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궐
돌궐(突厥)이라는 한자명으로 잘 알려진 괵튀르크(고대 튀르크어: 𐰜𐰇𐰛:𐱅𐰇𐰼𐰰 쾩튀뤼크), 괵튀르크 카간국(튀르키예어: Göktürk Kağanlığı 괵튀르크 카안르으[*]), 또는 튀르크 제1제국으로도 불리는 이 국가는 아시나 씨족의 수장 부민 카간과 그의 동생 이스테미 휘하 괵튀르크인들이 중앙아시아에 건설한 튀르크족 최초의 카간국이다. 중앙아시아의 아무다리야강 또는 카스피해의 북서 초원 지대에서 발흥한 돌궐은 부민 카간(중국어: 伊利可汗)과 후대 카간들의 휘하에서 중앙아시아에서부터 동쪽으로 진출하여 동북아시아 초원(현재의 몽골지역)의 유연을 멸망시켜 동북아 북방 지역을 제패하였으며 이외에도 예니세이강 상류에 있던 튀르크계 민족인 철륵을 합병시키는 등 광범위한 지역에서 세력을 떨쳤다.[11] 최종적으로 그들의 국가는 만주에서 흑해까지 이르는, 중앙아시아를 횡단한 최초의 유목 제국이 되었다.[6]:49[12]
괵튀르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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𐰜𐰇𐰛:𐱅𐰇𐰼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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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6년경 돌궐의 최대강역. | ||||
수도 | 외튀켄(동) 수야브(서) | |||
정치 | ||||
정치체제 | 군주제 | |||
카간 551년 ~ 553년 553년 ~ 575년 | 부민 카간 이스테미 카간 | |||
• 부민 카간, 유연에 대한 반란을 일으킴. | 542년 | |||
• 돌궐 제국이 성립됨. | 552년 | |||
• 제국에 내전이 일어남. | 581년 | |||
• 일시적으로 재통일됨. | 603년 | |||
• 동돌궐과 서돌궐로 분열됨. | 603년 | |||
지리 | ||||
위치 | 중앙아시아 | |||
557년 어림 면적 | 6,000,000km2[2][3] | |||
인문 | ||||
공용어 | 고대 튀르크어 (공통어, 가장 흔하게 쓰이는 언어이자 지배층 사용어)[4][5][6]:37 소그드어 (공통어, 기록어, 화폐어)[7][8] 유연어 (공통어)[9] | |||
민족 | 괵튀르크족 | |||
인구 | ||||
557년 어림 | 3백만[10] | |||
종교 | ||||
종교 | 텡그리교 |
괵튀르크인들은 그들의 후계인 돌궐 제2제국의 튀르크인들이 사용한 오르콘 튀르크어보다 직접 앞선 시베리아 튀르크어를 사용했지만, 그들의 초기 비문과 동전에는 소그드어를 사용했다.[7][8] 이들은 또한 '튀르크'라는 명칭을 사용한 최초의 튀르크계 국가이기도 했다.[13] 돌궐 문자는 6세기 전반에 발명되었다.[14][15]
돌궐은 일련의 분쟁과 내전으로 인해 603년 즈음 동돌궐과 서돌궐로 분열되었다. 이 틈을 타서 중국의 당나라는 630년에 동돌궐을, 657년에는 서돌궐마저 정복함으로써 돌궐 제국을 완전히 무너뜨렸다. 그뒤 682년에 돌궐 제2제국이 등장하여 몽골 고원을 다시 장악했지만, 그들 역시 744년에 위구르 카간국에 의해 멸망했다.
역사
편집기원
편집돌궐인이 지은 오르혼 비석에는 돌궐의 기원에 관한 이야기가 나타나지 않는다. 하지만 돌궐의 민족인 괵튀르크족과 관련하여 중국인들이 기록한 사서 가운데 『주서(周書)』,[주 1] 『북사(北史)』, 『수서(隋書)』 등에는 사료가 존재한다.
