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테이

도서관

운테이(일본어: うんてい(芸亭); 한국 한자: 芸亭 운정)은 일본에서 처음 공개도서관으로 보이고 있는 시설.[1][2] 나라 시대 말기에 벼슬과 이름이 높던 문인있었던 이소노카미노 야카쓰구(일본어판)(石上宅嗣)에게 헤이조쿄(平城京)(현재의 나라현나라시)에 설치됐다.[1][3] 운테이인(일본어: うんていいん(芸亭院); 한국 한자: 芸亭院 운정원)라고도 하다.[3] 불전(佛典)과 유서(儒書)가 소장돼서 호학지도(好學之徒)가 자유로이 열람할 수 있었다.[1] 9세기 초두 덴초(天長)년간까지 존속돼 있었던 것으로 보이다.

개요 편집

고대의 유력 호족(豪族)이던 모노노베씨(物部氏)의 후예(後裔)인 이소노카미씨(石上氏) 집안에 태어난 야카쓰구(宅嗣)는 후지와라노 나카마로(藤原仲麻呂) 토벌등에서 활약해서 대납언(大納言)에까지 오르면서 당시를 대표하는 지식인이며 또 열심인 물교 신자였다.

만년에 그는 자기 헌 저택을 아축사(阿閦寺: 일본어: あしゅくじ; 아슈쿠지)로 개축했을 때 대지 구석에 고금의 한적(漢籍)을 준심로 한 서적을 수장해 희망자에게 열람을 허가한 것이 시작이라고 하다.[1] 그가 운테이(芸亭)를 창설한 것은 유불일체(儒佛一體) 사상에 의거하여서 불교의 묘제(妙諦)를 체득하게 함이 목적이었다고 하는 일설이 있다.[1]

열람자들 중에서도 한 귀족 청년 가야노 도요토시(賀陽豊年)가 공부에 대한 열심에는 야카쓰구도 감복돼 야카쓰구가 스스로 그 모든 지식을 도요토시에게 전수했다고 하는 이야기가 전해 있다.[a] 이 때문 운테이(芸亭)는 일종의 교육기관으로의 옆면도 갓았었던 것으로 보는 견해도 존재하다. 야카쓰구는 도요토시를 운테이에 초대해서 몇 년에 걸쳐 연구를 시켜 있다.[1]

헤이안 시대 초기에 편찬된 역사서속일본기(續日本紀)》에 있는 덴오(天應)원년(781년)6월의 야카쓰구 사망기사에 있어서 그 업적과 함께 운태이가 창설된 경위를 적은 야카쓰구의 글이 전재돼 있다.

內外兩門本爲一體. 漸極似異 善誘不殊. 僕捨家爲寺 歸心久矣. 爲助內典 加置外書. 地是伽藍 事須禁戒. 庶以同志入者 無滯空有 兼忘物我 異代來者 超出塵勞 歸於覺地矣.

〔현대어역〕

내(內: 불교)와 외(外: 유교) 그들의 뿌리는 같다. 점짐작과 급진적이라고 하는 다름은 있었어도 잘 이끌어 갈 수 있으면 (그들의 길은) 디를 바는 없다. 나가 이 집을 기진해서 절으로 해서 불교에 신앙을 깊이면서부터 오래 지다. 내전(內典: 불교의 경전)을 보다 이해하기 쉽기 위해서 외서(外書: 유교등 그 밖의 분야의 서적)도 아울러 여기에 놓을 것으로 하다. 여기는 (부교 수업을 위한) 절이니 그 수업을 바해함만 아무 갓도 필연코 금계하는 것아다. 아무쪼록 나과 같은 뜻 (불교 신앙) 을 품어 여기에 온 분들에게는 (여러 견해에 있는) 공(空)인가 유(有)인가 (고 하는 사소한 일)를 논구해 (그 초지(初志)을) 지체하게 하는 것 없어 자기 욕망을 잊어 (학문이나 수업에 힘써) 후진들에게 세속 노고 따위 초월해 해오 경지에 이르기 바라는 것이다.

