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먼 킬러브루

미국의 야구 선수, 코치

하먼 클레이턴 킬러브루 주니어(Harmon Clayton Killebrew Jr., /ˈkɪlɪbr/, 1936년 6월 29일 ~ 2011년 5월 17일)은 "더 킬러"(The Killer), "해머린 하먼"(Hammerin' Harmon)이라는 별명으로 알려진 미국의 전 프로 야구 선수이자 코치로, 주 포지션은 1루수, 3루수, 좌익수였다.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MLB)에서의 22년 커리어 중 거의 대부분을 미네소타 트윈스에서 활약한 파워 히터였는데, 은퇴 당시 메이저 리그 역사상 개인 통산 5위에 해당하는 홈런 기록을 보유했었으며 이는 당시 아메리칸 리그 (AL)에서 베이브 루스에 이은 2위, 아메리칸 리그 우타자 통산 홈런 1위에 해당하는 기록이었다.[1] 1984년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하먼 킬러브루
Harmon Killebrew
미네소타 트윈스 No.3 (영구 결번)
Baseball pictogram.svg
Harmon Killebrew 1962.png

1962년의 모습.

기본 정보
국적 미국
생년월일 1936년 6월 29일(1936-06-29)
출신지 아이다호주 페이엣
사망일 2011년 5월 17일(2011-05-17)(74세)
사망지 애리조나주 스코츠데일
신장 180 cm
체중 97 kg
선수 정보
투구·타석 우투우타
수비 위치 1루수 / 3루수 / 좌익수
프로 입단 연도 1954년
첫 출장 MLB / 1954년 6월 23일
코미스키 파크
WSHCWS
마지막 경기 MLB / 1975년 9월 26일
알링턴 스타디움
KCTEX
획득 타이틀
경력
미국 야구 전당
Empty Star.svg Empty Star.svg Empty Star.svg 전당 헌액자 Empty Star.svg Empty Star.svg Empty Star.svg
선출년 1984년
득표율 83.1% (네 번째 투표)
선출방법 BBWAA 선출

선수 시절 5 피트 11 인치 (180 cm)의 키와 213 파운드 (97 kg)의 단단한 체격을 지녔다. 컴팩트한 스윙으로 파괴력 있는 모습을 보여주며, 1960년대 40홈런 이상 쳐낸 시즌을 여덟 차례나 만드는 등 당대 투수가 가장 두려움을 느끼는 강타자 중 한 명으로 이름을 알렸다. 아메리칸 리그에서 홈런 부문 6차례, 타점 부분 3차례 1위에 이름을 올렸고, 13번이나 올스타에 선정되었다. 1965년에는 미네소타 트윈스 소속으로 월드 시리즈에 출전했으나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에 패해 준우승에 만족해야 했다. 커리어 하이 시즌은 1969년으로, 이해 49홈런과 140타점을 기록하며 소속팀 트윈스의 아메리칸 리그 서부 지구 우승을 견인하는 동시에 최우수 선수상 (MVP)을 수상했다.

빠른 손놀림과 특출한 상반신의 힘을 통하여 자주, 그리고 멀리 홈런을 날리는 선수로 유명했다. 미네소타 트윈스의 홈구장인 메트로폴리탄 스타디움에서 520 ft (160 m), 볼티모어 오리올스의 홈구장인 메모리얼 스타디움에서 471 ft (144 m)의 홈런으로 두 구장에서 각각 가장 비거리가 긴 홈런을 만들어낸 선수로 기록되었으며,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의 홈구장인 타이거 스타디움좌측 외야 지붕을 넘기는 타구를 만들어 낸 네 명의 선수 중 한 명이기도 했다. 이러한 파워풀한 플레이 스타일과 이로 인해 붙여진 별명과 달리, 경기장 바깥에서 킬러브루는 조용하고 친절한 성격을 지닌 선수였다. 취미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자 "그냥 설거지만 하는 것 같아요."라고 답한 일화가 있다.[2]

현역 은퇴 후에는 1976년부터 1988년까지 몇몇 야구 팀의 텔레비전 캐스터로 일했다.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에서 타격 인스트럭터를 맡기도 했다.

