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토론:Xakyntos/2012년

마지막 의견: 11년 전 (Xakyntos님) - 주제: 좋은 글

광개토태왕 관련

반갑습니다. 위키백과 상에서 오랜만에 뵙는군요. 각설하고 본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1. 정설과 통설

님께서는 정설을 언급하셨습니다. 국어사전에서 정설은 일정한 결론에 도달하여 이미 확정하거나 인정한 설이라고 정의하는군요. 이 정의에 따르면 광개토태왕에 대한 정설이란, 광개토태왕의 생애와 업적에 관련하여 확정된 설이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광개토태왕과 관련된 무수히 많은 설 중에 어느 설을 '확정된 설'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100%의 사학자들이 인정하여 확정된 설은 기껏해야 광개토태왕이 18세에 왕위에 올랐고 고국양왕의 아들이며, 고국원왕의 손자로 고국원왕과 같은 곳(국원, 국강상)에 묻혔고 장수왕이란 아들을 낳았고 땅을 많이 넓혀 광개토라는 호를 받은 것에 불과할 것입니다. 따라서 님께서 광개토태왕과 관련한 정설을 운운하신다면, '정설'의 정의와 함께 위와 같은 사실을 일컬으셔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님께서 '통설'이라는 단어를 쓰셨다면 나는 다르게 반응했을 것입니다. 국어사전에서 통설은 세상에 널리 알려지거나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는 설이라고 정의합니다. 이 정의에 따르면 광개토태왕과 관련한 통설은 님께서 고수하고자 하는 여러 설들이 해당됩니다. 그러므로 님께서는 통설을 운운하셔야 맞습니다.

2. 통설의 기준

위키백과는 기본적으로 백과사전이며, 백과사전은 한 연구자의 연구보다 다수가 지지하는 '통설'을 실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러나 통설의 기준을 어디에 둬야 하는지 의문입니다.

어제(2.16)부터 오늘(2.17)까지 한국고대사학회 주최로 광개토왕 학술 대회가 열립니다. 나는 어제 학술회에 참석했고 오늘도 참석할 예정입니다. 이 학술대회에는 내로라 하는 학자들이 대부분 참석합니다. 사학계에서 이름만 대도 다 알만한 학자들이죠. 노태돈, 여호규, 조법종, 공석구, 이도학, 임기환 등 그야말로 쟁쟁하고 이른바 '통설'에 가까운 학설을 내시는 분들이 학술회에 참석하셨습니다. 그런데 재밌는 사실은 이 분들의 주장이 다 다르다는 것입니다. 같은 서울대 출신인 노태돈, 여호규의 의견이 서로 다릅니다. 이도학과 공석구의 의견도 서로 다릅니다. 사람은 각자 다르니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입니다. 통설에 가까운 학설을 주장하는 학자들도 서로 입장이 다른데, 여기서는 무슨 내용을 실어야 할까요?

만약 서울대 교수들의 학설을 실어야 한다면 왜 그래야 할까요. 서울대가 랭킹 1위의 대학이라서? 분명 서울대가 대한민국의 어떤 대학보다 시스템이 뛰어나지만 뛰어난 시스템이 곧 연구의 질을 좌우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3. 통설의 합리성

마지막으로 통설은 그야말로 합리적인지 여쭙고 싶습니다. 다수의 의견이라고 무조건 타당한 것이라고 봐야 할까요. 다수결이 무조건 옳은 의견을 내지는 않습니다. 위키백과가 중립성을 지향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중립성 지향으로 위키백과가 많은 비판을 받은 것 또한 사실입니다. '위키백과' 항목에도 '신뢰할 만한 전문적인 시각보다 다수 의견이나 총의에 따른 시각을 선호한다는 비판도 있다'는 말도 있군요. 그러므로 통설만이 능사인지 궁금합니다.

아울러 이런 비판을 주시는 분들부터가 통설에 능통하신지도 여쭙고 싶습니다. 님께서 어제 오늘 열리는 광개토왕 학술대회 참가 학자들의 명단을 보시면 이 학술회에서 다뤄지는 내용이 님이 원하시는 통설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이 학술대회의 취지 중의 하나는 2012년이 광개토왕이 훙거한 지 1600년이 지난 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학술회에서는 광개토태왕의 사망 시기를 412년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광개토태왕의 출생 연도는 374년이며 즉위 연도는 391년입니다. 나는 통설에 능통하지 못해 자꾸 소수 의견만 말하기 때문에, 위키백과에서 삼국사기 기준으로 광개토태왕의 출생, 사망, 즉위 연도가 돼 있는 걸 진작부터 바꾸길 원했고, 실제로 바꿨다가 통설을 좋아하시는 님을 비롯한 여러 분들에 의해 되돌리기를 당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보니 통설에서조차 412년을 광개토왕의 사망 시기로 못박더군요. 자료집 표지에서부터 현수막에 이르기까지 말입니다. 그런데 님은 이 사실을 아셨나요? 만약에 그러지 못했다면 정설이나 통설 운운하실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이상입니다. --고구려인 (토론) 2012년 2월 17일 (금) 00:39 (KST)답변

