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야 도메오
사고야 도메오(일본어:
사고야 도메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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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08년 12월 1일 청나라 길림성 화룡현 |
사망 | 1972년 4월 14일 | (63세)
성별 | 남성 |
국적 | 일본 |
별칭 | 사고야 요시아키 |
본적은 나가사키현 히가시소노기군 소노기촌이지만 실제로는 청나라 길림성 화룡현(현 연변 조선족 자치주)에서 태어나 조선의 충청남도 대전에서 성장해 거기서 소학교를 졸업했다.[2] 15세에 집을 나와 후쿠오카현 오무타시에 사는 생모를 찾아갔고 이후 19세까지 요코하마와 고베 등 각지의 증기선 회사를 전전했다. 그 뒤 1년간 만주를 방랑하다 1927년 대련에서 싱가포르로 밀항, 이후 고베로 귀국했다가 도쿄로 상경해 흑룡회의 와타나베 요시히의 신세를 졌다. 1929년 와타나베가 구타당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그 보복으로 범인을 두들겨 팼다가 상해죄로 체포되어 집유 4년형을 선고받았다. 1930년 7월 애국사에 입당, 동년 11월 총리 암살미수사건을 일으킨다.[2]
1930년 11월 14일 오전 8시 58분, 도쿄역 역내에서 츠바메 특급열차를 탑승하려고 이동하던 하마구치 오사치 총리를 근거리에서 총격, 중상을 입혔다.[3] 그 직후 주변 수행원들에게 붙잡혀 현행범 체포되었다. 하마구치는 목숨은 건졌지만 상처가 악화되어 이듬해 사망했다. 하지만 하마구치가 특이한 세균의 보유자였기 때문에 사인은 세균감염으로 인한 궤양으로 판단되어 사고야는 살인미수로 기소되었다.[2] 하지만 1933년 살인죄가 적용되어 사형을 선고받았고,[4] 1934년 사면되어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어 1940년 가출소하였다.[1]
출소 후 애국사 사장 이와타 아이노스케의 사위가 되어 우익활동을 계속했고, 전후 미군정의 추방령 대상이 되었다. 1954년 혈맹단 사건 중심인물 이노우에 닛쇼와 함께 보국단이라는 우익단체를 결성해 향후 단장이 된다.[1] 1959년에는 코다마 요시오와 전일본애국자단체회의(약칭 전애회의)를 결성해 초대 의장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