어린 시절편집

하먼 킬러브루는 미국 아이다호주 페이엣에서 하먼 클레이턴 시니어와 캐서린 펄 (메이) 킬러브루의 네 자녀 중 막내로 태어나 자랐다. 화가이자 보안관으로 일했던 그의 아버지는 훗날 프로 풋볼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는 그리시 닐 감독 체제 하에서 무패 행진을 달리며 올-아메리카의 칭호를 얻었던 밀리킨 칼리지미식축구 팀의 일원이었다.[3][4] 가족에게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하먼 킬러브루의 할아버지는 북군에서 가장 힘이 셌던 사내로 모든 헤비급 레슬링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했다고 한다.[4] 아버지 클레이턴 시니어는 1953년 59세로 갑자기 세상을 뜨기 전까지 하먼과 그의 형제들에게 여러 스포츠에서 활동할 수 있도록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4]

킬러브루는 유년 시절에 아이다호주에서 성장기를 보냈던 명예의 전당 투수 월터 존슨의 이름을 딴 월터 존슨 메모리얼 필드에서 야구를 했다.[5] 또한 농장에서 일꾼으로 일하며 1갤런에 무게가 95 파운드 (43 kg)에 달하는 우유통 10갤런을 운반하는 일을 했다.[1] 고등학교 시절 다양한 스포츠에서 활동하면서 12개의 레터를 얻었고 페이엣 고등학교의 올-아메리카 쿼터백으로 이름을 올렸다. 학교에서는 나중에 그의 번호를 영구 결번 처리했다.[3][6] 또한 오리건 대학교에서 체육 특기자 장학금 제안을 받기도 했는데 이를 거절했다.[7]

1950년대 초에 아이다호주의 허먼 웰커 상원 의원워싱턴 세너터스클라크 그리피스 구단주에게 당시 세미 프로 야구 팀에서 뛰며 .847의 타율을 기록하고 있던 킬러브루에 대한 이야기를 했었다.[5][8] 그리피스 구단주는 그 이야기를 당시 팜팀 관리자를 맡고 있던 오시 블루지에 전달했고, 이에 블루지는 킬러브루의 플레이를 직접 보기 위해 아이다호주로 날아갔다.[9] 보스턴 레드삭스도 킬러브루에 대하여 관심을 나타냈지만, 최종적으로 1954년 6월 19일 블루지가 50,000 달러(오늘날 화폐 가치로 481,846달러)에 킬러브루와 계약을 성공적으로 이뤄냈다.[6][8][10]

프로 경력편집

워싱턴 세너터스편집

하먼 킬러브루는 4,000달러 이상의 금액으로 계약한 선수의 경우 반드시 메이저 리그 로스터에 2시즌 동안 포함되어야 한다는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MLB)의 보너스 룰에 따라 계약을 했다.[8] 실제로 킬러브루는 계약한 지 4일 후, 만 18세가 되기까지 6일 밖에 남지 않은 시점에 당시 메이저 리그에서 가장 어린 선수로 데뷔전을 치렀다. 시카고 화이트삭스와의 경기에서 주자가 가득 들어찬 상황에서 상대 팀 선발 투수 잭 하쉬먼에게 몸에 맞은 공으로 1루에 나가게 된 대타 클라이드 볼머의 대주자로 경기에 나섰다.[11][12] 1954년 8월 23일에는 필라델피아 애슬레틱스를 상대로 한 더블헤더의 두 번째 경기에서 처음으로 선발로 나서 2개의 단타와 한 개의 2루타를 쳐냈으며, 팀은 10–3으로 승리했다.[13] 데뷔를 한지 1년 1일이 지난 시점이자 만 19세가 되기까지 5일 밖에 남지 않았던 때인 1955년 6월 24일 경기에서는 5회말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의 선발투수 빌리 호프트를 상대로 메이저 리그 첫 홈런을 때려냈다.[14] 메이저 리그의 첫 두 시즌 동안 93타수에서 34삼진, .215의 타율과 4홈런만을 기록했으며,[8] 베테랑 3루수 에디 요스트의 백업으로 주로 경기에 나섰으나 수비에 있어서도 어려움을 겪었다.[8]

 
세너터스의 유니폼을 입고 있는 1959년의 킬러브루.