1. 제가 정설과 통설을 특별히 구별하여 사용하지 않은 점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점과 김용만 개인의 주장을 통설에 대한 반박으로 서술하여 비중립적인 편집을 한 귀하의 행동은 무관합니다.
2. 저는 김용만의 견해가 틀렸다거나, 김용만의 견해에 대해 통설이 무조건 옳다고 말한 바가 없습니다. 저는 김용만의 주장에 대해 어떠한 견해도 표출하지 않았으며, 단지 소위 통설로 통하는 견해, 일반적으로 교과서나 백과사전, 국편위에서 펴낸 한국사 수준을 벗어나는 주장은 예외적인 주장으로서 서술되어야 한다는 점을 피력하였을 뿐입니다. 이는 해당 주장을 한 사람이 서울대 교수이거나 노태돈 교수이거나 혹은 국편위원장이거나 하는 점과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국편위원장의 주장과 소위 통설이 배치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한 일입니다. 그리고 그에 대해서 특정 학자의 주장이 소수설, 혹은 대립되는 학설로서 언급되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3. 그러나 귀하의 편집은 이미 말했다시피 완벽하게 김용만 일방의 주장에만 편향되도록 서술되어 있습니다. 이는 위키백과의 지침에 명백하게 어긋나는 것이며, 지침은 둘째치고서라도 위키가 아닌 일반적인 백과사전이라도 역시 같은 평가를 했을 것입니다. 김용만의 주장이 맞건 틀리건, 얼마나 합리적인지는 관계 없습니다. 김용만의 주장이 누구도 반박할 수 없을만큼 완벽하고 합리적이라면, 학계에서는 해당 주장을 통설의 위치로 올려 놓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현재는 아닙니다. 그리고 지금 사견을 표하자면, 김용만의 주장은 전혀 합리적이지 않은 것도 분명 존재합니다. 대표적으로 거란 정벌의 연도를 391년으로 수정한 점을 들 수 있겠지요. 물론 제가 김용만의 주장 전체를 확인해 본 것은 아니니 그 수정의 근거를 알지 못하지만, 적어도 제가 아는 한도 안에서 391년으로 수정할 근거는 없는 것 같습니다. 여하튼,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김용만의 주장은 일개 학자의 주장일 뿐입니다. 위키백과는 통설이 모두 옳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통설에 대항하는 이러한 주장도 있다는 식으로 중립적인 편집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지침을 설정하고 있습니다. 이 점을 명심해 주십시오.
4. 저는 이미 앞선 토론을 통해서 광개토왕릉비의 기년이 당연히 통설이자 정설이라고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기년만으로는 《삼국사기》의 연대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고도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학계의 통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광개토왕이 사망한 연대는 분명 412년입니다.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로 광개토왕과 장수왕의 기년은 413년의 기록이 심지어 중국의 조공 기록을 통해서까지 교차 검증됩니다. 이 때문에 불행히도 광개토왕의 사망 연대와 별개로 광개토왕과 장수왕의 기년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 난제로 남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물음표를 붙이는 것이고, 이는 역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다른 백과사전을 통해서도 확인됩니다. 재위 년도에 대해서 광개토왕릉비와 《삼국사기》 양쪽 모두를 언급하고 있지요. 이 점을 명백히 인식한다면, 물음표와 같은 형식이 문제가 아니라, 양쪽 모두의 정보가 분명하게 언급되어야 한다는 것이 중점이라는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금번의 편집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불행히도, 금번의 편집 역시 되돌려 수정할 수 밖에 없겠습니다.
이상입니다.--Xakyntos (토론) 2012년 2월 17일 (금) 01:24 (KST)답변
며칠 동안 바빠서 이제야 답글을 답니다.
1. 제 편집이 김용만 연구에 편향되어 있었다는 것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 전에 김용만의 연구에 대해 공부해 보시길 바랍니다. 김용만의 광개토태왕 저서는 작년(2011년) 7월에 나왔습니다. 통설이 되기에는 아직 시간이 많이 흐른 것이 아닙니다. 합리적이지 않다 생각되시면 직접 그 책을 보시기 바랍니다. "광개토태왕의 위대한 길" 첫 장에 삼국사기와 광개토태왕비문의 연대 차이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가 자세히 다루어져 있습니다. 단순히 비문에 맞춰서 1년 앞당기고 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님이 아는 한도 내에서 거란 침공 연도를 391년으로 당겨놓을 근거가 없는 것은, 김용만은 학자이고 님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학자로서 보통 사람이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걸 연구한다면 그게 학자이겠습니까?
2. 국편위의 '한국사'가 편찬된 지 20년이 다 되어 갑니다. 한국사 시리즈가 연대 순대로 나왔기 때문에 고구려 관련 부분은 근대사보다 나온 지가 훨씬 더 오래되었습니다. 국편위의 한국사도 여러 학자들의 종합물이라기 보다 특정 저자가 특정 부분을 썼습니다. 이것도 일개 학자의 주장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단순히 국편위에서 나왔다고 해서 그것이 '예외적인 주장'을 가르는 기준이 될 수는 없습니다. 나온 지 20년이 다 된 낡은 가죽부대로는 새 포도주를 담을 수 없습니다. 소수설이라도 합당한 근거가 있으면 적극적으로 반영되어야 합니다. 물론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제 편집이 다소 편향되어 있었다는 점은 인정합니다.
