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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사영(黃嗣永, 영어: Hwang Sa Yeong 1775년 ~ 1801년 12월 10일)은 조선천주교 순교자다. 본관은 창원. 자는 덕소, 세례명은 알렉시오(Alexis)[1]이다. 정약용의 큰 형인 정약현의 사위로 천주교도가 되었다.

알렉시오라는 세례명1794년 조선에 들어온 중국인 천주교 신부 주문모에게 받았다.

목차

생애편집

1775년 서울의 아현동에서 남인 시파에 속하던 양반가문에서 태어났다. 1790년 16세의 나이에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정조는 그를 특별히 불러 격려하면서 나이 20세가 되면 탁용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같은 해 정약현의 딸 나주 정씨 난주(당시 이름은 명련, 아명)와 결혼하여 정약용의 조카사위가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이승훈과는 사돈간이 되었고, 초창기의 교회를 이끌던 인물인 정약종과는 처삼촌지간이 되었다.[2]

1791년 이승훈에게서 천주교 서적을 얻어 보았으며 정약종, 홍낙민과 함께 천주교 교리에 대한 진지한 토론을 하고, 특히 처숙인 정약종 형제들로부터 교리를 익히게 되어 〈알렉시오〉란 세례명으로 영세입교하였다.[2]

1801년 신유박해 때에는 충북 제천의 산중에 피신하여 토굴(현재의 배론 성지) 속에서 지냈다. 그는 여기에 있는 동안 주문모의 입국 후부터 신유박해에 이르기까지 교세 및 박해의 상황 등을 적어 중국 천주교 성직자 구베아 주교 에게 전할 계획이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채 황심 등과 함께 붙잡혀 모두 처형당하였다.

이 밀서를 '황사영 백서사건'라고 하며, 이 사건 이후 천주교는 반(反)국가종교로 규정되어, 정부의 박해가 한층 더 엄중해졌다.

황사영 백서사건편집

황사영 백서사건은 1801년(순조 1년)천주교 신자 황사영이 당시 베이징에 머물던 구베아 주교에게 편지를 보내려고 한 사건을 말한다. 백서란 명주천에 쓴 편지라는 뜻이다.

황사영은 신유박해의 경위와 실태, 순교자들의 약력, 청나라 천주교 선교사 주문모 신부의 처형사실, 조선 정치계의 실정, 전교하는데 필요한 방안등을 적었으며, 조선정부가 종교의 자유를 허락하도록 중국 정부에 조선을 강소성이나 사천성같은 청나라의 한 성으로 편입시키거나, 청나라의 황제가 간섭해줄 것을 요구했으며, 심지어는 서양 열강들이 군대를 보내 무력시위에 나설 것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편지는 편지를 보내는 도중 압수되었으며, 황사영은 1801년 신유박해때 처형되었다.

편지 원본은 1925년 당시 천주교 서울대교구장이었던 뮈텔 주교가 교황 비오 11세에게 기증하였다.[3]

백서의 내용편집

백서의 내용은 1785년(정조 9) 이후의 교회의 사정과 박해의 발생에 대하여 간단히 설명한 다음, 신유박해의 상세한 전개과정과 순교자들의 간단한 약전(略傳)을 적었다. 그리고 주문모 신부의 활동과 자수와 그의 죽음에 대하여 증언하였다. 청나라 황제에게 청하여 조선도 서양인 선교사를 받아들이도록 강요할 것을 요청하였고, 아니면 조선을 청나라의 한 성(省)으로 편입시켜 감독하게 하거나, 서양의 배 수백 척과 군대 5만∼6만 명을 조선에 보내어 신앙의 자유를 허용하도록 조정을 굴복하게 하는 방안 등을 제시하였다. [4]


관련 항목

각주편집

  1. 의정부 교구
  2. 김길수 교수. “황사영 백서 : 200년 전 편지의 진실”. 가톨릭신문. 
  3. 《학습만화 한국사》11권, 민중의식 성장과 저항, 계몽사, 65쪽.
  4. “[네이버 지식백과] 황사영백서 [黃嗣永帛書]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 

참고 자료편집

외부 링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