1956년에 보너스 기간이 만료되면서, 킬러브루는 세너터스 산하 마이너 리그 팀인 사우스 애틀랜틱 리그샬럿 호네츠에 잠시 내려갔다가,[15] 그해 5월 초에 메이저 리그에 다시 콜업되었다. 5월 29일 소속팀의 볼티모어 오리올스와의 경기 초반에 2루수 피트 러널즈의 부상으로 경기에 전격 투입되었는데, 이날 2개의 홈런을 터뜨리는 등 맹활약했으며 특히 두 번째 홈런 타구는 오리올스의 홈구장인 볼티모어 스타디움의 외야 가운데의 와이어 펜스를 넘겼다.[16][17] 그렇지만 이후 6월 16일까지 .115의 저조한 타율을 기록하며 마이너 리그로 다시 강등되었다. 이해 시즌 샬럿 호네츠에서 70경기에 출전해 .325의 타율과 15홈런을 기록했다.[16][18] 1957년에는 시즌 대부분을 서던 어소시에이션채터누가 룩아웃츠에서 뛰며 29홈런과 101타점을 기록했고 올스타에도 선정되었다.[18][19] 킬러브루는 채터누가 소속 당시에 홈플레이트로부터의 거리가 471 피트 (144 m)에 달하는 엥겔 스타디움의 가운데 담장을 넘기는 홈런 타구를 때린 유일한 선수였다.[20] 1958년 시즌에는 채터누가보다 한 단계 더 높은 레벨의 아메리칸 어소시에이션에 속한 인디애나폴리스 인디언스에 잠시 콜업되었으나, 신통치 못한 성적으로 다시 채터누가로 내려가 남은 시즌을 보냈다.[19] 이해 시즌 인디애나폴리스에서 38경기, 채터누가에서 86경기를 소화했다. 채터누가에서는 .308의 타율과 17홈런을 기록했다.[18] 1957년과 58년 두 시즌을 합쳐 메이저 리그에서는 22경기에 출전했다.[12]

1955년, 삼촌 클라크 그리피스 구단주의 사망으로 조카 캘빈 그리피스가 그 직을 이어 받았다. 캘빈 그리피스 구단주는 킬러브루가 세네터스의 주전이 될 준비를 다 마쳤다고 판단하여, 1958년 12월 6일 32살의 에디 요스트를 디트로이트 타이거스로 보내는 트레이드를 단행하였다. 이로써 킬러브루는 팀의 주전 3루수로 나서게 되었다.[8][21] 시즌에 들어서 5월 1일부터 5월 17일까지 다섯 번의 멀티 홈런 경기를 만들어냈으며, 특히 같은 달 12일에는 개인 통산 첫 5타점 경기를 해냈다.[8] 시즌 중반까지 28홈런을 기록하는 등의 활약으로 올스타에도 선정되어, 그해 두 번 치러진 올스타전 중 올스타전 첫 경기에서는 선발로, 두 번째 경기에서는 후보 선수로 각각 출전했다. 연고지 워싱턴 D.C.에서 부쩍 많은 인기를 얻게 된 킬러브루에게 종종 경기장에 찾아오기도 했던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당시 대통령이 그를 보러 팀을 방문하기도 했으며,[22] 한편 그리피스 구단주는 킬러브루에 대한 신시내티 레즈의 50만 달러 이적 제안을 거절했다.[22] 이해 시즌 킬러브루는 42홈런으로 록키 콜라비토와 아메리칸 리그 홈런 공동 1위에 이름을 올린 데 이어, 팀 동료 로이 시버스가 2년 전 기록했던 세너터스 타자 단일 시즌 최다 홈런 기록과도 동률을 이뤘다.[8][23] 여러모로 잠재력을 터뜨리는 데 성공한 시즌이었지만, 그 이전 시즌에도 간간히 경기에 출전했었기에 신인왕 후보 지위는 잃은 상황이었다. 대신에 신인왕은 팀 동료 밥 앨리슨에게 돌아갔다.[24]

