호란 때는 세자를 모시고 전주로 피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 때는 인조를 호종하여 끝까지 성을 지켜 청군과 싸울 것을 주장하였다. 주화파(主和派) 대신들이 세자를 청나라에 볼모로 보내자고 하자 칼을 뽑아 그들을 위협하기까지 하였다. 호종의 공으로 재상과 같은 예우를 받고, 1638년에는 오위도총부도총관을 제수했으나 사퇴하였다. 화의가 성립된 뒤 삼전도비사자관(三田渡碑寫字官)에 임명되었으나 이를 거부, 사퇴하였다. 1642년 명나라와 밀무역을 하다 청나라로 잡혀간 선천부사 이계(李烓)가 조선이 명나라를 지지하고 청나라를 배척한다고 고하여, 최명길(崔鳴吉)·김상헌(金尙憲)·이경여(李敬輿) 등과 함께 심양(瀋陽)에 붙잡혀가 억류당했으나 조금도 굴하지 않았다. 소현세자(昭顯世子)의 주선으로 풀려나와 귀국한 뒤 시·서로써 세월을 보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 신점[ 申點 ] 1530 ~ ?

본관 평산. 자 성여(聖與). 1564년(명종 19) 생원시와 문과에 급제하고 예문관(藝文館)과 삼사(三司)의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으며, 경연관(經筵官)으로도 활약하였다. 의주목사 ·강원감사 ·승지 ·병조참의 ·호조참의 ·형조참판 ·형조판서 ·강릉부사 ·의금부판사 등을 역임하였다. 1592년에는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파견되었다가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병부상서 석성(石星)을 움직여 명나라 조정의 반대론을 물리치고 요동(遼東)의 군대 3,000명을 파견하게 하였으며, 귀국 후에도 전란(戰亂)의 타개에 공을 세워 선무공신(宣武功臣) 2등에 녹훈되었다.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처벌된 하정(河挺)과 정여립(鄭汝立)의 옥사(獄事)로 희생된 정언신(鄭彦信)의 무고함을 주장하여 복관시키는 등의 정치활동을 하였다. 그 밖에 여진족에 대비하여 국방을 강화하고 조운항로(漕運航路)를 개발하자는 정책들을 건의하였으며, 부모의 상을 벗은 후 담제(禫 祭) 전까지의 갓에 대한 제도가 정해지지 않았던 것을 경연에서 백포립(白布笠)으로 하자고 주장하여 그대로 결정하게 하였다. 실록에서는 재물을 탐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 신잡 [ 申磼 ] 1541년(중종 36) ~ 1609년(광해군 1)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백준(伯俊), 호는 독송(獨松). 주부(主簿) 신말평(申末平)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형조판서 신상(申鏛)이고, 아버지는 신화국(申華國)이고, 어머니는 윤회정(尹懷貞)의 딸이다. 이산해(李山海)의 문인이다. 1583년(선조 16)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정언(正言)·지평(持平)·우부승지를 거쳐 이조참판·형조참판을 지냈다. 임진왜란 때에는 비변사당상으로 활동하였고, 이듬해에는 병조참판을 거쳐 평안도병마절도사로 부임하였으나, 관내 철산군에 탈옥사건이 발생하여 그 책임으로 파직되었다. 1593년 다시 기용되어 밀양부사·형조판서를 거쳐 특진관(特進官)·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 1600년에는 호조판서를 거쳐 병조판서 겸 세자빈객이 되었다. 이어 함경도관찰사·빙고제조(氷庫提調) 등을 역임하고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책록되고 평천부원군에 봉해졌으며, 1606년 개성유수를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죽은 뒤에 진천에 사당이 세워지고 사액되었으며,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헌(忠獻)이다.

  • 신입 [ 申砬 ] 1546년(명종 1년) ~ 1592년(선조 25년)