3. 광개토태왕과 장수태왕의 기년 문제에 대해서. 412년은 광개토태왕의 붕어 연대와 장수태왕의 즉위 연도로 '확정'할 수 있습니다. 413년 장수태왕이 장사 고익을 동진에 보낸 것이 '송서'에서 교차 검증됩니다. 그런데 송서에서는 동진 안제 의희 9년(413년)에 고구려왕 고련(高璉)이 장사 고익을 사신으로 보냈다고 기록하지, 그 기록이 장수태왕 원년의 기록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 기록이 장수태왕 원년 기록이라고 말하는 것은 삼국사기입니다. '통설'에서는 삼국시대엔 즉위년칭원법이, 고려시대 이후론 유년칭원법이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삼국사기와 광개토태왕비문의 연대 차이는 칭원법에서 비롯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원자료가 가리키는 연대와 다르게 김부식은 그것을 유년칭원법 하에서 이해하여 기록했기 때문에 연대 차이가 나게 된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412년을 광개토태왕의 붕어 연도이자 장수태왕의 즉위 연도로 봐도 문제가 없습니다.
3.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의 칭원법 차이로 인해 삼국사기에서 392년을 광개토왕 원년이라고 보고, 광개토왕 원년에 백제의 10성 점령과 거란 침공과 관미성 점령의 연대는 수정될 필요가 있습니다. 분명히 광개토태왕의 즉위 연도는 391년이고, 당시에는 이를 원년이라고 했습니다(왜냐하면 비문의 패려 정벌 기사에서 "영락 5년은 을미년으로.." 운운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을미년은 395년이며, 따라서 영락 원년은 391년이 됩니다). 그렇다면 백제의 10성 점령과 관미성 점령 연대도 391년으로 수정되어야 하는 걸까요? 하지만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도 이 일이 392년이라고 돼 있습니다. 백제본기도 틀렸다고 본다면, 다른 기록을 찾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일본서기에서 이 일을 392년의 일이라고 기록합니다(물론 일본서기는 기록된 연대보다 120년 후대의 일로 보는 것이 상식입니다). 일본서기는 비록 황당한 내용이 많지만 백제 당대의 기록이 전해져 내려옵니다. 백제기, 백제본기, 백제신찬 등이 그것이지요. 이러한 일본서기에도 관미성 점령으로 말미암은 진사왕의 석연찮은 죽음이 392년에 벌어진 것이라고 기록합니다. 그렇다면 10성과 관미성 점령 사건은 392년에 일어난 것이 맞겠지요. 문제는 거란 정벌입니다. 백제 관련 기록은 다른 사서와의 교차검증을 통해 비록 삼국사기의 그것처럼 광개토왕 원년에 벌어진 것이 아님에도 392년으로 고정시켜도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거란 정벌은 교차 검증할 근거가 부족합니다. 근거가 있다면 그것은 '상식'입니다. 자세한 것은 김용만의 저서를 참고하십시오. 분명히 412년의 물음표시는 사라져야 하며, 삼국사기의 기년은 각주 정도로만 처리해도 무방합니다. 따라서 금번의 편집 역시 되돌려질 수밖에 없겠습니다. --고구려인 (토론) 2012년 2월 22일 (수) 15:44 (KST)답변
1. 거란 정벌 기년 문제를 비롯하여 이미 김용만의 책을 확인했습니다. 김용만이 거란 정벌 기년을 391년으로 수정하는 근거는 딱 한가지 뿐이더군요. 그 해에 3차례나 정벌이 있었는데 상식적으로 말이 안된다 이거 말고 다른 근거라고는 전혀 없습니다. 물론 백제 공격은 《삼국사기》 등과 교차검증되므로 건드리지 못한 채 말이죠. 이게 합리적입니까? 전혀 근거가 아닙니다. 그저 김용만 본인이 보기에 말이 안된다는 것이고, 또한 그것이 설사 합리적이라고 쳐도, 그렇다면 그것을 391년으로 옮겨야 한다는 근거는 전혀 되지 못합니다. 차라리 제가 추가한 서술처럼 영락 5년의 비려 정벌과 동일시하는 것이라면 몰라도 말이죠. 김용만의 책이 2011년에 나왔든 어제 나왔든 상관 없습니다. 학계에서 김용만의 주장은 전혀 참고 사항이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의 주장이 그 책에서 처음 제기된 것입니까? 제가 아는한 아닙니다. 그는 그 이전부터 다른 책을 통해 지속적으로 주장해 왔습니다. 예를 들어 귀하께서 지금도 열심히 사용하고 계시는 태왕과 같은 칭호 말이죠. 그 칭호가 과연 학계에서 인정받고 있습니까?
2. 분명하게 말씀드립니다. 귀하께서 참여하셨다는 바로 그 학술대회에서조차 광개토왕대 기년에 대한 논쟁이 벌어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조경철 교수의 〈고려 광개토왕대 불교와 유교 수용양상〉이 있겠지요. 이 논문은 심지어 390년 즉위설까지 내놓고 있는 실정입니다. 도대체 귀하께서 그렇게 주장하시는 것처럼 연대가 확정되어 있다면 대체 왜 2012년 현재에도 계속 논쟁이 계속되고 있습니까? 저는 해당 연대를 확실하게 확정지었다고 서술한 글은 한 번도 본적이 없습니다. 본인이 확실하게 맞다고 주장하는 다양한 논문이야 보았고 많이 있겠지요. 하지만 그것들 역시 아직까지 논쟁의 하나일 뿐, 그 누구도 그것을 확정짓지 못하고 있습니다. 물론 귀하가 금번에 이 토론에다 서술한 것 역시 아마도 김용만 개인의 주장이겠지요. 김용만의 주장이 진리입니까? 아닙니다. 그도 여러 논자 중 하나일 뿐입니다. 문제가 없다구요? 아닙니다.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에 반대하는, 혹은 전혀 새로운 주장들은 끊임없이 나오고 있으니까요.
3. 길게 설명할 필요도 없습니다. 귀하께서 해당 문장, 논란이 되고 있다는 문장을 지우고 싶으시다면, 그 논쟁이 끝이 났다는 확실한 근거를 가져 오십시오. 김용만의 책은 진리가 아니며, 그의 주장이 모든 논쟁을 끝내지도 못했습니다. 당연히 귀하의 편집은 되돌려질 수밖에 없습니다.--Xakyntos (토론) 2012년 2월 22일 (수) 17:24 (KST)답변

