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성직제도(假聖職制度)는 초기 한국 천주교회에서 평신도들이 선교사(성직자)가 없는 상황에서 약 2년간 미사성사(성체성사고해성사)의 집전을 대신한 제도를 일컫는다.

1784년 음력 1월 이승훈은 북경에서 그라몽(Jean de Grammont, 梁棟材) 신부로부터 영세를 받고 조선 천주교의 주춧돌이 되라는 뜻에서 베드로(반석)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1784년(정조 8년) 4월 13일(음력 3월 24일) 이승훈은 성서성상·묵주 등을 가지고 한양에 돌아왔다. 이승훈은 조선에 천주교회를 세우기로 하고 북경 교회 체제를 인용해 자신이 주교가 되고 권일신·정약전·최창현(崔昌顯)·유항검(柳恒儉)·이존창(李存昌) 등 10명에게 신부직을 수행하게 해 교회를 운영해 나갔다.(1786년)[1][2]

하지만 윤유일1790년 가성직제도는 교회법에 어긋난다는 선교사들의 서신을 갖고 입국하였으므로, 조선천주교회는 중국 천주교회에 성직자를 보내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래서 한국교회 사상 처음 천주교회 사제인 주문모 신부가 입국하였다.

참고 문헌

편집

각주

편집
  1. 〈권일신〉. 《두산 엔싸이버 백과사전》. 2016년 2월 8일에 확인함. 그 뒤 권일신과 이승훈 등은 1786년부터 이른바 가성직제도(假聖職制度)라고 불리는 독자적인 성직제도를 만들어 운영하며 포교 활동을 펼쳤다. ...이승훈에게 견진성사(堅振聖事)를 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고, 권일신·최창현(崔昌顯)·유항검(柳恒儉)·이존창(李存昌) 등이 사제로서 각 지역에서 성사를 집전했다. [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2. 이덕일 (2009) 441쪽. "이승훈은 조선에 천주교회를 세우기로 하고 북경 교회 체제를 인용해 자신이 주교가 되고 권일신權日身, 정약전 등 10명에게 신부직을 수행하게 해 교회를 운영해 나갔는데, 이를 정식 신부가 맡은 체제가 아니라는 뜻의 가성직 체제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