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카가와 기요히데

나카가와 기요히데(일본어: 中川 清秀 なかがわ きよひで[*], 덴분 11년(1542년) ~ 덴쇼 11년 음력 4월 20일(1583년 6월 10일))는 센고쿠 시대부터 아즈치모모야마 시대까지의 무장이다.

나카가와 기요히데
中川 清秀
나카가와 기요히데 화상(우메린지 소장)
나카가와 기요히데 화상(우메린지 소장)
무사 정보
시대 센고쿠 시대 ~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출생 덴분 11년(1542년)
사망 덴쇼 11년 음력 4월 20일(1583년 6월 10일)
개명 아명: 도라노스케 → 기요히데
별명 세베에(瀬兵衛)
주군 이케다 가쓰마사도모마사아라키 무라시게오다 노부나가하시바 히데요시
씨족 나카가와씨
부모 부친: 나카가와 시게키요(다카야마 시게키요), 모친: 나카가와 키요무라(시게토시)의 딸
형제자매 기요히데(清秀), 시게쓰구(重継), 시게요시(重良), 신베에(新兵衛), 여자 (후루타 시게노부 실)
자녀 히데마사(秀政), 히데시게(秀成) 등
묘소 바이린지(梅林寺, 오사카부 이바라키시)

이름 편집

생애 편집

1542년 (덴분 11년) 셋쓰국 후쿠이무라 나카가와라(지금의 오사카부 이바라키시)에서 태어났다. 처음에는 셋쓰국을 통치하던 이케다 가쓰마사를 섬기다 오다 노부나가가 교토를 장악하자 노부나가를 섬겼다. 하지만 이케다씨 사이에서 내분이 일어나 가쓰마사가 쫓겨나고 이케다 도모마사가 당주가 된 뒤, 한동안 노부나가를 적대하였다. 1572년 (겐키 3년), 함께 이케다 도모마사를 섬기던 아라키 무네시게와 손잡고 와다 고레마사토벌하였고 (시라이카와라 전투(일본어판)), 이로 인해 멸망한 이바라키씨 대신 그들의 거성 이바라키성을 차지해 성주가 된다.

셋쓰의 와다씨, 이바라키씨, 이타미씨, 이케다씨가 연달아 쇠퇴·몰락하자 아라키 무네시게, 다카야마 우콘 등과 함께 셋쓰국에서 독립 세력으로 할거하였다. 후에 노부나가가 아라키를 셋쓰국의 국주로 임명하자 나카가와도 이를 따랐다. 1578년 (덴쇼 6년) 아라키가 노부나가에 반기를 들자 (아리오카성 전투) 이에 호응하였으나, 노부나가군이 쳐들어오자 우콘과 함께 노부나가에게 투항, 그의 가신이 되어 아라키 무네시게를 공격하였다. 그 후 니와 나가히데, 이케다 쓰네오키 등의 부장을 전전했다.

1582년 (덴쇼 10년), 혼노지의 변으로 노부나가가 죽자 다카야마 우콘과 함께 하시바 히데요시를 따랐으며 야마자키 전투에서 크게 활약하였다. 1583년 (덴쇼 11년) 시즈가타케 전투에서 히데요시군의 선봉 2순위로 참전하였으나, 다카야마 우콘, 미요시 노부요시와 함께 오이와 산채를 지키던 중 시바타 가쓰이에의 부장 사쿠마 모리마사의 공격을 받아 전사했다. 향년 42세이며, 묘소는 지금의 오사카부 이바라키시 바이린지시가현 나가하마시 오이와야마 성채터에 있다.

그의 가독은 장남 히데마사가 상속했고, 차남 히데나리는 후에 분고오카번 초대 번주가 되었다. 그리고 나카가와 가문은 번주로 에도 막부 말기까지 존속했다. 또한 히데나리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에 따라 아버지 기요히데를 토벌한 사쿠마 모리마사의 딸을 얻게 되었다.

가계 편집

소설·만화 편집

참고 문헌 편집

  • 이바라키시 교육위원회, <우리 마을 이바라키 (성곽편)> (わがまち茨木(城郭編)茨木市教育委員会、), 1987년 3월.

같이 보기 편집

각주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