이것에 따라서 야카쓰구의 불교에 대한 깊은 신앙 의식이나 운테이의 이념을 볼 수가 있으면서 이어 운테이가 현존해 있는 것을 전하는 기사가 실려 있어 《속일본기》가 완성됐던 엔랴쿠(延曆)16년(797년) 당시에는 아직 운테이가 존속되고 있었던 것이 알다.

그러나 야카쓰구의 죽음부터 3년후에 먼자 나가오카쿄(長岡京)로 그 다음에 헤이안쿄(平安京)로 천도(遷都)가 행해져 구도(舊都)가 된 헤이조쿄(平城京)는 쓸쓸해져 갔다. 또 이소노카미씨도 야카쓰구의 죽음과 함께 후지와라씨(藤原氏)등 밖의 유력 귀족에게 눌려 몰락하고 갔다. 아마도 그런 시대의 흐름과 함께 운테이도 또 황폐·소멸의 운명을 걸은 것으로 생각돼 있다. 그런데 덴초(天長)5년(828년)에 구카이(空海)가 슈게이슈치인(綜藝種智院)을 설치했을 때에 쓰인 〈슈게이슈치인시키(綜藝種智院式)〉라는 글 안에 자기의 이 학교 선구로 기비노 마키비(吉備眞備)의 "니쿄인(二敎院)"과 함께 이소노카미노 야카쓰구(石上宅嗣)의 "운테이인(芸亭院)"을 든 뒤에 운테이의 현상을 "시작이 있어 끝 없어, 사람들이 가 치워 그 터가 거칠어져 치워 있다(有始無終 人去跡穢)"라고 적어 있어 이 때에는 이미 소멸해 치워 있었던 것이 헤아려지다.

 
이치조 고교(一条高校) 대지 안 동쪽 국도 제24호선(国道24号線)에 석비가 서 있다. (나라시 홋케지초; 奈良市法華寺町)

현재의 나라시립 이치조 고등학교(奈良市立一条高等学校) 대지 안가 운테이가 있었던 터로 추정돼 있어 이 학교 안에는 석비가 서 있다.

운테이를 주제로 한 작품 편집

  • 佃一可(쓰쿠다 잇카) (2017). 《孝謙女帝の遺言 芸亭図書館秘文書》. 주손보(樹村房/수촌방). ISBN 9784883672899. [5]

각주 편집

내용주 편집

  1. 후년에 도요토시는 뛰어난 시인·학자로 이름을 남겼다.[4]

출처 편집

  1. 총합 불교 대사전 편집위원회(総合仏教大辞典編集委員会), 편집. (1988년 1월). 《총합 불교 대사전(総合仏教大辞典)》 (일본어). 호조칸(法藏館/법장관). 98쪽. 
  2. “西大寺旧境内から国内初の図書館開設者の肩書き木簡が出土” [사이다이지 舊 경내에서 국내 촛 도서관 개설자의 직함(職銜) 목간이 출토]. 《MSN 産経ニュース(MSN 산케이 뉴스)》 (일본어) (산케이 신문사(産経新聞社)). 2009년 12월 3일. 2009년 12월 6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3. (일본어)芸亭』 - Kotobank
  4. 능운집(凌雲集)》에 수록된 도요토시의 한시 작품수은 오노노 미네모리(일본어판)(小野岑守)와 같은 13수이어 사가 천황(嵯峨天皇) 다음으로 많다. (작자 23명·수록작품 90수 중에서 많은 차례대로 사가 천황 22수·가야노 도요토시 13수·오노노 미네모리 13수·준나 천황(淳和天皇) 5수·수가와라노 기요키미(일본어판)(菅原淸公) 4수)
  5. “孝謙女帝の遺言 書籍データ 樹村房” ["고켄여제(孝謙女帝)의 유언" 서적 데이터 - 주손보(樹村房)] (일본어). 樹村房. 2018년 4월 6일에 확인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