본관은 평산(平山)이고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1546년 명종 1년에 출생하였는데 아버지는 생원을 지낸 신화국(申華國)이고 할아버지는 이조판서를 지낸 신상(申鏛)이다. 어린시절부터 글공부 보다는 무예를 좋아했다고 전해지며 1567년(선조 즉위년) 22세 때 무과에 급제하였다. 선전관을 거쳐 도총부도사(都摠府都事) ·경력(經歷)을 지내고 진주판관(晉州判官)이 되었다. 1583년 온성부사(穩城府使)가 되어 북변에 침입해온 이탕개(尼湯介)를 격퇴하고 두만강을 건너가 야인(野人)의 소굴을 소탕하고 50여 명의 목을 베고 개선하였다. 이후 이탕개가 1만명의 군사를 이끌고 또다시 경원부(慶源府)와 안원보(安原堡)를 쳐들어오자 이를 물리치며 육진(六鎭)을 방어하는데 공을 세웠다. 1584년 야인을 물리친 공로로 함경북도병마절도사에 올랐다. 1587년 흥양(興陽)에 왜구가 침입하자 우방어사(右防禦使)가 되어 군사를 인솔하여 토벌에 나섰다가 이미 왜구들이 달아나는 바람에 철수하고 돌아오던 중 양가의 처녀를 첩으로 삼았다는 삼사(三司)의 탄핵으로 파직되었다. 하지만 곧 함경남도병마절도사에 다시 등용되었으나, 졸병을 참살한 죄로 중추부동지사(中樞府同知事)의 한직으로 전임되었다. 1590년 평안도병마절도사에 보직되고 이듬해 한성부 판윤을 거쳤으며,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삼도도순변사(三道都巡邊使)로 임명되어 충주로 내려가 방어선을 구축했다. 왜적의 수가 많고 대적하기 힘든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후퇴하지 않고 충주(忠州) 탄금대(彈琴臺)에 배수진(背水陣)을 치고 북상해오는 왜군과 전투를 벌였다. 하지만 군사력의 열세로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이끄는 대군에 포위되어 패배하였고 많은 양민들이 학살되었다. 부하 장수인 김여물(金汝岉)과 함께 강물에 투신 자결하였다.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 신경진 [ 申景禛 ] 1575년 ~ 1643년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군수(君受). 서울 출신. 기묘명신(己卯名臣) 상(鏛)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생원 화국(華國)이고, 아버지는 도순변사(都巡邊使) 입(砬)이다. 경유(景裕)·경인(景禋)의 형이다. 임진왜란 때 전망인(戰亡人 : 전쟁에 참여하여 죽은 자)의 아들이라 하여 선전관으로 기용되었고, 오위도총부도사로 전보되어 무과에 급제하였다. 그 뒤 태안군수·담양부사를 거쳐 부산첨사가 되었으나 일본과의 화의에 반대하고, 왜사(倭使)의 접대를 거부하여 체임되었다.

이어 갑산부사를 거쳐 함경남도병마우후(咸鏡南道兵馬虞候)로 전보되자, 체찰사 이항복(李恒福)의 요청으로 경원부사와 벽동군수가 되었다.

광해군이 즉위하여 대북파(大北派)가 정권을 장악하자 관직에서 물러나 있던 중 1620년(광해군 12) 김류(金瑬)·이귀(李貴)·최명길(崔鳴吉)·구인후(具仁垕) 등과 모의, 그와 인척 관계에 있는 능양군(綾陽君 : 仁祖)을 추대하기로 하였다.

그 뒤 기회를 노리다가 1622년 이귀가 평산부사가 되자 그 중군(中軍)이 되기를 자원하여 거사 준비를 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사전에 누설되어 효성령별장(曉星嶺別將)으로 쫓겨나 1623년의 인조반정에는 직접 참여하지 못하였다.

반정 직후 왕의 특명으로 공조참의·병조참지에 임명되었고, 곧 병조참판이 되어 훈련도감(訓鍊都監)·호위청(扈衛廳)·포도청의 대장을 겸하여 왕실 안전의 책임을 맡았다.

반정에 따른 논공행상 때 제일 먼저 반정계획을 세웠다 하여 분충찬모입기명륜정사일등공신(奮忠贊模立紀明倫靖社一等功臣)에 녹훈되고, 평성군(平城君)에 봉해졌다.

1624년 (인조 2)이괄(李适)의 난 때는 훈련대장으로 어가(御駕)를 호위하였다. 평정 후 역도에 의하여 추대되었던 흥안군 제(興安君瑅 : 선조의 열째아들)를 처형하여 대간의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그 뒤 형조판서가 되었으며, 정묘호란 때 강화도로 왕을 호종(扈從)하여 이듬해 부원군(府院君)에 봉해졌다.

그러나 공을 믿고 탐오(貪汚)하여 남의 집터 수천칸을 빼앗아 이 때문에 언관의 탄핵을 받았다. 1635년에는 목릉(穆陵)·혜릉(惠陵)의 봉심관(奉審官)으로 보수를 소홀히 하여 파직당했다가 곧 복직되어 형조판서에 훈련대장을 겸하였다. 1636년 병조판서를 겸하도록 했으나 질병을 이유로 사양하였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수하의 군사를 인솔하여 적의 선봉부대를 차단, 왕이 남한산성으로 피난할 여유를 주었으며, 청나라와의 화의 성립 후 다시 병조판서에 임명되었다. 1637년 좌의정 최명길의 추천으로 우의정이 되어 훈련도감제조를 겸했는데, 이 때 난 후의 민심수습책을 논하고 수령의 임명에 신중을 기할 것을 개진하였다.

이듬해 사은사(謝恩使)로 청나라에 파견되었다. 돌아와 좌의정으로 승진하자 영의정 최명길과 의논하여 승려 독보(獨步)를 은밀히 명나라에 파견, 청나라에 항복하게 된 그간의 사정을 변명하도록 하였다.