1960년 시즌 초에는 부상이 발목을 잡았다. 3월에는 비용종으로 인하여 수술을 받았고,[25] 반복되는 햄스트링 부상으로 인해 5월에는 대부분의 경기에 출전하지 못했다.[26] 부상으로부터 복귀한 후에는 경기 선발 명단에 꾸준히 이름을 올렸고, 124경기에 출전해 31홈런을 기록하며 시즌을 마쳤다.[12][15] 잔병치레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홈런을 때려냈으나 소속팀 세너터스의 시즌 성적과는 연결되지 못했다. 이번 시즌 세너터스는 아메리칸 리그의 세컨드 디비전에 머물렀는데, 킬러브루가 워싱턴 소속으로 뛰기 시작한 이래 팀은 세컨드 디비전을 한 차례도 벗어나지 못했고, 그 중 4차례는 리그에서 꼴찌를 면치 못했다.[27] 시즌 후 소속팀 세너터스는 연고지를 미네소타로 옮겼으며 팀명은 미네소타 트윈스가 되었다.

미네소타 트윈스편집

1961–1965편집

 
1964년 7월 30일 경기에서 주자 토니 올리비아를 불러들이는 안타를 쳐내는 킬러브루.[28]

미네소타 유니폼을 입은 첫해, 킬러브루는 쿠키 라바게토 감독의 지시로 팀의 주장에 임명되었고,[29] 2년 전 자신이 세운 프랜차이즈 홈런 기록을 갱신하는 46홈런을 때려내며 감독의 믿음에 응답했다.[23] 또한 122타점으로 팀 내 타점 부문 1위에 올랐으며 타율 .288와 장타율 .606으로 개인 커리어 하이를 기록했고, 특히 장타율을 6할을 넘긴 시즌은 개인 커리어에서 이번 시즌이 유일했다. 또한 역시 개인 커리어 하이인 7개의 3루타를 터뜨리며 팀 내 3루타 부문 공동 1위를 했고, 득점, 루타수, 볼넷 부문에서도 팀 내 최다를 기록했다.[12][15] 1961년 6월 12일, 킬러브루는 자신의 커리어에서 유일한 5안타 경기를 해냈으나 팀의 패배를 막지는 못했다.[30] 1961년 두 차례 치러진 올스타전 선수 명단에도 이름을 올렸는데, 2차전에는 출전하지 않았으며 1차전에서 6회 대타 홈런을 쳐냈다.[31] 시즌 종료 후에는 이해 61홈런으로 단일 시즌 최다 홈런 기록을 세운 로저 매리스, 짐 젠틸레와 함께 홈런레이스에 참여해, 20홈런으로 우승을 차지했다.[32]