돌궐(突厥)은 대체로 흉노(匈奴)와 다른 갈래[別種]로 성(姓)은 아사나씨(阿史那氏)였다. [흉노와] 달리 부락(部落)을 이루었다. 뒤에 이웃 나라에게 패해 그 족속이 모두 없어졌다. [다만] 한 아이가 있어 나이가 열 살가량이었는데, 병사가 아이가 어린 것을 보고 차마 죽이지 못하고 바로 그의 발[과 팔]을 잘라 풀이 무성한 습지 속에 버렸다. [이에] 암 이리[牝狼] [한 마리]가 고기를 가져다 먹였고, 자라나서는 이리와 교합해 마침내 임신을 하게 되었다. 그 [이웃 나라의] 왕이 이 아이가 여전히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사자를] 보내 [아이를] 죽였다. 사자가 이리가 [그의] 곁에 있는 것을 보고 아울러 이리마저 죽이려고 했다. [그러나] 이리가 마침내 고창국(高昌國)의 [서]북쪽[에 있는] 산으로 도망했다. 그 산에는 동굴이 있었는데, 동굴 안은 평탄한 땅과 무성한 풀이 있었고 그 주위 둘레가 수 백리로 사면이 모두 산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이리가 그 속에 숨어 마침내 열 명의 사내아이를 낳았다. 열 명의 사내아이들이 자라 큰 이후에 밖에서 아내를 얻어 임신을 시켜 [아이를 낳았고], 그 후손들이 각각 한 개의 성(姓)을 갖게 되니 아사나도 바로 그중의 하나였다. 자손이 번성해 점차 수백 가에 이르렀다. 몇 세대가 지나 [무리가] 서로 더불어 동굴에서 나와 여여(茹茹)를 섬겼다. [그들은] 금산(金山)의 남쪽[陽]에 살면서 여여를 위해 대장장이[鐵工]로 부려졌다. [그들이 살던] 금산의 모습이 투구[兜鍪]와 비슷했는데, 그들의 말로 투구를 “돌궐”이라 했기 때문에 마침내 이로 인해 이름을 [돌궐로] 했다.
— 『주서(周書)』 50권 열전 42제 (자세히 보기)
돌궐(突厥)은 그 조상이 서해(西海)의 서쪽에 살았는데, 독자적인 부락(部落)을 이루었고 대체로 흉노(匈奴)의 다른 갈래(別種)였다. 성은 아사나씨(阿史那氏)였다. 나중에 이웃 나라에게 공격을 받아 패배했는데, 이웃나라가 그 족속을 거의 모두 죽였다. 다만 한 아이가 있어 나이가 겨우 열 살이었는데, 병사가 그가 어린 것을 보고 차마 죽이지 못하고 팔다리를 잘라 풀이 무성한 습지 속에 버렸다. 암 이리(牝狼) 한 마리가 고기를 가져다 먹였고, 그 아이가 자라서 이리와 교합해 마침내 임신을 하게 되었다. 이웃 나라의 왕이 이 아이가 여전히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사람을 보내 아이를 죽였다. 그는 이리가 아이의 곁에 있는 것을 보고 아울러 이리마저 죽이려고 했다. 이때 신령스런 힘(神物)이 있어 이리를 서해의 동쪽으로 보냈고, 날아온 이리가 고창국(高昌國)의 서북쪽 산에 떨어졌다. 그 산에 동굴이 있었는데, 동굴 안에는 평탄한 땅과 무성한 풀이 있었고, 주위의 둘레가 수백 리로 사면이 모두 산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이리가 그 속에 숨어 마침내 열 명의 사내아이를 낳았다. 열 명의 사내아이들이 장성해 밖에서 아내를 얻어 임신을 시켜 아이를 낳았고, 그후에 각기 한 개의 성(姓)을 갖게 되니 아사나도 바로 그 중 하나였는데 그가 가장 현명했기 때문에 마침내 군장(君長)이 되었다. 그 까닭에 돌궐인들은 그들의 깃발(牙帳)에 황금으로 된 이리 머리(狼頭纛)를 세워 그 근본을 잊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점차 부락이 수백 가(家)에 이르렀는데, 몇 세대가 지나 아현설(阿賢設)이라는 사람이 있어 부락을 이끌고 동굴 밖으로 나와 유연(蠕蠕)에 신속했다. 