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설봉

대한민국의 배우 (1913–2001)

고설봉(高雪峰, 1913년 4월 10일 ~ 2001년 9월 16일)은 대한민국배우이다.

고설봉
高雪峰
본명고진섭
高鎭燮
출생1913년 4월 10일(1913-04-10)
일제 강점기 조선 강원도 홍천군
사망2001년 9월 16일(2001-09-16)(88세)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직업배우
활동 기간1937년 ~ 2000년
종교불교
학력경성동명고등보통학교 졸업
배우자박이리(개명 前 이름은 박순녀)
자녀3남
(장남 고태일, 차남 고태천, 삼남 고태웅)
수상1990년 은관문화훈장

본명은 고진섭(高鎭燮)이며 설봉(雪峰)이라는 예명작가 임선규(林仙圭)가 손수 지어준 예명이다. 본관은 제주(濟州).

생애 편집

일제 강점기 조선 강원도 홍천군 서면 두마리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한때 경기도 고양군 원당면 원당리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으며 1920년 강원도 홍천 모곡보통학교에 입학하여 1926년 강원도 홍천 모곡보통학교 졸업 후 경성부 종로방으로 이사한 그는 1932년 경성동명고등보통학교(京城東明高等普通學校)를 졸업했다. 학교 졸업 후 부모의 권유로 하급 공무원 시험에 응시하여 합격, 1934년 고양군 숭인면 면사무소 서기 직책을 지냈다. 면서기 시절부터 단성사에서 진행된 연극 관람을 취미로 가졌으며, 1935년 공무원직에서 사퇴를 하고 1937년 연극배우로 첫 데뷔하였다. 1940년을 전후하여 동양극장(東洋劇場) 소속의 극단 ‘청춘좌(靑春座)’를 비롯하여, 극단 ‘아랑(阿娘)’, ‘신청년’, ‘민극(民劇)’, ‘신협’ 등을 거쳐 ‘국립극단’에 소속되었다. 1948년 영화 《노다지 창고》로 영화배우 데뷔하기도 하였으며 그로부터 7년 후 1955년 영화 《꿈》으로 두번째 영화 출연 이후에는 본격적으로 영화 활동과 연극 활동을 병행하기도 하여 강계식 등과 함께 1950년대 연극·영화 분야의 총아(寵兒)로 이름을 날렸다. 1960년대에 접어들어서는 영화보다 연극 활동에 주로 종사하고 또한 한국연극협회 이사장 등을 지내며 후진 양성에도 정열을 쏟았다.[1] 1977년 8월 21일을 기하여 강계식 등과 함께 국립극단에서 동반 정년 퇴임을 한 그는 이후 《제1공화국》, 《조선왕조 오백년》, 《제2공화국》, 《울 밑에 선 봉선화》, 《제3공화국》, 《제4공화국》 등의 텔레비전 드라마에도 출연하는 등 배우로서의 활동 영역을 넓히기도 했다.

이외 경력 편집

학력 편집

  • 강원도 홍천 모곡보통학교 졸업
  • 경성 반곡고등보통학교(京城 盤谷高等普通學校) 수료
  • 경성 동명고등보통학교(京城 東明高等普通學校) 졸업

출연작 편집

연극 편집

  • 1937년 《추월색》

영화 편집

텔레비전 드라마 편집

작품 및 평가 편집

그는 한국적 리얼리즘 연극의 연기부분에 크게 기여한 연기자로 평가된다.[1]

1940년에 《과부》로서 출발, 《성길사한(成吉思汗)》 《행복의 계시》(1943), 《삼대(三代)》(1944), 《새벽길》(1945), 《원술랑》(1950), 《목격자》(1953), 《시라노 드 베르즈라크》(1958), 《대수양》(1959), 《마을의 봉팔이》 《여당원》(1961), 《젊음의 찬가》(1962) 등 국립극단의 30여회 공연에 거의 출연하다시피 하였으며[1] 1993년에는 최다 작품 출연과 최고령 연극배우한국기네스북에도 선정되었다.

각주 편집

  1. 문화·민속/한국의 연극/한국의 신극/신극의 배우/고설봉, 《글로벌 세계 대백과》

참고 문헌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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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링크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