7개의 3루타를 때린 시즌 이후로, 킬러브루의 주력은 점차 줄기 시작했고 1962년 시즌에는 사두근이 당기는 문제로 인해 꾸준하게 3루타를 쳐낼 수 없게 되었다.[33] 수비 포지션도 좌익수로 변경한 이해 시즌에는 4월과 6월에는 2할 미만의 타율을 기록하며 슬로 스타터의 모습을 보였기에 올스타전에도 선발되지 않았으며, 킬러브루에게 1962년은 1972년 시즌이 되기 전까지 올스타에 이름을 올리지 못한 마지막 시즌이기도 했다.[12][34]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와의 7월 18일 경기에서 킬러브루와 밥 앨리슨은 1890년 이후로 한 이닝에서 서로 만루 홈런을 때려낸 최초의 팀메이트가 되었고, 이러한 결과로 트윈스는 1회에만 11점을 냈다.[15][35] 이해 시즌 최종 성적은 48홈런, 126타점으로 두 부문에서 자신의 커리어 하이를 경신했는데,[12] 이해 시즌에는 킬러브루 말고는 아메리칸 리그에서 40홈런 이상 기록한 선수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타점에서도 AL 1위에 이름을 올렸다.[36] 또한 단일 시즌 48홈런은 2년 연속 프랜차이즈 기록을 갈아치운 것이었다.[23] 하지만 타율은 전년도의 .288에서 .243으로 하락했으며, 자신의 단일 시즌 최다인 142삼진을 기록하며 이해 시즌 아메리칸 리그에서 가장 많이 삼진을 당한 타자이기도 했다.[12]

그동안의 호성적은 1963년에 들어서 소속팀과 약 40,000달러(오늘날 화폐 가치로 338,130달러)의 계약을 맺으며 보상받았다.[37] 한편, 시즌에 들어선 이후에는 오른쪽 무릎의 부상이 잘 낫지 않아 이해 4월 하반기와 5월 초의 많은 경기에서 결장하는 등 시작이 더뎠다.[38] 하지만 부상으로부터 복귀한 뒤에는 타격에서의 기량을 끌어올리며 팀이 6연승을 할 때도 상당 부분 기여했다.[39] 9월 21일, 보스턴 레드삭스와의 더블헤더 첫 경기에서는 자신의 커리어에서 유일한 3홈런 경기를 했다.[30][40] 이해 시즌 최종 성적은 타율 .258, 45홈런, 96타점으로 홈런과 장타율 (.555) 부문에서 아메리칸 리그 1위에 이름을 올렸다.[12] 시즌 후에는 고질적인 오른쪽 무릎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수술을 받았다.[41]

지난 3년 간 평균 이하의 송구 능력을 갖고서 좌익수를 봐왔던 문제와 더불어 무릎 수술이 추가적인 위험 변수가 되면서 킬러브루는 내야수로 포지션을 옮기게 되었다. 이후 남은 커리어 동안 외야수로 출전한 경기가 19경기에 불과했다.[12][33][42] 1964년 시즌에는 타율 .270, 49홈런, 111타점을 기록하며 3년 연속으로 아메리칸 리그 홈런 1위를 달성했다.[12]

1965년 시즌, 미네소타 트윈스는 아메리칸 리그 페넌트 우승을 이뤄냈다. 올스타 브레이크 직전인 7월 11일 경기에서, 미네소타와 맞붙은 디펜딩 챔피언 뉴욕 양키스는 9회말이 되기까지 1점 차 리드를 가져가고 있었다. 하지만 킬러브루가 끝내기 역전 투런 홈런을 쳐냈다.[43] 그로부터 이틀 후 미네소타의 홈구장인 메트로폴리탄 스타디움에서 치러진 올스타전에서, 킬러브루는 선발 출전해 최대 5–0까지 리드하고 있던 내셔널 리그를 상대로 경기를 동점으로 만드는 투런 홈런을 쳐냈다.[44] 이해 개인 통산 다섯 번째 올스타 팀에 선발되어 1루수를 맡은 킬러브루는 3루수(1959년, 1961년)와 좌익수(1963년, 1964년)로 올스타에 선정된 이력을 포함하여 세 다른 포지션에서 올스타로 선정되는 역사상 첫 번째 선수가 되었다.[45]

 
1965년의 모습.