반스타:)

  일꾼 반스타
한국 고대사 관련 문서에서 중립적인 편집을 위해 힘쓰시는 Xakyntos님께 이 반스타를 드립니다. -- Şilver ßullet (토론) 2012년 2월 17일 (금) 02:21 (KST)답변
답례가 늦었네요. 반스타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 --Xakyntos (토론) 2012년 2월 19일 (일) 21:13 (KST)답변
이의 제기합니다. 그다지 중립적이지 않습니다. 아사달 (토론) 2012년 2월 18일 (토) 16:50 (KST)답변

Xakyntos 님이 자기 자신을 소개한 글을 보면, "본 사용자는 재야사학, 의사 역사학을 싫어하며, 이들의 역사 왜곡 행위를 비판하고 바로잡는 일에 소명을 바치고 있습니다... 재야는 사학계를 양분하는 양대 산맥 중 하나가 아니라, 사학계에 기생하는 기생충일 뿐이다."라고 적혀 있습니다. Xakyntos 님은 위키백과에서 자기의 최대 사명을 속칭 재야사학계라로 불리는 기생충(!)들을 없애는 것으로 설정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중립적이라는 평가는 정당하지 않습니다. Xakyntos 님은 자기 나름의 소신을 가지고 열심히 남의 글을 삭제하는 사람이라고 해야지, 중립적인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아사달 (토론) 2012년 2월 18일 (토) 18:15 (KST)답변

단군신화 용어 설명

제가 단군신화(고조선의 건국 신화)에 용어 설명을 달았습니다. 거기다가 또 "출처"를 밝히라고 써놓고, 안 그러면 삭제하겠다고 되어 있군요. 이미 이병도 등 다양한 출처를 밑에 적어 놓았는데, 무슨 출처를 더 밝히라는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환인", "환웅", "단군"에 대해서도 신화상 인물이라고 썼지 실존인물로 보지는 않는다고 적었구요. 대체 뭐가 문제인가요? 정말 이해가 안 되네요. 예를 들면, "환인(桓因) : 환웅의 아버지이자 단군의 할아버지로 해석한다. 신화상의 인물이며 실존했다는 뜻은 아니다." --> 이 말에서 무슨 출처를 더 밝혀야 하나요? 삼국유사 자체에서 "아버지가 아들의 뜻을 알고..."라고 되어 있으니, 환인을 환웅의 아버지라고 해석하는게 당연하고, "환웅이 아들을 낳으니 단군왕검이라..."라고 되어 있으니, 단군의 할아버지로 해석하는게 당연한데, 대체 무슨 출처를 밝히라는 말인가요? 그 다음 용어를 봅시다. "서자(庶子) : 장남이 아닌 아들을 말한다." --> 이런 건 국어사전에 나오는 말인데, 인용한 국어사전의 이름과 페이지까지 다 적어야 하나요? 대체 어느 부분의 출처를 밝히라는 말인지 이해가 안 됩니다. 아사달 (토론) 2012년 2월 19일 (일) 13:29 (KST)답변

사용자토론:S.BULLET.#단군신화 출처 문제를 참조하십시오.--Xakyntos (토론) 2012년 2월 19일 (일) 13:34 (KST)답변

동이

동이 전체가 한국인인양, 아이들이 배우는 교과서에도 버젓히 올라가 있는 상황이라 주류 학계에서도 그렇게 인식하고 그러는 줄 알았는데, 역시 터무니 없는 소리군요. 수정 고맙습니다. 참, 이 잘못된 관념을 누가 나서서 고쳐주어야 할텐데 말입니다.:) --Şilver ßullet (토론) 2012년 2월 19일 (일) 16:15 (KST)답변

"중국 상나라는 동이족이 세운 나라라는 사실은 학계가 인정하는 정설이다. 하지만 이 동이족이 만주족이나 오늘날 한국인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중국인들이 상나라를 동이족이 세운 나라라고 한 것은 화하족이 세운 나라가 아니라는 뜻이다." --> 이게 제가 상나라 항목에 대해서 쓴 주석 글입니다. 제 글에 무슨 문제가 있나요? Şilver ßullet 님, 제 글 중에서 마치 동이 전체가 한국인인양 하는 표현이 도대체 어디에 있나요? 남의 글 함부로 왜곡하지 마시고, 비판을 하려면 정확히 비판을 해 주세요. 그리고 Xakyntos 님, 앞으로 근거도 없이 제 글 함부로 삭제하지 마세요. 당신과 견해가 다른 것뿐이지 삭제해야 할 내용은 아닙니다. 아사달 (토론) 2012년 2월 19일 (일) 18:27 (KST)답변
Cnsuh / 귀하의 글에 대해서 뭐라 얘기한 적 없습니다. 동이 문서의 편집에 대해 의견을 표명한 것 뿐입니다. --Şilver ßullet (토론) 2012년 2월 19일 (일) 20:03 (KST)답변
저도 그 점이 많이 답답합니다. 사실 교과서가 상당히 민족주의적으로 편향되어 잘못된 내용들을 싣고 있는 것이 많아서 말이죠. 언젠가는 고쳐지겠죠.--Xakyntos (토론) 2012년 2월 19일 (일) 21:15 (KST)답변

광개토태왕 관련 2

1. 자신이 보기에 납득할 수 없다고 합리적이지 못한 것은 아닙니다.

김용만의 책을 제대로 확인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거란에 관해서 '다른 근거는 전혀 없다'는 표현을 쓰셨는데 이렇게 자신 있게 말씀하실 수 있는 용기가 부럽습니다. 『광개토태왕의 위대한 길』 142쪽에 다른 근거가 제시돼 있습니다. 삼국사기의 거란 정벌 기사와 비문의 거란 정벌 기사는 원인도 다르고 결과도 다릅니다.

백제 정벌 기사는 다른 기록이 없으므로 건드리지 '못했다'고 하셨습니까? 안한 것과 못한 것은 큰 차이가 있는데 계속해서 자신 있으신 모습, 부럽기 그지없군요. 마치 김용만이 백제 정벌 기사도 391년에 벌어진 것으로 보고 싶은데 그러지 못해 좌절했다는 투로 말하십니다. 그러나 김용만이 391년에 집착할 이유가 있을까 궁금합니다.

