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9년 대한민국 국회부의장 보궐선거

1949년 제헌 국회 부의장 보궐선거김약수 국회부의장의 사퇴로 공석이 된 국회부의장을 선출하기 위해 1949년 7월 4일에 실시되었다.


1949년 대한민국 국회부의장 보궐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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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적 국회의원 199명 중 167명 출석
당선을 위해 단순 최다 득표 필요
투표율 83.9%
 
후보 윤치영
서울 중구
지대형
서울 성동구
정당 일민구락부 민주국민당
1차 득표수 22 50
1차 득표율 13.4% 30.5%
2차 득표수 37 57
2차 득표율 22.4% 34.5%
결선 득표수 91 72
결선 득표율 54.5% 43.1%

선거전 국회의장

김약수
동성회

국회의장 당선자

윤치영
일민구락부

선거 결과 윤치영 일민구락부 의원이 국회부의장에 선출되었다.

선거 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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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장 및 국회부의장 선거에서 당선자는 재적 의원 2/3 이상의 출석과 출석 의원 과반수의 찬성으로 결정하도록 되어있었다. 만약 1차 투표 결과 과반을 득표한 후보가 없을 시 2차 투표를 해야 했으며, 2차 투표에서도 과반을 득표한 후보가 없을 시 상위 득표자 2인에 대하여 결선 투표를 실시해 최다 득표자를 당선자로 하도록 되어 있었다.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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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6월 25일, 검찰은 국회 프락치 사건 연루 의혹을 받고 도주 중에 있던 김약수 국회부의장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하였다. 이후 김약수 부의장은 6월 30일 자신을 면회하러 온 신익희 의장에게 자신은 상황상 부의장으로서의 직무를 수행할 수 없으니 사임을 하지 않을 수 없다며, 정식으로 사임서를 작성하기 어려우므로 구두로 사의를 표하겠다고 말했다. 신익희 의장은 7월 2일 국회 본회의에서 김약수 부의장의 뜻을 전했으며, 이에 대해 거수 표결을 실시한 결과 재석 의원 124명 중 99명이 찬성하고 25명이 기권하여 김약수 부의장의 사임은 가결되었다. 따라서 공석이 된 1석의 국회부의장직에 대한 보궐선거가 치러지게 되었다.

당시 원내 제1당은 70여석을 차지하고 있던 민주국민당이었으며, 제2당은 50여석의 일민구락부, 제3당은 20여석의 대한노농당이었다.[1] 그 외에도 다수의 군소 단체들과 무소속 의원들이 존재하고 있었다.[2] 따라서 국회부의장 선거 역시 민국당과 일민구의 대결로 좁혀질 것으로 보여졌으나, 신익희 의장과 김동원 부의장이 둘 다 민국당 소속이란 점을 고려해 민국당에서 선거를 일민구 측에 양보할 가능성도 제기되었다. 이럴 경우에는 일민구 측과 동성회, 신정회, 이정회 등 소장파 단체들 간에 경쟁이 벌어질 것으로 보여졌다.[3]

선거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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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중구 지역구의 윤치영 일민구락부 의원이 당선되었다.

후보 소속 1차 투표 2차 투표 결선 투표 비고
득표 % 득표 % 득표 %
윤치영 일민구락부 22 13.4 37 22.4 91 54.5 당선
지대형 민주국민당 50 30.5 57 34.5 72 43.1
박순석 일민구락부 27 16.5 24 14.5 - -
이인 무소속 18 11.0 17 10.3 - -
오석주 신정회 19 11.6 16 9.7 - -
곽상훈 일민구락부 13 7.9 4 2.4 - -
신성균 대한노농당 8 4.9 3 1.8 - -
노일환 민주국민당 0 - 1 0.6 - -
이훈구 대한노농당 2 1.2 1 0.6 - -
임영신 일민구락부 1 0.6 1 0.6 - -
최창섭 일민구락부 0 - 1 0.6 - -
김명동 신정회 1 0.6 0 - - -
기권 3 1.8 3 1.8 4 2.4
총투표수 164 100 165 100 167 100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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