킬러브루는 8월 2일 경기에서 부상을 당하기 전까지 그해 시즌 일곱 차례 동점 또는 결승 득점 주자를 불러들이는 활약을 펼치고 있었다.[46] 볼티모어 오리올스와의 해당 경기에서 트윈스의 3루수 리치 롤린스가 1루를 향해 던진 악송구를 처리하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던 킬러브루는 그만 주자와 부딪혀 팔꿈치가 탈구되는 부상을 입었고, 이로 인해 9월 중순까지 경기에서 빠져야 했다.[47][48][49] 킬러브루의 공백이 있던 기간 동안 소속팀 트윈스는 28승 19패를 거두었으며 계속해서 리그 1위 자리를 놓치지 않았다.[46][50] 킬러브루의 이해 시즌 부상의 여파로 25홈런 75타점의 상대적으로 저조한 성적을 기록했다.[12] 소속팀 미네소타 트윈스가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와 맞붙은 1965년 월드 시리즈에서 킬러브루는 조일로 베르사예스와 함께 .286의 시리즈 타율로 타선을 이끌었으며, 특히 4차전에서는 돈 드라이스데일을 상대로 홈런을 쳐냈다. 미네소타는 시리즈 3경기에서 완봉패를 당했고 7차전까지 가는 승부 끝에 다저스가 우승의 영광을 안았다.[51]

1966–1969편집

1966년 시즌 초 킬러브루는 홈런을 거의 때려내지 못했다. 5월 중반까지 2개의 홈런만을 쳐냈는데, 이는 예년의 동일한 시점과 비교했을 때 시즌의 첫 두 달을 거의 뛰지 못했던 1960년 이래로 최저의 기록이었다.[52] 허나 시즌이 끝난 시점에는 홈런의 개수를 39개로 크게 늘렸으며, .281의 타율과 110타점을 기록했다. 또한 103개의 볼넷으로 이 부문 아메리칸 리그 1위를 했고, 최우수 선수 (MVP) 투표에서는 볼티모어 오리올스가 아메리칸 리그 우승을 차지하는 데 공헌한 세 명의 선수, 프랭크 로빈슨, 브룩스 로빈슨, 부그 파웰에 이은 4위에 이름을 올렸다.[12][53]

1967년 6월 3일, 킬러브루는 4회에 루 버데트를 상대로 외야 2층 관중석에 떨어지는 큼지막한 홈런 타구를 날렸는데, 이는 당시 메트로폴리탄 스타디움에서 기록된 최장 거리 홈런이었다.[54] 킬러브루의 활약 속에 미네소타 트윈스는 시즌 내내 리그 우승권에 있었으며, 보스턴 레드삭스와 팀의 시즌 마지막 두 경기를 앞두고 리그 2위와 1경기 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상황이었다. 페넌트 우승을 위해서는 남은 경기 중 한 경기만 이겨도 되는 상황에서, 킬러브루는 남은 두 경기 모두 각각 2안타씩을 때려냈고 특히 첫 경기에서 홈런도 쳐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보스턴이 두 경기를 모두 승리했고, 미네소타는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와 함께 승률에서 동률을 이루며 리그 공동 2위로 내려 앉았다.[55] 이번 시즌 킬러브루는 타율 .269와 113타점을 기록했고, 44홈런으로 아메리칸 리그 트리플 크라운을 차지한 보스턴의 스타 칼 야스트렘스키와 시즌 홈런 수가 같았으며, 131볼넷으로 이 부문 아메리칸 리그 1위에 이름을 올렸다.[12] 리그 MVP 투표에서는 1위에 선정된 야스트렘스키와는 투표 점수에 격차가 있는 2위를 기록했다.[56]