김용만의 연구가 진리가 아니라고 하셨지요. 맞습니다 진리는 아닙니다. 나도 진리라고 생각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나도 생각하는 사람이고 다르게 보는 것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내가 김용만을 좋아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학자로서 선생으로서 배울 점이 많기 때문이고 그의 연구가 타당하다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김용만의 연구가 진리가 아니지만 그렇다고 통설이 진리인 것도 아닙니다. 또한 님이 보기에 아닌 것 같다하는 생각도 진리가 아닙니다.

하나의 성을 점령하는데 며칠이나 걸릴까요? 당시에 지금처럼 고속도로가 있고 철도가 있어서 몇 시간 만에 요서를 갔다가 황해도 남단 및 경기도 북부를 갈 수 있었나요? 그것도 4만 대군이 말입니다. 순수 군대만 4만이지 치중부대까지 합치면 근 10만에 달하는 인원입니다(대개 치중부대는 배에 달하므로. 예: 수 양제의 113만 3천 8백 명의 대군은 순수 전투 인원만 따졌을 때이고 그 치중부대는 배에 달하여서 300만 대군이라 일컬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4만, 아니 10만 정도의 인원이 전부 말을 탄 것도 아니고 배를 타고 움직인 것도 아닙니다. 백제 영토로 이동하는 시간에다가 성을 점령하는 시간, 거란 지역으로 다시 이동하여 거란에게 빼앗긴 함몰구민을 구하는 시간, 이 시간이 과연 2개월 안에 가능할까요? 그리고 거란을 친 것은 9월이고 관미성을 친 것은 10월입니다. 1개월 안에 거란에서 관미성이 있는 곳까지 와서 성을 치는 것이 가능할까요? 군사들의 사기며 피로는 또 어찌 합니까?

삼국사기 거란 정벌 기록과 영락 5년 기록을 같은 것으로 보는 사람도 있고 그렇게 보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두 기록을 같은 연대에 일어난 일을 기록한 것이라고 말한다면 영락 6년조도 문제가 됩니다. 영락 6년 조 기록에는 학자들 대부분이 관미성으로 보는 각미성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관미성은 392년이 아니라 396년에 함락된 것일까요. 아니면 삼국사기와 비문 중 둘 중 하나가 틀린 것일까요. 삼국사기가 아닌 비문을 택해야 할 당위성은 높지만 삼국사기를 택해야 할 당위성도 만만치 않지요.

책이 나온 시기에 상관없이 김용만의 주장이 학계에서 전혀 참고가 되지 못하고 있다 하셨습니까? 무슨 근거로 계속 자신 있게 말씀하시는지 참으로 궁금합니다. 김용만이 1998년에 『고구려의 발견』을 내고 난 후에 고구려가 본격적으로 문명사적인 관점에서 다루어지기 시작했는데 말입니다. 『새로쓰는 연개소문 傳』도 연개소문과 고당 전쟁에 대한 인식에 큰 영향을 끼쳤죠. 단순히 광개토태왕에 관련해서 말씀하신 것이라면 나는 다시 시간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의 연구가 학계의 통설이 되기까지 얼마만큼의 세월이 소요되나요? 국사 시간에 부여와 고구려를 배울 때 ‘부 체제 설’을 당연하게 배웁니다. 부 체제 설은 노태돈이 1975년에 석사학위 논문에서 발표한 것입니다. 이러한 부 체제 설이 처음부터 국사 교과서에 실리지 않은 것으로 압니다. 그러나 지금은 국사 교과서에서도 실려 있는 통설이 되었지요. 결국 하나의 연구가 통설이 되는 데 상당 기간이 요한 것은 사실입니다. 다른 예를 들겠습니다. 화랑세기 필사본이 처음 공개됐을 때 학계는 대체로 그것을 부정적으로 보았고 화랑세기 필사본이 진서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극히 소수였습니다. 그런데 20년이 지난 오늘날에는 화랑세기 필사본을 마냥 위서라고만 주장하지 못합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하나의 연구가 증식(?)하고 한 학자에게서 다른 학자로, 한 스승에게서 제자로 이어지고, 그런 과정을 거쳐 통설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전제 하에 시간 이야기를 한 것인데, 무섭게 무시하시는 것은 심각한 오류라고 생각합니다.

태왕호를 적극적으로 사용할 것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많습니다. 적극적인 사용을 주장하지는 않더라도 태왕호의 실체와 태왕호를 통해 고구려의 독자적 천하관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더 많습니다. 계속해서 님이 의미하는 ‘학계’의 범위가 어디까지인가 궁금해지는데, 제가 첫 토론에서 언급한 서울대, 국편위의 범위에서 벗어나고 있지 않는 것 같군요.

  • 태왕호 관련해서. 갑 이라는 사람을 당시 주위에서 을이라고 불렀다고 갑의 아들 병이 갑이 죽은 후 3년 후에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약 500년 후에 정이라는 사람이 을 대신 무 라는 말을 적었습니다. 그런데 병의 기록은 많은 사람들이 알지 못했고 정의 기록은 많은 사람이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문제. 을과 무 중에 어떤 말이 갑을 진정으로 부른 말일까요? 태왕비에 태왕이라는 말이 분명 있는데 이 말 대신 김부식이 쓴 왕이라는 말을 쓰는 건 넌센스입니다.*

모순어린 말씀은 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님이 두루 통용되는 설을 위키에 적어야 한다 주장하시는 걸 압니다. 그래서 일부러 광개토왕 학술대회를 언급했습니다. 자꾸 소수 연구에 집착한다 비난하니까 통설에서도 이렇게 말한다고 한 겁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조경철의 논문을 언급하며 내 말을 반박하시는군요. 조경철의 연구는 님이 지양해야 한다고 열변하신 소수설이 아닌가요? 통설을 말했다가 소수설을 말하는 건 모순이 아닙니까.