대엽호(大葉護)에 이르러 족속이 점차 강해졌다. 서위(西魏) 말엽에 이리가한(伊利可汗)이 있어 군대를 이끌고 철륵(鐵勒)을 공격하여 크게 패배시키고 5만 여 가(家)를 항복시켰다. 마침내 유연의 임금에게 청혼을 했는데, 유연의 임금인 아나괴(阿那瓌)는 크게 화를 내며 사신을 보내 욕했다. 이리가한은 사신을 벤 다음에 백성들을 이끌고 연연을 습격했다. 이리가한이 죽고 그의 동생 아일가한(阿逸可汗)이 즉위하여 또 유연을 격파했다. 그가 병으로 죽으려 할 때, 그의 아들 섭도(攝圖)를 제쳐두고 동생 사숙(俟叔)이 즉위하니 그를 목간가한(木杆可汗)이라고 불렀다.— 『북사(北史)』 99권 열전 87제
중국 사료에 기록된 돌궐의 신화를 보면 대개 이리를 돌궐의 시조로 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개중에서도 『북사(北史)』는 돌궐을 흉노의 별종으로 묘사한다. 한편 『주서(周書)』에서는 위의 기록 말고도 돌궐의 전설 중 하나를 달리 서술하고 있는데, 특히 이리를 시조로 한다는 것은 여타 기록들과 비슷하지만 다른 맥락에서 서술한다는 점에서 매우 주목할만한 부분이다.
다른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돌궐의 조상은 색국(索國)에서 나왔다고 하는데, [그들이 살던 곳은] 흉노의 북쪽에 있었다. 그 부락의 대인(大人)은 아방보(阿謗步)라고 불렸는데, 형제가 17명이었다. 그[중의] 한 [동생]을 이질니사도(伊質泥師都)라고 했는데, [그가] 이리[狼]의 소생이었다. [아]방보 등 [여러 형제들]의 성품이 모두 어리석어 나라가 마침내 [다른 나라에게] 망하게 되었다. [이질]니사도는 일찍부터 특이한 기운을 달리 느낄 수 있었고, 바람과 비를 부를 수 있었다. [이러한 그가] 두 명의 아내를 얻었는데, 즉, 여름 신[夏神]과 겨울 신[冬神]의 딸이었다고 한다. [그중] 한 아내가 임신을 해 네 명의 아들을 낳았다. 그 하나가 흰기러기[白鴻]로 변했고, 그 하나가 아보수(阿輔水)와 검수(劍水)의 사이에 나라를 세워 계골(契骨, 키르기즈)이라 불렀으며 그 하나가 처절수(處折水)에 나라를 세웠고, 그 하나가 천사처절시산(踐斯處折施山)에 살았는데, [그가] 바로 큰아들이었다. 산 위에는 여전히 아방보의 족류들이 살고 있었는데, [그들] 대다수가 추위에 드러나 있었다. 큰아들이 [그들을] 위해 불을 피워 따뜻하게 보살펴 모두를 [추위로부터] 구제해냈다. 마침내 [그들] 모두가 큰아들을 받들어 임금으로 삼고, [나라 이름을] 돌궐(突厥)이라고 부르니, [그 큰아들이] 바로 눌도륙설(訥都六設)이 되었다. 눌도륙[설]이 열 명의 아내를 얻어 [그 아내들이] 낳은 아들들이 모두 어머니 족속[의 성]을 따라서 [자신의] 성을 갖게 되었는데, [그중에 하나인] 아사나가 그 후처의 아들이었다. 눌도륙[설]이 죽자 10명의 어미[가 낳은] 아들들 가운데 한 명을 뽑아 [임금으로] 세우기로 하고, 바로 서로 [무리를] 이끌고 커다란 나무 아래에 모여 같이 약속하며 말하기를 나무를 향해 뛰어 올라 가장 높게 뛰는 사람을 바로 추대하자고 했다. [이에] 아사나[라는 성을 가진 후처]의 아들이 비록 나이가 어렸지만 가장 높이 뛴 사람이라 여러 아들들이 [그를] 받들어 임금으로 삼고 아현설(阿賢設)이라 불렀다. 이것은 비록 [그 내용이] 다르나 [돌궐이] 이리[狼]의 후예라는 것은 결국 같다.
