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성 전투

횡성 전투는 1951년 2월 중공군의 제4차 공세 때 횡성군에서 전개된 전투이다.

배경편집

중공군의 제3차 공세로 37도선까지 철수한 유엔군은 1951년 1월 15일부터 적을 탐색할 목적으로 서부전선에서 울프하운드 작전(Operation Wolfhound)을 감행하였다.수원∼여주 이남지역에 중공군의 소규모 부대만이 배치되어 있음을 확인한 유엔군은 1월 25일을 기해 일제히 썬더볼트 작전(Operation Thunderbolt)을 통해 반격을 시도하였다. 이 작전으로 미 제1군단과 제9군단은 2월 초까지 남한산 교두보를 제외한 한강 남안을 확보하는데 성공하였다. 중동부전선의 미 제10군단은 한강 남안에서 홍천까지의 경로를 확보하여 서울 재수복을 하기 위한 라운드업 작전(Operation Round Up)을 계획하였다.[1]

경과편집

 
1951년 3월 제1해병 군인들이 횡성에서 중공군인을 포로로 잡고 있다.

조중연합사령관 펑더화이는 서부전선의 위기를 극복하고자 병력을 가평∼홍천 일대에 집결시켜 양평횡성(삼마치고개) 일대의 유엔군 전선에 공세를 계획하였고, 첫 번째 목표는 국군 제8사단이 배치된 횡성군이었다. 중공군은 1951년 2월 11일 17시에 횡성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횡성 삼마치고개로 진출한 국군 제8사단은 중공군의 기습공격을 받고 많은 전력을 상실했다. 제8사단은 중공군의 공격 3시간 후인 2월 12일 01시경부터 후방의 중공군에게 고립되었다. 제8사단은 포위망을 탈출하기 위해 분산되거나 개별적으로 철수하였다. 사단을 지원하던 미군 지원부대도 많은 중장비를 버리고 횡성으로 철수하였다. 철수과정에서 미 제7사단 제38연대에 배속된 유엔군 네덜란드대대는 전방부대가 유일한 통로인 횡성교를 12일 야간까지 지켜줌으로써 분산된 부대들의 철수를 가능하게하였다. 이 과정에서 지휘관인 마리누스 덴 오우덴과 14명이 전사하였다.[1][2]

결과편집

잔여병력이 국군 제8사단은 장교 263명과 사병 3,000명에 불과했다. 전사하거나 실종된 인원은 장교 323명과 사병 7,142명으로 추정되었다.[3]또한 대부분의 군장비가 손실되었다. 이후 국군 제8사단은 원주 남쪽의 주천리를 거쳐 대구로 이동하여 후방의 공비토벌작전을 수행하였고, 중공군은 공세를 계속하였으나 원주 지평리에서 저지되었다.[1]

각주편집

  1. “횡성전투(橫城戰鬪)”.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20년 3월 8일에 확인함. 
  2. '2월의 전쟁영웅' 오우덴 네덜란드 육군 중령”. 매일경제. 2020년 3월 8일에 확인함. 
  3. 제10연대의 연대장과 전 참모, 제16연대의 부연대장, 7명의 대대장과 30명의 중대장이 포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