한국고대사학회는 그 주소지를 여호규 교수(서울대 출신이자 노태돈의 제자이며 현재 한국외대 교수인)의 연구실에 두고 있는 한국고대사학회가 학술대회의 메인 테마에 412년을 광개토왕의 사망 연대로 적은 것은 그 대회에 참가한 학자들이 그것에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있다는 뜻이 아닐까 합니다. 통설을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412년을 광개토태왕의 붕어 연도로 보는 내 입장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통설을 지지하시는 님을 위해 내 생각과 일치하는 통설을 이야기해 보았습니다.

논쟁이 끝났다는 근거가 있어야 위키백과에 실을 수 있다면(이건 전에도 말한 정설, 통설 문제입니다) 님이 지지하는 대부분의 것도 실을 수 없습니다.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논쟁이 없는 부분은 몇 개 없습니다. 64개성 1,400촌 문제도 님은 통설 운운하며 계속 내 편집을 되돌리고 있지만 님이 조경철 언급을 한 것처럼 64개 성에 대해 누군가가 딴지를 거는 한 그 문제도 확정된 것이 아닙니다. 님도 그 편집을 되돌리고 싶다면 논쟁이 끝났다는 근거를 들고 오십시오. 그 전까지 님이 하는 것처럼 나도 끝까지 편집을 되돌리겠습니다. --고구려인 (토론) 2012년 2월 25일 (토) 00:21 (KST)답변

불행히도 귀하의 주장과 저의 주장은 경우가 다릅니다. 64개 성에 대해 딴지를 거는 것은 김용만 혼자이지만, 《삼국사기》의 즉위-사망년 문제는 지금도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는 미제죠. 당연히 딴지를 거는 쪽이 소수설일 뿐, 멀쩡한 통설을 보는 이도 있다라고 쓰는 것은 위키 지침이 금지하는 중립성 위반입니다. 반대로 즉위-사망년 문제는 여전히 논쟁이 계속되고 있고 아마도 영원히 해결되지 않을 문제죠. 그리고 그것이 통설이구요. 광개토왕의 즉위 사망년은 분명 확정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삼국사기》의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귀하의 김용만 처럼 거란 정벌을 391년으로 옮겨놓는 식으로 《삼국사기》의 기년으로 장난질을 치는 사람마저 있죠. 김용만의 장난질이 과연 《삼국사기》 기년 문제를 해결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저 그의 주장일 뿐이죠.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제가 논쟁이 끝났다는 증거를 가져오라 하는 것은, 그것이 실제로 논쟁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논쟁이 확실하게 해결되고 다른 주장은 소수설로 취급될 지경이 되어야만 귀하의 편집처럼 쓸 수 있습니다. 반대로 귀하가 저에게 증거를 가져오라 한 부분은 오로지 김용만 한 사람만 그렇게 주장하고 있는 명백한 소수설입니다. 이런 것을 논쟁이 없는 부분은 없다는 핑계로 그렇게 쓰는 것은 불가합니다. 중립적이지 않으니까요. 여전히 귀하의 편집은 계속 되돌려질 수 밖에 없습니다.--Xakyntos (토론) 2012년 2월 25일 (토) 22:32 (KST)답변
Xakyntos님은 역사를 아는 분인지 참으로 궁금해지는군요. 64개성을 동부여 정벌의 결과로 보는 학자가 김용만 혼자 뿐입니까? 너무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올 지경이로군요. 광개토태왕에 대해서 Xakyntos님은 얼마나 공부하셨습니까? 논문은 얼마나 읽어보았고 책은 몇 권이나 읽었으며 광개토태왕 관련 사료들은 얼마나 깊이, 자주 보면서 공부하십니까? 님이 그렇게 공부했다면 저렇게 간단하게 말할 수 없습니다. xx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맞는 말이로군요. 그 주장이 김용만 혼자만의 주장이 아니니 님의 이러한 주장은 잘못되었습니다.
또한 즉위-사망년 문제가 아마 영원히 해결되지 않을 문제입니까?
장난질? 토론에 대항할 근거를 찾지 못하다 보니 이제 장난질이라며 학자를 폄하하는 말까지 사용하는군요. 나는 분명히 Xakyntos님이 김용만 책을 잘못 읽고 말한 것에 대해 반론을 달아놓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충실한 반론 없이 그저 장난질이라고 하니 이것이 과연 위키백과에서 말하는 중립성인지 참으로 궁금하군요. 님이 장난질이라고 한 것은 과학에 근거한 것이 아닌 김용만을 보는 선입견으로부터 나온 주관적인 감정에 근거한 것에 불과합니다.
김용만에게 그토록 불만이 많다면, 그가 운영하는 카페인 우리역사문화연구모임(http://cafe.daum.net/alhc/ )에 와서 정정당당하게 토론을 해 보시지요.
내가 영락태왕을 삭제한 것은 영락태왕에 대한 설명이 단정적이기 때문입니다. 해석하는 자에 따라 영락태왕이 독립된 단어인지 끊어읽기를 잘못한 것인지 확실치 않지요. 내가 삭제하는 것에 대해 마음이 안 든다면 표현을 좀 순화해 보십시오. 위키백과를 텃밭으로 여기는 Xakyntos님과 같은 분이 텃세 부림을 당하는 나보다는 편집을 더 잘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한 광개토대왕은 광개토왕을 높여 부르는 것이 되어도 광개토태왕은 단순히 높여 부르는 것만은 아니지요.
다수의 주장이라 하여 무조건 따르는 것은 위키백과의 질을 낮추는 행태일 뿐입니다. 더구나 그러한 행태가 통설조차 제대로 모르는 자들에 의해 자행된다면 위키백과의 앞날은 더욱 캄캄할 뿐입니다. --고구려인 (토론) 2012년 2월 29일 (수) 22:25 (KST)답변
광개토왕에 대해서 관심 없습니다. 단지 고작 김용만 일개인의 주장만 가지고 학계의 통설을 무시하는 귀하의 행태를 좌시하지 못할 뿐. 귀하가 말씀하신 그 카페에서 저는 이미 김용만의 행태를 직접 보았고, 온라인으로나마 직접 맞붙어 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더더욱 김용만 일개인의 장난질을 용납하지 못하는 것이기도 하구요. 김용만 혼자만의 주장이 아니라면 다른 주장들을 가져와 보십시오. 그리고 그 다른 주장들이 과연 학계에서 얼마나 인정을 받는지, 그래서 현재 다종다양한 백과사전이나 한국사 서적에 당당히 통설로 서술되고 있는 64개 성을 이런 주장도 있다는 수준으로 낮춰야 할 만큼 비중이 있는지 직접 증명해 보십시오. 저는 최소한 3개 이상의 백과사전, 그리고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학계의 일반적인 해석을 근거로 들어드릴 수 있습니다. 물론 영락태왕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단정적이라구요? 명백히 통설이 그러하며, 그것에 대해 이러한 반론도 있다고 주석으로 분명하게 서술하고 있는데 단정적이라구요? 위키백과의 중립성을 우습게 보는 것도 정도가 있습니다. 귀하야말로 일개인의 근거도 희박한 주장을 가지고 통설을 깎아 내리는 것이야말로 위키백과의 질을 낮추는 행태라는 것을 똑똑히 아십시오.--Xakyntos (토론) 2012년 3월 1일 (목) 10:38 (KST)답변

