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문원 (1920년)
박문원(朴文遠, 1920년 1월 8일 ~ 1973년 4월 28일)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동양화가, 미술사학자, 미술평론가, 서양화가이다.
박문원
朴文遠 | |
前 북조선 국가원수 겸 국무원 수상 예하 문화예술행정특보비서관 (前 北朝鮮 國家元首 兼 國務院 首相 隸下 文化藝術行政特報秘書官) | |
임기 | 1970년 3월 26일 ~ 1971년 2월 1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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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 김일성 |
부주석 | 최용건 |
수상 | 김일성 |
전임 | 박태원 |
후임 | 조헌영 |
신상정보 | |
출생일 | 1920년 1월 8일 |
출생지 | 일제 강점기 경성부 |
사망일 | 1973년 4월 28일 | (53세)
사망지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양 |
본관 | 밀양(密陽) |
학력 | 서울대학교 철학과 |
경력 | 유화가 동양화가 미술사학자 미술평론가 서양화가 前 조선미술박물관 연구위원 前 조선로동당 문화예술정책연구위원 |
정당 | 무소속 |
부모 | 박용환(부) 남양 홍씨 부인(모) |
형제 | 누나 1명 형 2명(첫째형 박진원, 둘째형 박태원) 여동생 1명 남동생 1명 |
배우자 | 초취 리순길(1968년 사별) 계취 최학신(1969년 재혼)[1] |
자녀 | 박철호(장남), 박찬호(차남)[2] |
친인척 | 숙부 박용남(의사) 조카딸 박설영(둘째형 박태원의 셋째딸) 조카 박재영(둘째형 박태원의 둘째아들) 외종손자 봉준호(영화감독.[3]) |
생애편집
1940년 서양화가(유화가) 첫 입문한 그는 1946년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미학 전공으로 나온 후 조선미술동맹 발족, 위원장 역임. 1948년 조선문화단체연맹 조직부장. 동양화가로 화단에 데뷔하였고, 미술사학자로도 저술 분야에도 데뷔하였다. 박문원은 1950년 한국 전쟁 시기에 둘째 형 박태원(朴泰遠)과 함께 월북하였다. 그 후 1951년 조선미술 발행, 미술도서및 화첩편집 발행을 하여 미술평론가로 북조선 평단에 데뷔하였고 이듬해 1957년 《러시아 소묘교과서》를 번역 출판하였고, 동양화가, 미술사학자, 미술평론가, 서양화가로 활동하며 조선미술박물관 연구위원을 지냈다. 《조선로동당 정책사》 중 33권 부문사 《미술발전을 위한 당의정책과 그 빛나는 실현》 정책수립.
1973년 4월 28일, 심근 경색으로 인하여 향년 54세로 사망하였다. 13년 후 1986년 7월 10일, 그의 형 박태원(朴泰遠) 또한 고혈압으로 인하여 향년 78세로 사망하였다.
작품편집
유화 작품편집
- 1940 : 《소녀와 어린이》25호
- 1941 : 《꽃과 소녀》25호
- 1946 : 《쌀을 다오》,《데모》
- 1947 : 《감방》30호 (-벽화를 위한 습작-부제)
- 1954 : 《서울해방》12호, 《백두산천지》29 X 20.5 cm
- 1955 : 《김책제철소 복구》145 x 96cm,《선죽교 부근》,《압록강 상류》,《동틀무렵》10호
- 1957 : 《삶을 찾아서》
- 1959 : 《오리목장》
미술사학 저술편집
- 《신라의 금관》
- 《삼국시기 미술사 년표》
- 《조선의 명인, 담징》
- 《조선의 명인, 박한미》
미술 평론편집
- 《고구려 벽화에 나타나는 신마에 대하여》
- 《안악 3호 무덤 행렬도의 비밀을 알아내기까지》
- 《미천왕릉의 벽화》
- 《조선 고대미술사의 기초축성을 위하여》16회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