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금광(일본어: 佐渡金山 사도 킨잔[*])은 일본 니가타현 사도시사도가섬에 위치한 금광이다. 광석은 주로 '은흑'(銀黑)이라고 불리는 석영 중에 맥상에 존재하던 휘은광 및 자연 자연금의 미립자였다. 1601년에 금맥이 발견된 이래 에도 시대 기간 동안 중요한 재원으로써 개발되었다. 에도 시대 초기의 전성기에는 이 1년 동안 약 400kg, 은이 약 40 이상 채굴된 일본 최대의 금광산으로, 은 생산에서도 일본 유수의 광산이어서 은 화폐의 제작을 위한 재료를 공급하는 중요한 광산 구실을 했었다. 그 중 아이카와 광산은 에도 막부가 직할 경영하여, 대량의 금은을 산출한 사도 금광의 중심이었다. 산출하여 제련한 철심과 회취은은 막부에 상납되어, 이를 긴자에 맡겨 화폐를 주조하였다. 또한 은은 특히 생실 등의 수입 대가로써 청나라 등에 대량 수출되어, 사도 산출의 회취은은 세다 은으로도 불렸다. 현재는 광산이 고갈되고, 금의 가치와 노동자 임금이 균형을 이루지 못하여 수지가 맞지 않아 채굴이 중지되어, 금광은 관광지로 활용되고 있다. 갱도의 총 연장은 약 400km에 이르지만, 그 중 관광 노선으로 개발된 구간은 300m 정도이다. 이 밖에, 매년 7월 25일 ~ 7월 27일 사이에 금광 축제가 열린다.

금광 입구
사도 금광의 심볼 '도유노 와레토'(道遊の割戸)


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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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란:일제강점기때 사도광산에 한국인들 강제노역하였다

2022년 2월 1일에 일본 정부는 유네스코 문화유산 사무국에 사도 광산을 세계유산으로 등재해달라고 추천서를 보냈으나 온전한 역사를 보여주지 않고 시기를 에도 막부 시대로만 한정해 놓은 관계로 보류 중이다. 일본이 2015년 7월에 군함도를 세계유산으로 등재시켰을 때 국제 사회에 피해자들에 대한 시설도 설립될 것이라 약속 했지만 2021년 7월에 유네스코에서 현장 조사를 한 결과 피해자들을 기억할 수 있는 시설이 갖추어지지 않은 것이 확인된 사례도 있었기 때문에 더더욱 사도 광산을 세계유산으로 지정하는데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https://news.kbs.co.kr/news/view.do?ncd=5384208&ref=A

사도광산 강제동원 조선인 747명 명단 확인…이제 절반 찾았다.

‘747명 그리고 772명’. 이름이라도 ‘찾은 자’와 이름조차 모른 채 ‘남겨진 자’의 숫자다. 모두 1519명의 ‘사람’들은 1939년 2월부터 1945년 7월까지 충남, 충북, 전남, 전북, 강원, 경기 등의 고향을 떠나 ‘강제’로 배를 타야만 했다. 목적지는 이름조차 낯선 일본 니가타현의 작은 섬. 일본에서는 헤이안 시대 말부터 사금 산지로 명성을 떨쳤던 곳. 당시도 지금도 사람들은 이곳을 ‘사도’라고 불렀다.

섬에 도착한 사람들이 향한 곳은 광산이었다. 전범기업 미쓰비시광업(주)의 작업장이 그곳에 있었다. 낯선 곳으로 끌려온 이들은 익숙지도 않은 광부일을 해야 했다. 갱을 파고 금 등의 광석을 채굴하는 일이었다. 많은 이들이 죽었다. 진폐증이 대표적 사유다. 채굴 과정에서 ‘폭파’라는 일본말을 알아듣지 못해 사망하는 때도 비일비재했다. 운이 좋아 섬에서 탈출했거나 해방 이후 살아 돌아와도 탄광 생활의 흔적은 악착같이 따라붙었다. 후유증으로 가족들 앞에서 피를 토하며 죽어갔다. 광산 강제동원은 끝끝내 이들의 삶을 파괴했다. 사도는 결코 아름답거나 추억할 만한 공간이 될 수 없는 곳이었다.

https://www.khan.co.kr/politics/politics-general/article/202403010700001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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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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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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