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군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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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군(獨立軍)은 3.1 운동의 실패로 조선의 독립에 목적을 둔 만주 동부 지역에 집결해 활동한 무장 집단. 특정 정식 군대가 아니라 1930년대에서 아직 독립 운동을하고있는 사람 약 10000여명은 거의 대부분이 중국군에 있었다. 만주의 간도 지역은 깊은 숲이 많아 조선 시대부터 종종 조선족 농민들이 국경을 넘어 이주했던 곳으로 1920년경에는 50만명 정도가 집주하고 있었다. 이곳은 조선 총독부의 직접 통치가 미치지 않았기 때문에 게릴라 활동의 근거지로 안성맞춤이었다. 게다가, 1919년 3월에 발발한 한국 국내의 독립 운동에 자극된 농민과 노동자의 일부가 새롭게 궐기 한 것으로 결성되었지만, 시베리아 출병의 영향으로 무장화는 단기간에 진행되었다. 이러한 항일 무장 조직은 종종 국경을 넘어 조선 북부에서 민간인 마을들을 습격했다. 독립군이 거의 궤멸되어서 중국군에 소속되어 활동하던 1930년대에 들어서, 이러한 지역에서의 활동은 민간인이나 비무장 시설에 약탈이며, 조선 총독부와 직접 무력 충돌을 할 수있는 정도는 아니었다. 1920년 10월에 훈춘 일본 영사관을 습격하는 훈춘 사건이 벌어졌다. 이에 따라 일본은 간도 일대에 부대를 보내, 진압 작전을 실시했다. 이것을 한국에서는 청산리 전투라고 한다. 일본군의 공세에 의해 각 무장 집단은 큰 타격을받지 중 도주, 잔당은 자칭 '대한 독립 군단'에 통합,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토크에 갔는데, 대한 독립 군단은 1921년 6월 러시아 국내의 백군과 공산당 적군의 내전에 휘말려 공산당 적군 소비에트 정권에 의해 무장 해제되고 학살되었다. (자유시 참변) 이에 따라 간도 지역에서 항일 무장 투쟁은 저조해졌다. 그러나 1932년에 만주 사변이 일어나자, 중국 공산당 소속의 동북항일연군이 대두하고 중국의 반 만주국 운동과 결합되어 다시 항일 투쟁이 일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수백명 정도의 소규모 그룹에서 공산주의자와 민족주의의 싸움 등 내부 분열로 인해 차라리 농사일로 돌아가려는 사람이 속출했다. 1930년대에 '독립군' 이라고 부를 수있는 사람들은 극소수를 제외하고 중국 국민당군이나 공산당군에 있었다. 1930년대에도 여전히 내선일체 반대 활동하고있는 한반도 출신의 소수 공산주의자들이 있었는데 이들이 주도하고 다시 조직 한 것은 항일 빨치산이며, 당시 코민테른의 일국 일당 방침에 따라 실제로 중국 공산당 만주 성위원회 중국인의 지휘하에 있던 북한에서는 이를 심각할정도로 미화하고 조선 인민 혁명군으로 불린다. 나중에 그들은 한국 전쟁에서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 측에 참전하여 한국을 침략, 학살 행위를 했다. 따라서 한국 좌파 내에서는, 1930년대 이후 공산당을 활동보고 한국 침략의 죄가 있어도 항일 투쟁을 했다는 이유로 찬양되고 있지만, 한국 우파 내에서는, 한국을 분열 시키려고 한 사람들이라고 비판되고있으며, 자유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한 독립운동가들이 진정한 독립군 이라고 생각한다.

1907년해산 군인이 합류한 이후 의병의 모습.

독립군의 성립편집

독립군의 활동편집

1900~1910년대의 독립군편집

1907년 한·일 신협약 체결 이후 대한 제국의 군대가 해산되었고,이 해산 군대가 의병에 가담하면서 의병의 전투력이 비약적으로 향상되어 의병 전쟁의 양상을 띠어 가게 되었고, 차차 이 의병이 체계적인 지도 체제를 갖추고 고도로 훈련된 전투 군대의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 시기에는 남한 대토벌 작전 이후 한반도 내에서 무장 독립 운동에 대한 일본 제국의 탄압이 강한 시기였으므로 간도, 만주, 연해주 등지로 독립군의 중심지가 이동하게 된다. 이들 지역에서는 민족 운동 단체들을 중심으로 독립군들의 기지 설립이 활발히 진행되었다. 특히 국내의 민족 운동 단체이자 비밀 결사로 운영되었던 신민회의 경우, 남만주 삼원보 지역에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고 독립군들을 본격적으로 양성하기 시작했으며, 이는 1920년대 서로군정서군의 기반이 된다. 북만주 지역에서는 대종교 단체인 중광단김좌진과 함께 의병들과 대종교도들을 규합하여 북로군정서군을 조직한다. 연해주에서는 1911년 권업회가 이동휘, 이상설 등에 의해 조직되어 광복군을 양성하기 위해 비밀결사인 양도호와 해도호를 운영하고, 1914년에는 동 단체에서 이상설이동휘를 중심으로 하는 대한 광복군 정부를 임시 정부로서 설립하게 되어 통합적 독립 운동에 대한 시도도 이뤄지게 된다.

1920년대의 독립군편집

 
니콜라옙스크 일본영사관의 불탄 자리 1920년 6월

러시아 혁명 이후 연해주에서는 총기와 탄약류를 손쉽게 구할 수 있었고 이 시기의 독립군은 이로 무장하여 두만강 근교를 넘나들며 대일본제국의 보급소나 파출소 등을 습격하는 등 게릴라 활동을 전개하였으나, 청산리 전투의 패배요?독립군이 청산리 전투에서 패배 했나요로 만주 오지로 후퇴, 궤멸되었으며, 공산당 볼셰비키군에 의해서 거의 대부분이 학살되었다(자유시 참변).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