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노 도요토시
가야 노 도요토시(賀陽豊年)는 헤이안 시대 초기에 있던 귀족·문인·한학자(漢學者)이다. 가바네(姓)는 아소미이다. 관위는 종4위하(從四位下)·하리마노 가미(播磨守), 증정4위하(贈正四位下)이다.
가야 노 도요토시(賀陽豊年) 賀陽豊年(かや の とよとし) | |
가야 노 도요토시 《전현고실(前賢故實)》에서 | |
신상정보 | |
시대 | 헤이안 시대 초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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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덴표쇼호(天平勝寶)3년 (751년) |
사망 | 고닌(弘仁)6년 6월 27일 (815년 8원 5일) |
관위 | 종4위하(從四位下)·하리마노 가미(播磨守), 증정4위하(贈正四位下) |
주군 | 간무 천황(桓武天皇)→헤이제이 천황(平城天皇)→사가 천황(嵯峨天皇) |
씨족 | 가야노 아소미(賀陽朝臣) |
출신 가문
편집가야씨(賀陽氏) (가야노 오미(賀陽臣)/가야노 아소미(賀陽朝臣))는 기비씨의 후예(後裔)요 가미쓰미치씨(上道氏)와 같은 계통인 씨족이다. 빗추국(備中國)가야노 고오리(賀陽郡)를 본거로 한 호족이다. 구니노 미야쓰코(加夜國造家)세습했었던 가문로 가야노 고오리노 쓰가사(賀陽郡司)나 기비쓰 신사(吉備津神社)의 신관(神官)도 세습한 집안이다.[1]
경력
편집경서(經書)와 사서(史書)를 정통해 대책(對策)에 갑제(甲第)로 급제하다. 이소노카미노 야카쓰구(石上宅嗣)에게 운테이(芸亭)에 초대돼 배우고 수년간에 갈쳐 많은 서책에 대하서 넓게 연구했다. 그 글재주는 석 도유(釋道融)·오미노 미후네(淡海三船)이더라도 미칠 수 없다고 일컬어졌다.[2]
몬조하카세(文章博士)를 거쳐 엔랴쿠(延曆)16년(797년)에 동궁학사(東宮學士)가 돼 황태자·아테 친왕(安殿親王)(뒤의 헤이제이 천황)에게의 교수를 맡다. (이 때 위계(位階)는 외종5위하(外從五位下)). 헤이제이 조(平城朝)에서는 중용돼 종4위하(從四位下)·식부대보(式部大輔)에까지 오른데, 천황의 총애를 믿어 후지와라노 구스코(藤原藥子)가 권세를 휘둘러서 우수한 인물이 배척받게 됐어도 편소와 달라지지 않는 모급로 경과에 내맡기며 침목을 지켰다고 하다.[2] 그 뒤에 헤이제이 천황이 양위하고 다이도(大同) 4년 12월 (810년 1월)에 헤이조쿄(平城京)로 옮았을 때에도 그를 떠르지 않고 헤이안쿄(平安京)에 남았다.[2] 다이도(大同) 5년(810년) 9월에 일어난 구스코의 변(藥子の變)에도 직접적으로는 관계하지 않았었지만 이 변 뒤에 식부대보 관직에서 물러서 있다.[2] 멀지 읺아 그 재주를 아까워한 사가 천황(嵯峨天皇)에게서의 요청으로 하리마노 가미(播磨守)로 임명됐지만 고닌(弘仁) 4년(813년)에 병 때문에 이임하고 이후 우지(宇治)에 있던 별장에서 그 나머지 삶을 지냈다.[2]
우지에서 앓아눕는 중에서 그 고장 늙은이에게서 닌토쿠 천황(仁德天皇)과 그 동생 우지노와키 이라쓰코(菟道稚郞子)가 아버지인 오진 천황(應神天皇) 사후 그들 형제가 서로 황위를 내줬다는 이야기를 들어 감동되고 좌대신(左大臣)·후지와라노 소노히토(藤原園人)에게 청해 닌토쿠 천황의 "지하지신(地下之臣: 저승에 있는 신하)"이 됐다.[2] 헤이제이 천황과 사가 천황의 대립을 이 고사에 비교해 보는 생각을 품어 있었던 것은 아닌가고 추측하는 일설이 있다.[3]
고닌(弘仁) 6년(815년) 6월 27일 졸거(卒去)했음. 향년은 65세있었다. 최종 관위는 하리마노 가미(播磨守) 종사위하(從四位下)이다. 그 존거에 즈음하여 사가 천황에게서 닌토쿠 천황릉(仁德天皇陵) 가까이서 매자되는 것을 허가된 뒤에 정4위하(正四位下)로 증위(贈位)를 받고 국화(國華: 국가의 명예)로 숭경을 받았다.[2]
《능운집(凌雲集)》에 수록된 그 한시 작품수은 오노노 미네모리(小野岑守)와 같은 13수이어[a] 사가 천황 다음으로 많다.