— 『주서(周書)』 50권 열전 42제 (자세히 보기)
아메리칸 헤리티지 사전(American Heritage Dictionary)에 따르면 돌궐어로 튀르크(Türk)는 '강하다'라는 의미이다.[16]
북방의 패자로 떠오르다
편집돌궐이 본격적으로 역사에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부민 카간 휘하의 괵튀르크인들이 그들의 종주국이었던 유연에게 대항하는 위구르와 철륵을 선제 공격한 54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들의 반란을 진압한 부민은 당시 유연 왕 아나괴(阿那壞)에게 공주를 요구하면서 결혼 동맹을 맺을 것을 제안했으나, 아나괴는 오히려 부민에게 사신을 보내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너는 나를 위해 대장장이 일을 하던 노예(鍛奴)[주 2]에 불과한데, 어찌 감히 이따위 말을 할 수 있는가?
— 『주서(周書)』 50권 열전 42제 이역 中[27]
이를 듣고 화가 난 부민은 대신 서위(西魏)의 장락공주(長樂公主)와 결혼하여 이들과 동맹을 맺은 뒤, 552년 육진(六鎮)의 북쪽(오늘날 허베이성 장자커우)에서 아나괴와 그가 이끄는 유연 군대를 크게 무찔렀다.[28][29] 이제 몽골 초원을 완전히 장악하게 된 부민은 자신을 '나라(il)[주 3]를 세운 카간'이란 의미의 일릭 카간(Iliq Qaghan, 중국어: 伊利可汗 이리가한[*])을 칭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에 따르면 고구려 제24대 양원왕 7년(551년)에 경쟁관계인 유연과 우호적인 고구려의 신성(新城) 및 백암성(白巖城)을 직접 침공하였으나 고흘 장군이 이를 성공적으로 요격하자 물러났다. 553년에는 기록이 없어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일릭 카간이 이때 사망하고, 제2대 카간인 아이 카간(Ay Qaghan으로 추정, 중국어: 阿逸可汗 아일가한[*])이 즉위했으나 같은 해에 역시 사망했다.
사방으로의 팽창
편집돌궐 제국은 제3대 무칸 카간(Mukhan Qaghan, 중국어: 木杆可汗 목간가한[*])(재위 553~572년) 치세에 확고하게 기반이 닦여졌다. 그는 서쪽으로는 페르시아의 사산 제국과 연합하여 에프탈을 멸망시키고, 옥수스를 경계로 국경을 설정해 트란스옥시아나를 확보했으며, 동쪽으로는 거란을 꺾고, 북쪽의 키르기즈를 병합해 인접한 모든 나라를 복속시켰다. 이 때 돌궐 제국의 영역은 서쪽으로는 카스피해와 흑해, 동쪽으로는 만주와 흥안령 산맥까지 이르렀는데, 과거의 유목제국 흉노와 유연의 서쪽 영역이 파미르 고원을 넘지 못한 것과 비교하면 더욱 서쪽으로 확대된 것이었다.
한편 부민의 동생 이스테미는 '서부의 야브구(부왕)'이란 칭호를 얻어 제국의 서부 영토를 통치했다. 557년, 이스테미는 유연의 동맹이었던 에프탈인들을 다시 한번 물리치고[31] 비단길을 확고하게 장악했다. 568년, 무칸 카간의 딸인 아시나 공주와 북주의 무제가 결혼함에 따라 양측의 동맹은 더욱 강화되었다.
