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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대외 관계

이글은 고구려의 대외 관계를 나라별로 서술한 글이다.


수나라편집

589년 수나라(隨)가 중국을 통일하였고에 따라 한반도와 만주에서는 고구려·백제의 세력이 남북으로 연결되고, 수나라와 신라는 동서로 연결되는 형세를 보이게 되었다. 이런 수나라의 문제(文帝)는 고구려를 자극하는 행동을 보였고, 고구려 영양왕(嬰陽王)은 요서(遼西)를 선제 공격하였다. 598년(영양왕 9년) 고구려와 수의 전쟁은 시작되었다. 598년 수 문제는 30만 대군을 동원하여 고구려 침공에 나섰다. 그러나 고구려군은 수나라군의 침공을 요서 지방에서 저지했고, 그에 더해 장기간에 걸친 풍우와 질병으로 수나라군은 퇴각해후 수하였다 패배는 그의 아들 수 양제(煬帝)로 하여금 설욕전을 꾀하게 하였다. 수 양제는 멀리 서역(西域)의 여러 종족과 북방의 돌궐(突闕)을 복속시킨 다음, 고구려 공격을 위한 대규모의 전쟁 준비를 갖추었다. 양제는 612년(영양왕 23) 드디어 모든 준비를 마치고 고구려 침공의 길에 올랐다. 수군의 규모는 전투병 113만에, 치중(輜重) 부대는 그 갑절이었으며, 수군(水軍)도 참전하였다.

수나라 대군의 침공을 받은 고구려는 방어 제1선인 요동성을 고수하여 수나라군의 공격을 수개월 동안 그 곳에서 저지하였다. 또한 수나라의 수군은 대동강에서 섬멸되었다. 초조해진 양제는 우문술(宇文述)과 우중문(宇仲文)으로 하여금 좌우대장으로 삼아 30만의 별동부대를 이끌고 평양성을 급히 공격케 하였다. 이때 고구려의 을지문덕은 수나라군을 평양성 가까이까지 끌어들인 다음, 그들을 포위 공격하였다. 식량 부족과 후방과의 연락 두절로 당황한 수나라군이 총퇴각을 시작하자 을지문덕은 미리 매복시켜 둔 군사로 살수(薩水)[1]에서 일대 섬멸을 전개하였는데, 이 전투를 살수 대첩이라 한다. 그 후 수 양제는 두 차례나 침입하였으나 번번이 패하였고, 이는 결국 수나라가 멸망하는 큰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당나라편집

수(隨)를 이어 중국 대륙을 통일한 (唐)은 고구려와 화친을 도모하였다. 그러나 당은 태종에 치세에 이르자 강성해졌고, 이에 따라 중국 중심의 세계를 재형성하고자 했다. 고구려는 당 태종이 압력을 가하자 그 공격에 대비하여 요하(遼河) 지방의 국경선에 천여 리의 장성(長城)을 구축하였다. 천리장성은 631년에 구축하기 시작하여 646년에 완성되었다.

642년 연개소문은 영류왕과 대신들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사실을 알아채고 정변(政變)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했다. 그는 스스로 대막리지가 되어 백제와 동맹을 맺어 신라를 압박하였다. 이에 신라는 이 사실을 당에 호소하였고, 당은 신라에 대한 공격 중지를 거듭 권고하였으나 연개소문은 이를 거절하였을 뿐 아니라 사신을 감금했다. 이에 당 태종은 644년(보장왕 3년) 12월에 20만의 병력을 이끌고 수륙 양면에서 고구려를 공격하여 왔다. 또한 이세적(李世勣)은 6만의 대군을 이끌고 요동성 방면으로, 장량(長亮)은 4만 3천여의 수군(水軍)을 거느리고 해로로 평양을 향하여 떠났다.

요동에 진입한 이세적(李世勣)의 군대는 개모성(蓋牟城)을 함락시키고, 장량(張亮)의 수군은 비사성(卑沙城)을 함락시켰다. 태종이 직접 독려하는 가운데 645년 5월에는 요동성까지 함락시킨 뒤 백암성(白巖城)을 공격했다.

백암성이 6월에 함락되자 태종은 안시성이 연개소문의 정변 때도 안시성 성주[2]가 복종하지 않아 공격을 받았으나, 항복시키지 못한 점을 들어 우회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보급로가 차단될 것을 염려한 이세적의 건의를 받아들여 안시성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고구려의 중앙정부에서는 고연수(高延壽), 고혜진(高惠眞)의 지휘 아래 말갈군을 포함하여 15만 명의 군사를 내어 안시성 구원을 위해 출동시켰으나 당군의 작전에 말려들어 고전 끝에 항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립된 안시성의 저항이 완강하자 이세적은 태종에게 성이 함락되면 남자를 모두 구덩이에 파묻겠다고 했다. 포위공격이 성과가 없자 당의 장군들은 동남쪽에 있는 오골성(烏骨城)을 먼저 치고 곧바로 평양으로 직공하자고 건의하기도 했다. 그러나 태종의 손자 무기(無忌)가 오골성을 공격할 때 후방에서 안시성의 고구려군이 역공할 가능성이 있다며 반대하자 이를 받아들여 계속 안시성을 공격했다. 하루에도 6~7차례에 걸쳐 당군의 공격이 계속되었고 포거(抛車)[3]가 날린 돌에 성벽이 무너지면 고구려군은 재빨리 목책(木柵)을 세워 방어했다.