야스페르츠 님에게

그렇군요. 야스페르츠 님이었군요. 그동안 계속 토론했던 상대가 야스페르츠 님이었다는 것이 반갑기도 하면서 적잖은 실망이 되기도 하는군요. 5호 16국사 연재를 정말 재밌게, 감명깊게 읽었는데 그 이후로 벌어진 토론에서 실망했던 만큼의 실망은 아닙니다만..

앵무새처럼 토론에서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은 불성실한 토론 자세입니다. 먼저 토론하자고 제안한 것은 야스페르츠 님입니다. 우선 자꾸 통설 운운하지 마시고 님이 직접 반론을 달아보십시오. 님의 직접적인 반론과 더불어 님이 자신있게 제시하신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학계의 일반적인 해석을 갖고와 보시길 감히 청해드립니다. 그리고 백과사전을 근거 자료로 삼는 것은 문제가 있지 않을까 합니다. 백과사전이 학계의 변동에 얼마만큼 민감한지 판단내리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내가 영락태왕을 삭제한 것은 님이 좋아하는 논리에 의해 한 것입니다. 광개토태왕=영락태왕 이라는 공식은 성립할 수가 없습니다. 비중 있는 반론이 있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인 예가 고구려 연구회(현 고구려 발해 학회)이지요. 고구려 연구회에 참여하는 학자들이 몇이나 될까요. 그렇기에 영락태왕이란 말이 당대에 쓰인 것마냥 적어놓은 그 문구는 삭제해야 마땅합니다.

아울러 412년에 물음표를 붙일만큼 님이 제시한 근거가 비중이 있는지 증명해 보십시오.

덧붙여서. 님이 역사문 카페에서 보여준 행태로 님이 어떤 성향의 사람인지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사료를 그대로 믿는 건 바보입니다. 더구나 그 사료가 어떤 의도로,어떤 시각에서 쓰였는지 뻔히 알면서도 액면 그대로 믿는 건 바보보다 더한 멍청이겠지요. 또한 사료보다 금석문이 훨씬 가치 있다는 것은 상식인데 금석문보다 사료를 우선하는 건 몰상식한 태도입니다. 그리고 무엇을 위한 실증인지. 객관적인 역사학이란 게 과연 가능한지 의문이 듭니다. 님이 환빠를 싫어하는 만큼 나도 환빠를 싫어합니다. 그렇지만 님과 같은 부류의 환까들도 정말 싫어합니다. 무엇을 위한 실증입니까. 순수학문이라는 게 가능이나 할까요. 그렇다고 어용학문이 되자고 주장하는 게 아닙니다. 양극단은 지양해야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님이 자신있게 셀 수도 없을 만큼 근거가 있다고 했으니 먼저 제시해 주시면 나도 그렇게 하겠습니다.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아서 못 싣겠다 따위의 소리는 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고구려인 (토론) 2012년 3월 5일 (월) 17:18 (KST)답변