서양에서, 아바르족의 출현은 돌궐의 서쪽으로의 팽창을 피해 도망친 유목민들의 이주 물결 중 하나로 해석되어 왔지만, 구체적으로 그들이 어떤 민족이며, 명확한 원인과 연대가 부족하다는 점을 들어 수많은 논쟁이 있어 왔다. 르네 그루세는 아바르족을 에프탈의 몰락과 연관짓는 반면에,[32] 데니스 시노르는 아바르족을 유연에서 이어진 것이라고 보면서 그들의 정체성이 '사료마다, 책마다, 이를 뒷받침할 증거가 전혀 없는 채로 반복된다'고 말했다.[33]
이스테미의 서방 팽창 정책은 돌궐을 유럽으로 진출하도록 이끌었다.[34] 576년에 괵튀르크인들은 케르치 해협을 건너 크림 반도로 진입하였고, 5년 뒤에는 케르소네소스를 포위했으며 590년까지 크림 반도 인근의 초원 지대를 계속 돌아다녔다.[35] 이 무렵 그들의 남쪽 국경에서는 옛 동맹국이었던 사산 제국과 갈등이 빚어지고 있었다. 589년, 사산 제국은 돌궐에게 선제 공격을 가하여 그들을 물리쳤다.[36]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세기 말까지 옥수스 이남의 박트리아 지역 대부분은 돌궐 제국의 종속국으로서 계속 유지되었다.[35]
이 시기 중국 북부는 고씨의 북제와 우문씨의 북주가 다투고 있어 신흥제국 돌궐과는 서로 우호관계를 맺으려 했다. 당시 몽골계통의 선비족들은 오호 십육국 시대에 중국을 정복하고 북제와 북주를 건국했는데, 돌궐은 지속적으로 중국을 약탈하여 그들을 사실상 속국으로 만들었다. 또한 북중국의 격렬한 분열은 돌궐에게 막대한 이익을 가져다주었다. 돌궐의 제4대 카간이었던 타스파르 카간(Taspar Qaghan, 중국어: 佗鉢可汗 타발가한[*])(재위: 572~581년)은 조공을 바치는 북주와 북제를 두고
단지 짐이 남쪽에 있는 두 명의 아들들을 효순(孝順)하게만 한다면 어찌 물자가 없음을 걱정할 필요가 있겠는가?
— 『주서』 50권 열전 42제 이역전
라고 말할 정도였으니 감히 그 위세를 짐작할 수가 있다.
수·당과의 전쟁
편집수나라, 당나라 시기에 북방 초원의 강자로 등장한 세력은 돌궐이었다. 돌궐은 등장 이후 북주와 북제의 대립·상쟁을 이용하여 급속히 세력을 키워갔다. 중국지역의 오랜 전쟁을 끝내고 589년 수나라가 대륙을 통일했을 때, 당시 북방의 돌궐과 수나라가 대치하게 되었다. 몽골지역에서 유연을 멸망시킨 몽골 초원의 새로운 패권자 돌궐은 수나라와 대립관계가 된다. 수는 건국 후부터 돌궐에 대하여 강경책을 구사하였다. 수나라는 581년에 북방에 장성을 축조하여 돌궐의 침입에 대비하는 한편 돌궐의 사발략가한(沙鉢略可汗)을 무시하는 태도를 보였다.
수나라의 예우에 분노한 사발략가한은 영주자사 고보녕(高寶寧)과 통모하여 582년과 583년에 거듭 수나라를 침공하였으나 격퇴되고 말았다. 그런데 당시 돌궐 내부에서는 소가한(小可汗)들의 분열과 권력 투쟁이 전개되고 있었다. 이러한 돌궐의 내분을 이용한 수의 이간책이 주효하여 결국 583년에는 동돌궐과 서돌궐로 분열되었다. 동돌궐은 수나라를 공격하였다. 세력이 급격히 위축된 수나라는 동돌궐에 조공을 바치고 공주를 공녀로 보내게 되었다. 하지만 이후에도 돌궐에 대한 수의 이간책은 계속되어, 수는 사발략가한의 아들인 도람가한(都藍可汗)에 대항하는 계민가한(啓民可汗)을 적극 지원하였으며 결국 도람가한 세력은 자멸하고 말았으며, 599년에는 서돌궐에 쫓긴 계민가한이 수에 내항하였다. 하지만 동돌궐은 수나라를 수차례 공격하였고 수나라는 공물과 함께 597년, 599년, 614년, 617년에 총 네 차례 4명의 수나라 공주를 보냈다.[37][38]