당군은 성 동남쪽에 성과 같은 높이로 흙산을 쌓아 성을 공격하려 했다. 그러나 흙산이 거의 완성될 즈음에 갑자기 무너지면서 성벽을 무너뜨리자 고구려군은 재빨리 성벽 밖으로 나와 이를 점령하고, 나무를 쌓아 불을 지르니 당군은 접근조차 하지 못했다. 태종은 책임자 부복애의 목을 베고 싸움을 독려하여 마지막 3일간 맹렬한 공격을 퍼부었으나 끝내 실패했다. 안시성 전투에서 많은 병력을 잃은 당군은 뒤이어 쫓아온 연개소문에게 크게 패퇴하고, 태종은 결국 고구려 침공에서 얻은 병이 원인이 되어 사망하였다.

이후 이세민의 아들인 당 고종신라와 협공하여,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킬 때까지, 고구려는 8번에 걸친 당군의 원정을 막아냈다.

안시성 공격에서 대패한 당군은 추위와 굶주림을 이기지 못하여 총퇴각하고 말았다. 육로군(陸路軍)의 패보를 들은 수군도 침공을 중단하고 돌아갔다. 당 태종은 그 후에도 647년·648년·655년에 거듭 고구려 침공을 감행해 왔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 후 당은 계획을 바꾸어 신라와 맹약을 맺고, 나·당 연합군을 구성하여 668년에 고구려를 멸망케 하였다.

일본편집

전반적으로 고구려와 일본은 적대적인 관계였다.[4]광개토왕릉비문(신묘년 기사)[5]에 따르면, 광개토대왕 즉위 원년 404년, 왜인들은 백제의 요청에 따라 가야와 함께 신라를 침공하였다. 그러나 신라의 내물왕은 광개토왕에게 청원병을 요청하였고, 백제·가야·왜 연합군은 고구려와 신라 연합군에게 패배하였다.[6]407년 왜인들은 지금의 황해도 해안까지 침입하였다가 광개토왕에게 섬멸되었다. 백제의 멸망(660년)으로 다급함을 느낀 고구려는 662년 3월 일본에 사신을 파견했다. 이에 왜는 장군을 보내 옛 백제 지역의 소유성에 병력을 주둔시켰다. 이 때문에 당군은 고구려의 남쪽 경계를 침략하지 못하고 신라도 고구려 서쪽의 성루를 함락시키지 못했다. 즉, 한반도 남부에 주둔해 있던 당군과 신라군이 고구려의 남서쪽 국경을 공격하지 못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처럼 고구려의 대일본 외교는 위력을 발휘했다.[7]

문화적으로는 위치 관계로 백제만큼 밀접하지는 못하였으나 고구려 문화가 동류(東流)되었다. 담징(曇徵)·혜관(惠灌)·도징(道澄) 등의 승려들은 특히 일본의 문화 발달에 큰 기여를 하였다. 담징은 5경에 통하고 지묵(紙墨)·맷돌 제조까지 전하여 일본의 교학(敎學) 및 미술공예계에 활약하였고, 혜관은 일본 삼론종(三論宗)의 시조가 되었다. 도징도 일본에 가서 삼론(三論)을 강론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교류와 영향을 반증(反證)하는 것으로 일본에서 발견된 다카스마쓰총(高松塚)의 벽화가 이를 입증해 준다.

고구려 멸망 후에는 고구려인들이 일본으로 집단 이주하는 사례가 많았는데 이들 또한 일본의 고대 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각주편집

  1. 청천강
  2. 양만춘이라고 전해지기도 한다.
  3. 투석기
  4. 신명호 (2011). 《한국사를 읽는 12가지 코드》. 다산초당. 80쪽. ISBN 9788963706085. 어쨌든 삼국시대의 고구려에게 일본은 적이라는 이미지를 가졌다고 하겠다.  |id=에 templatestyles stripmarker가 있음(위치 1) (도움말)
  5. 신묘년 기사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광개토왕릉비#신묘년조 논란 참조.
  6. 신명호 (2011). 《한국사를 읽는 12가지 코드》. 다산초당. 79~80쪽. ISBN 9788963706085. 어쨌든 광개토대왕 비문의 신묘년 기사는 광개토대왕이 즉위하던 신묘년에 고구려 군이 왜를 공격하기 위해 한반도 남부까지 진출했음을 보여 주는 것으로써, 이 해를 기점으로 한반도의 세력판도가 고구려 중심으로 급격하게 재편되었음을 알려준다.  |id=에 templatestyles stripmarker가 있음(위치 1) (도움말)
  7. 서영교 (2009). 《신라인 이야기》. 살림. 134쪽. ISBN 9788952210739. 고구려는 일본에도 손을 내밀었다. 660년에 나당 연합군이 백제를 치자 다급함을 느낀 고구려는 일본에 사신들을 파견했다. 『일본서기』〔권27, 덴지천황 원년(662) 3월조〕에는 이와 같은 기록이 있다. “고(구)려가 우리에 구원을 요청했다. 우리는 장군을 보내 백제 지역의 소유성에 병력을 주둔시켰다. 이 때문에 당군은 고(구)려의 남쪽 경계를 침략하지 못하고 신라도 고(구)려 서쪽의 성루를 함락시키지 못했다.” 고구려의 대일본 외교는 위력을 발휘했다. 한반도 남부에 주둔해 있던 당군과 신라군이 고구려의 남서쪽 국경을 공격하지 못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id=에 templatestyles stripmarker가 있음(위치 1) (도움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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