무덤
편집가야 노 도요토시가 임종에 가까워지려고 하는 직전의 이야기는 《일본후기》 고닌(弘仁) 6년(815년) 6월 27일 조에 기재돼 있다. 이것에 따르면 도요토시는 병 때문에 우지 별장에 있었을 때 닌토쿠 천황(仁德天皇)과 그 동생 우지노와키 이라쓰코(菟道稚郞)가 서로 황위를 내줬다는 이야기를 들어 감동됐다. 그리고 "지하지신(地下之臣)"이 되는 것을 바랐으니 칙지(勅旨)에 의하여 "능하(陵下: 능원 가)"로 매자하는 것이 허가됐다고 하다.[4]
일반적으로 "능(陵)"은 천황릉(天皇陵)을 "묘(墓)"는 황족묘(皇族墓)를 가리킴이니, 위에서 말한 "능"은 닌토쿠 천황릉으로 해석되는데[4] 한편 문맥상으로 우지노와키 이라쓰코(菟道稚郞子)의 무덤으로 해석하는 일설도 있다.[5][6] 메이지 22년(1889년)에 교토부우지시에 있는 마루야마 고분(丸山古墳)이 궁내성(宮內省: 현재의 궁내청)에 의해서 우지노와키 이라쓰코의 무덤(宇治墓)으로 치정(治定)됐을 때에는 후자 해석에 의거하여 당시 "우키후내(浮舟)의 고적(古跡)"으로 불려 있던 작은 토분이 가야노 도요토시(賀陽豊年)의 무덤으로 가탁받은 뒤에 우지묘(宇治墓) い호(號) 배총(陪冢)을 "傳 가야 노 도요토시의 무덤(傳賀陽豊年墓)"로 치정(治定)해 있다.[b][7][5][8]
인물
편집도요토시는 굳건히 신념을 품어 신의를 지키며 그는 누구에게도 굽힐 바 없었다. 또 지기이지 않는 사람들과 교제하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리고 신분이 곺음을 싫어해 있어, 어느때 친구인 오노노 나가미를 방문했을 때에는 "공(公)"라고 하는 글자를 써 "白眼對三公(백안 대 삼공: 백안으로 대신을 대한다.)"라고 하는 한시를 지었다고 하다. 게다나 사람들에게서는 그는 천작(天爵: 타고난 덕)이 남아도나 인작(人爵: 벼슬)이 부족했다고 하는 평을 받았다고 하다.[2]
관직력
편집《일본후기》에 따르면
각주
편집내용주
편집- ↑ 작자 23명·수록작품 90수 중에서 많은 차례대로 사가 천황 22수·가야노 도요토시 13수·오노노 미네모리 13수·준나 천황(淳和天皇) 5수·수가와라노 기요키미(菅原淸公) 4수)
- ↑ 그 무덤 장소: 북위 34° 53′ 51.29″ 동경 135° 48′ 23.29″ / 북위 34.8975806° 동경 135.8064694°
출처주
편집- ↑ 사에키(佐伯)[1994: p.167]
- ↑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아 《일본후기(日本後紀)》 고닌(弘仁) 6년 6원 27일 조.
- ↑ 《朝日日本歴史人物事典》
- ↑ 가 나 『日本後紀 中 全現代語訳 (講談社学術文庫1788)』 講談社, 2006년, p.372.
- ↑ 가 나 石田茂輔 「宇治墓」(「菟道稚郎子皇子」항목내)『국사 대사전(国史大辞典)』 吉川弘文館.
- ↑ 佐藤宗諄 「賀陽豊年」『일본 대백과 사전 (Nipponica)(日本大百科全書(ニッポニカ))』 小学館.
- ↑ 『궁내청 서릉부 능묘 지형도 집성(宮内庁書陵部陵墓地形図集成)』 学生社, 1999년, 권말 「역대순 능묘등 일람(歴代順陵墓等一覧)」표.
- ↑ 궁내청 서릉부 능묘과(宮内庁書陵部陵墓課) 편 『능묘 지형도 집성 축소판(陵墓地形図集成 縮小版)』 学生社, 2014년, p.4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