6세기 후반, 돌궐이 동돌궐과 서돌궐로 분열되자 수나라는 서돌궐이 동돌궐을 공격하도록 부추겨 동돌궐은 약화되었다. 수나라와 돌궐의 전쟁이 멈추자 수나라는 고구려를 공격하였으나 수나라는 고구려에게 패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멸망하였다. 당나라가 건국될 당시 돌궐은 다시 세력을 회복해서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하였다. 카프간 카간의 당나라 공략은 693년 영주(靈州) 정벌로 시작되었다. 그 해 영주 지방에만 8차례의 공략을 가해 거의 폐허 상태로 만들었다. 696년경에는 거란과 당나라의 불화를 이용하여 상대적으로 열세이던 당나라의 측천무후(則天武后, 690~705)를 지원, 강력한 위세를 자랑하던 거란군을 허베이(河北) 지방에서 격퇴하였다. 그 대가로 당나라로부터 식량, 농기구, 철 등의 공급받았다. 또한 카프간은 당나라 사신으로 온 연지위 장군을 당나라의 카간으로 삼아 당나라에 대한 대대적인 공략을 시작했다. 698년 위주, 정주, 병주, 유주, 조주(趙州) 등지에 30차례 이상의 기습을 단행했고, 100,000명의 군대로 당나라군을 패퇴시켜 수많은 말과 인적, 물적 자원을 획득하였다. 톤유쿡과 빌게가 직접 지휘한 당나라 정벌로 양쯔강에서 산둥 반도에 이르는 23개 지역이 폐허가 되었다.
돌궐과 고구려의 관계는 돌궐이 유연을 정복하기 이전부터 시작되었는데, 당시 고구려는 유연의 동맹국이었기 때문에 돌궐은 자연스레 고구려와 대립 관계를 가졌으며, 돌궐이 유연을 정복한 후에는 거란과 말갈의 지배권을 놓고 고구려와 대립하였다. 이후 돌궐은 당나라를 견제하기 위해서 고구려와 동맹을 맺으려 했으며, 고구려도 이와 같은 생각을 하였기 때문에 돌궐과 고구려는 형제 맹약의 동맹 관계를 맺게 되었다. 고구려와 돌궐의 동맹 관계는 중요한 일로서 비문에 적혀 있는데 돌궐의 오르혼 비문에서는 고구려와의 형제 동맹에 대해 고구려를 "벡클리(맥구려로 추정)"라고 불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돌궐 문자
편집돌궐은 중앙아시아 유목민족 역사상 최초로 문자를 독자적으로 발명하여 그들 자체의 사료라 할 수 있는 오르혼 비문을 남겨 놓았지만 해당 비문에는 그들의 기원에 관련된 기록은 적어놓지 않았다. 문자에 대해선 최근에는 흉노에도 고유 문자인 "탐가"가 발견되었으며 중앙아시아에서 탐가라고 불리는 이 문자들과 돌궐 문자의 연관성이 연구되고 있다.
같이 보기
편집각주
편집설명주
편집- ↑ 『주서』에서는 '귀방'과 '철륵'이 있었던 위치가 언급되는데 '돌궐'이라는 단어는 아니다. 훨씬 옛날에 있었던 귀방과 철륵이 과연 돌궐과 같은 뜻인가에는 의문점이 많다. 또한 기록에서의 철륵이 돌궐과 상관없는 '키르키스'를 뜻한다고 주장하는데 그 이유는 철륵이 위치한 곳이 예니세이 강 상류의 바이칼 호수 서쪽이며, 키르기스가 있었던 위치와 일치하기 때문이다.
- ↑ 이 '단노(鍛奴)'라는 발언이 사실인지는 모르지만, 실제로 일각에서는 괵튀르크족이 실제로 유연 지배층에게 야금업으로써 종사하던 부족이었으며,[19][20][21][22] 이를 암시하는 명칭인 '단노'는 일종의 봉신 관계를 의미할 수도 있다고 한다.[23] 이를 두고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역사학자 데니스 시노르는 튀르크인들이 야금업을 전문적으로 했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들이 실제로 대장장이였는지 아니면 광부나 다른 업종을 병행했는지는 불분명하다고 말했다.[24][25] 다만 어떠한 경우든 간에 문자 그대로 이를 받아들일 필요는 없으며, 아마도 봉건제 또는 불평등한 동맹 관계 중 하나를 의미하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26]
- ↑ 튀르크어로 나라, 부족, 씨족, 국민, 국가, 국토, 연맹, 사회조직, 정치 조직을 모두 일컬어 '일(il)', 혹은 '엘(el)'이라고 했다.