1968년 4월 킬러브루는 아이다호주에서 주식을 처분하는 데 있어 자신의 이름이 부정하게 사용된 것과 관련된 재판에서 검사 측 증인으로 나섰다.[57] 이해 시즌 성적은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는데, 시즌 내내 타율을 2할을 겨우 넘는 수준이었다. 출발은 나쁘지 않았으나 5월과 6월에는 월간 타율이 1할을 맴돌았고, 올스타 브레이크 이전까지 .204의 타율과 13홈런만을 기록했다.[58][59] 그럼에도 올스타전 선발 1루수로 선정되면서 킬러브루 본인도 부진한 성적 때문에 올스타에 선정된 것에 대한 놀라움과 당황스러움을 표현했다.[60] 올스타전에서 킬러브루는 3회에 유격수 짐 프레고시의 송구를 잡기 위해 몸을 뻗다가 발이 미끄러지면서 왼쪽 햄스트링이 파열되는 부상을 입었고, 들것에 의해 실려나갔다. 이 당시 킬러브루의 부상은 선수로서의 경력을 멈추게 할 수도 있는 위협적인 종류의 것으로 여겨졌지만, 다행히도 6주 정도의 공백 기간을 거친 후 9월부터 다시 제한적으로 경기에 출전할 수 있었다.[61][62]

7개월 간의 재활 기간을 거친 뒤에도 여전히 부상의 여파가 남아 있었지만, 1969년 시즌 다시 반등하며 최고의 시즌을 만들어냈다.[44] 그해 7월 5일, 킬러브루는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와의 경기에서 개인 통산 한 경기 최다 타점인 6타점을 올렸다.[30][63] 9월 5일 경기에서는 첫 두 이닝에서 3점 홈런과 만루 홈런을 때려내며, 두 달 전 세운 타점 기록을 경신하는 동시에 애슬레틱스에게 다시 패배를 안기는 활약을 펼쳤다.[30][64] 이해 시즌 공격 부문에서의 활약은 리그 최정상급이었으며, 이에 힘입어 빌리 마틴 신인 감독의 미네소타 트윈스는 아메리칸 리그 서부 지구 초대 우승을 차지했다.[65]

1969년 시즌, 킬러브루는 타점, 득점, 볼넷, 출루율 부문에서 개인 통산 단일 시즌 최고 기록을 세웠으며, 49홈런으로 자신의 한 시즌 최다 홈런 기록과 동률을 이뤘고, 심지어 개인 커리어 통산 19개의 도루 중 8개를 이해 시즌에 만들어내며 자신의 커리어에서 유일한 최우수 선수상 수상을 향해 나아갔다.[44] 시즌 전 경기인 162경기에 출전하며 홈런과 타점 (140) 부문 메이저 리그 1위를 했으며, 출루율 (.427), 볼넷 (145), 고의 사구 (20) 부문에서는 아메리칸 리그 1위에 이름을 올렸다.[12][66] 2022년 현재, 1969년 시즌 킬러브루의 홈런, 타점, 볼넷 기록은 여전히 팀 기록으로 남아 있으며,[15] 이해 시즌 기록한 145볼넷은 이 부문 메이저 리그 역사에서 단일 시즌 20위에 해당하는 동시에 우타자만을 고려했을 때는 7위에 해당하는 기록이다.[67] 1969년 아메리칸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에 진출한 볼티모어 오리올스는 리그 최고의 투수진을 운용하며 미네소타를 상대로 3승 무패를 거두며 시리즈를 가져갔다.[61] 볼티모어는 시리즈 3경기에서 킬러브루와의 맞대결을 피하며 6개의 볼넷을 내주었는데, 이는 시리즈 내내 킬러브루를 제외한 미네소타의 선수들을 상대로 내준 볼넷의 개수와 같았다.[68]

1970–1974편집

캔자스시티 로열스편집

각주편집

  1. Goldstein, Richard (2011년 5월 17일). “Harmon Killebrew, Twins' Hall of Fame Slugger, Dies at 74”. 《The New York Times》. 2016년 2월 8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1년 5월 17일에 확인함. 
  2. Heilman, Barbara (1963년 4월 8일). “Out Of The Park On A Half Swing”. 《Sports Illustrated18 (14): 85–92. 2020년 6월 29일에 확인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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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문헌편집

외부 링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