1641년 다시 사은사로 청나라에 들어가 구금되어 있던 김상헌(金尙憲) 등을 옹호하였다. 1642년 청나라의 요구로 최명길이 파직되자 그 뒤를 이어 영의정에 올랐다. 그러다가 병으로 사퇴한 후 이듬해 재차 영의정에 임명되었으나 열흘도 못 되어 죽었다.

무인가문 출신의 손꼽히는 장재(將材 : 장군이 될만한 인물)로서 인조반정을 처음부터 계획, 주도하여 인조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았다. 항상 훈련도감·호위청 등의 친병(親兵)을 장악했으며 왕의 신변을 책임졌다.

상신(相臣 : 삼의정 즉, 영의정·좌의정·우의정 등을 이름.)으로 있으면서 특별히 이루어놓은 시책은 없으나, 외교 교섭에 능해 청나라의 과도한 징색(徵索)과 잦은 내정 간섭을 철회하게 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반정 후 서인이 훈서(勳西)·청서(淸西)로 분열하자 김류·이귀·김자점(金自點)·심기원(沈器遠) 등과 함께 훈서의 영수가 되었으나 무신임을 들어 조정의 시비에 간여하기를 극력 회피하였다. 또한 송시열(宋時烈) 등의 사림을 천거하고 장용(奬用 : 장려하여 등용)하여 그들의 환심을 사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공을 믿고 탐오한 면도 있어 식자층의 비난을 받았다. 무인이면서도 김류·이귀·최명길 등의 문인들과도 널리 교유했는데, 특히 김류와는 선대의 인연(瑬의 아버지 金汝岉은 申景禛의 아버지 砬의 從事官으로 충주에서 같이 전사하였다.)으로 절친한 사이였다.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1651년(효종 2) 인조 묘정에 배향되었고 송시열이 찬한 신도비문이 전한다.

  • 신사운 [ 申思運 ] 1721년(경종 1) ~ 1801년(순조 1)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형중(亨仲), 호는 낙운(樂耘). 신상(申상)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신명견(申命堅)이고,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신윤(申鈗)이며, 어머니는 박여필(朴汝弼)의 딸이다. 일곱살 때부터 글을 배워 스승의 지도를 받지 않고 문리(文理)를 깨쳤으며, 1753년(영조 29) 사마시를 거쳐 그해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에 서용되어 주서(注書)를 거쳐 전적(典籍)에 올랐다.

1760년 2월 대간으로 너무 분운하게 고집한다 하여 제주목의 정의현(旌義縣)에 유배되었다가 그해 5월에 풀려 돌아와 벼슬을 단념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대신의 천거로 서용되었다. 그 뒤 부교리·헌납(獻納)·전적·지평(持平)·장령(掌令)·사간·집의(執義) 등을 역임하고, 1776년(정조 즉위년)에는 동지 겸 사은사(冬至兼謝恩使)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청나라를 다녀왔다.

이어 대사간·승지·형조참의·호조참판·한성부판윤 등을 거쳐 1794년 형조판서에 승진하고 공조판서·대사헌·판의금부사 등을 지냈다. 1801년(순조 1) 윤행임(尹行恁)의 여당(與黨)이라는 심한 탄핵을 받아 벼슬이 삭탈되려 할 때에 죽어 화를 면하였다.

평소 기상이 엄숙하고 예절을 숭상하였으며, 부모를 섬기고 자식을 가르치는 데 스스로 사표를 보여 가정을 바로잡았으며, 남의 과실을 탓하는 일이 없었다. 문장과 글씨에 뛰어났으며, 특히 해서를 잘 썼다.

  • 신석우 [ 申錫愚 ] 1805년(순조 5) ~ 1865년(고종 2)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성여(聖如), 호는 해장(海藏). 신소(申韶)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신광손(申光遜)이고, 아버지는 교리 신재업(申在業)이고, 어머니는 좌참찬 김이탁(金履度)의 딸이다. 판서 신석희(申錫禧)의 형이다. 1828년(순조 28) 진사가 되고 1834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가주서(假注書)·예문관검열·사간원정언을 거쳐 1838년(헌종 4) 용강현령(龍岡縣令)을 지냈으며 그 뒤 부교리·병조참판·우승지·양주목사·대사성·이조참의·승지·이조참판 등을 거쳐 1855년(철종 6) 경상도관찰사를 지냈다.

1857년 대사헌이 되고 이듬해 한성부판윤을 거쳐 1859년 형조판서에 이어 예조판서가 되었다. 1860년 동지정사(冬至正使)로 청나라를 다녀왔다.

이 때 청나라에서는 영국·프랑스연합군에게 광둥(廣東)을 점령당하고 북경(北京)이 함락당한 때였으므로 귀국하여 이러한 사정을 보고하니 민심이 크게 동요하였다. 문장과 글씨에 뛰어나 1863년에는「해주기적비(海州紀蹟碑)」의 서사관(書寫官)으로 특별 가자(加資)되기도 하였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항렬표편집

  • 대동항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