인용주
편집- ↑ "The tamga of the royal clan of the first Turkish empire was a neatly drawn lineal picture of an ibex", Kljastornyj, 1980, p. 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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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Gao Yang, "The Origin of the Turks and the Turkish Khanate", X. Türk Tarih Kongresi: Ankara 22 – 26 Eylül 1986, Kongreye Sunulan Bildiriler, V. Cilt, Türk Tarih Kurumu, 1991, s. 731. (영어)
- ↑ Oğuz, Burhan (1976). 〈«Demirci köle» olmaktan kurtulup reisleri Bumin'e〉. 《Türkiye halkının kültür kökenleri: Giriş, beslenme teknikleri》. İstanbul: Matbaası. 147쪽. ISBN 9789758586226.
- ↑ Moses, Larry W. (1976). 〈Relations with the Inner Asian Barbarian〉. Perry, John Curtis; Smith, Bardwell Leith. 《Essays on Tʻang Society》. Leiden: Brill Archive. 65쪽. ISBN 978-90-04-04761-7.
'Slave' probably meant vassalage to the Juan Juan [=Rouran or Ruanruan] qaghan, whom they [the Türks] served in battle by providing iron weapons, and also marching with the qaghan's armies.
- ↑ Denis Sinor, Inner Asia: history-civilization-languages: a syllabus, Routledge, 1997, ISBN 978-0-7007-0380-7, p. 26. Contacts had already begun in 545 A.D. between the so-called "blacksmith-slave" Türk and certain of the kingdoms of north China,
- ↑ Denis Sinor, ibid, p. 101. 'Beyond A-na-kui's disdainful reference to his "blacksmith slaves" there is ample evidence to show that the Turks were indeed specializing in metallurgy, though it is difficult to establish whether they were miners or rather blacksmiths.' (영어)
- ↑ Nachaeva (2011)
- ↑ 후손 중 토문(土門) 시대에 부락이 늘고 강성하였는데 여여(茹茹)와는 관계를 끊고 태조(太祖)로 부터 서위(西魏) 장락공주(長樂公主)와 혼인을 허락받음
- ↑ Linghu Defen et al., Book of Zhou, Vol. 50. (중국어)
- ↑ Kamola 2023, 13쪽.
- ↑ Haug, Robert (2019년 6월 27일). 《The Eastern Frontier: Limits of Empire in Late Antique and Early Medieval Central Asia》 (영어). Bloomsbury Publishing. 65쪽. ISBN 978-1-78831-722-1.
The collapse of the Hephthalite domains made neighbours of the Türk Khāqānate and the Sasanian Empire, both sharing a border that ran the length of the River Oxus. Further Turkish expansion to the west and around the Caspian Sea saw them dominate the western steppes and its people and extend this frontier down to the Caucasus where they also shared a border with the Sasanians. Khusrow is noted at the time for improving the fortifications on either side of the Caspian, Bāb al-Abwāb at Derbent and the Great Wall of Gorgān.
- ↑ Kamola 2023, 13-14쪽.
- ↑ Grousset (1970, 82쪽)
- ↑ History and historiography of the Nomad Empires of Central Eurasia. D Sinor. Acta Orientalia Academiae Scientarum Hung. 58 (1) 3 – 14, 2005
- ↑ Walter Pohl, Die Awaren: ein Steppenvolk im Mitteleuropa, 567–822 n. Chr, C.H.Beck (2002), ISBN 978-3-406-48969-3, p. 26–29.
- ↑ 가 나 Grousset 81.
- ↑ Kamola 2023, 14쪽.
- ↑ Benn (2002), 2–3쪽
- ↑ Cui (2005), 655–65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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