1. 소수설을 가져오신 분께서 증명하셔야 할 일을 저에게 떠넘기시지 마십시오. 저는 증명을 할 필요도 없고, 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셀 수 없을 만큼 많은지 아닌지 별로 관심도 없습니다. 아니, 솔직히 말해서 저는 별로 자신도 없습니다. 자신있게 말했다고 하시는데, 별로 자신있게 말한 것도 아닙니다. 저는 일개 학사 나부랭이니까요. 귀찮기도 합니다. 제가 왜 그래야 합니까? 누구나 알고 있고, 누구나 찾아 볼 수 있는 공인된 출처를 통해서 해당 해석들은 제시되고 지지되고 있습니다. 백과사전이나 통사 수준의 자료들에 대해서 학계가 공통된 목소리로 수정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 한, 귀하와 김용만의 주장은 소수설일 뿐입니다. 그러니 그러한 증명은 소수설을 주장하는 귀하가 하셔야 할 일입니다. 제가 해야 할 일이 아니라. 아래 제안을 그대로 실행해 주시면 됩니다.
김용만 혼자만의 주장이 아니라면 다른 주장들을 가져와 보십시오. 그리고 그 다른 주장들이 과연 학계에서 얼마나 인정을 받는지, 그래서 현재 다종다양한 백과사전이나 한국사 서적에 당당히 통설로 서술되고 있는 64개 성을 이런 주장도 있다는 수준으로 낮춰야 할 만큼 비중이 있는지 직접 증명해 보십시오.
2. 저는 사료를 그대로 믿자고 말한 적도 없고, 그것을 만큼 바보도 아닙니다. 하지만, 귀하의 김용만처럼 사료를 자기 마음대로 끼워맞추는 것보다는 차라리 사료를 최소한의 마지노선으로 삼는 제 태도가 훨씬 더 합리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일반 역사학계의 견해이기도 하죠. 이미 했던 것이니 간단하게 거란 정벌 연도만 놓고 말해볼까요? 사료에는 392년 9월로 되어 있는데, 김용만은 단지 자신의 생각만으로 그 기간에 기동하는 것은 말이 안되니 391년일 것이라고 바꿉니다. 그냥 한 마디로 정리합시다. 연도가 틀렸는데, 9월이라는 기록은 어떻게 믿습니까? 392년이 아니라는 주장 자체도 별볼일 없지만, 그게 맞다고 치면 대체 9월은 또 왜 믿어야 합니까? 연도는 틀렸는데 월이 틀리지 않았다는 보장이라도 있습니까? 392년 5월의 일이라고 주장하면요? 차라리 영락5년 비려 정벌과 동일한 것으로 보는 시각이 김용만의 주장보다 훨씬 더 합리적입니다. 극단적인 회의주의라고 말씀하셔도 상관없습니다. 적어도 김용만의 근거 자체가 부재한 연도 이동설보다는 극단적 회의주의나 사료를 최소한의 마지노선으로 삼는 태도가 더 낫습니다. 물론 김용만의 주장이 학계 일반에서 받아들여지지 않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제 생각에는 이렇게 자기 멋대로 끼워 맞추는 주장이 학계 일반에서 받아들여질 가능성도 거의 없을 것 같습니다.
3. 저는 환빠를 싫어하지 않습니다. 단지 불쌍하게 여길 뿐이죠. 객관적인 역사학이 있냐구요? 없겠지요. 하지만 객관적이고자 노력하는 것이 역사학입니다. 적어도 김용만과 같은 부류처럼 자기 주관을 객관이라 포장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기계적 객관일지라도 사료에 의거하는 소위 실증사학이 훨씬 낫습니다. 양극단을 지양해야 하겠지요. 그리고 김용만이야말로 지양해야 할 한쪽 극단입니다.--Xakyntos (토론) 2012년 3월 5일 (월) 18:35 (KST)답변
추신. 솔직히 지적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냥 하도 웃겨서 지적이나 합시다. 대체 392년에 4만 대군이 1년 내내 기동했다는 귀하의 저 반론(?)은 어디서 나온 겁니까? 제가 김용만의 책을 지금 가지고 있지 않아 확인은 못하겠습니다만, 아무리 생각해도 당시 병력에 대한 정보는 첫번째 백제 원정을 제외하곤 없는데……. 김용만이 그런 무리수까지 두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위에 귀하의 반박이 정말 김용만의 주장이 맞습니까?--Xakyntos (토론) 2012년 3월 5일 (월) 18:42 (KST)답변
1. 말 바꾸는 걸 참 잘하시는군요. 셀 수도 없을 만큼 많다고 말한 것은 님입니다. 저렇게 자신있게 주장했다면 근거가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냥 한 번 해본 소리입니까? 그냥 한 번 내뱉은 말을 꼬투리 잡으니까 이제와서 다른 소리 하시는 것입니까?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토론은 야스페르츠 님이 하자고 해서 이렇게 임하는 겁니다. 이제와서 다른 소리 하지 마시고 위키백과의 중립성 따위도 모르고 소수설 따위나 외치는 나 같은 사람을 위해 한 번 증명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이제와서 증명할 필요도 없고 증명할 자신도 없다고 말하는 건 책임 회피입니다. 나는 내 책임을 떠넘긴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님이 말하는 학계의 통설이 어느 정도인지 알고 싶어서 증명을 요구하는 겁니다. 누구나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하여 말하지 않는 것은 자신의 무식함을 감추는 꼴 밖엔 되지 않습니다. 통설을 정리할 정도의 자신감이 없으면서 일개 학사 나부랭이가 한 학자의 연구를 장난질이라고 폄하합니까?
2. 님이 역사문에서 김용만과 토론한 것은 북연이 고구려의 속국이었냐 아니었냐를 비롯해서 중국 사서에 있는 고구려의 조공 기록에 관한 것이었음을 압니다. 그 토론에서 야스페르츠 님은 사료를 최소한의 마지노선인 것처럼 토론하지 않았던 것으로 압니다. 그저 기록을 액면 그대로 믿는 양 토론하셨었지요. 그래서 님이 기록을 그대로 믿는다 말하지 않았어도 님이 그런 사람인 걸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조공 기록을 의심해 보는 것 등은 끼워맞추기라고 폄하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왜곡된 중국 기록을 액면 그대로 믿는 것이 중국의 끼워맞추기 기록에 동의하는 것이나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3. 김용만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사람입니까. 타자와 완전히 고립된 인생이 있을 수 있을까요. 누구든 마찬가지이지만 김용만도 여러 학자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하나의 새로운 연구를 하기까지 수많은 선학들의 연구를 정리하고 공부하는 것은 당연한 순서입니다. 그리고 그만한 연구를 하기까지 여러 스승들의 가르침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김용만의 성향 중 하나인 사료 비판은 그가 처음 한 주장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 사료비판이 님과 같은 사람들에게 '끼워맞추기'라고 폄하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4. 왜 392년은 틀리고 9월은 틀리지 않았다고 보느냐.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게 하는 멋진 능력을 지니셨습니다. 위에서 설명했습니다. 삼국사기 편자들이 광개토태왕비와 다르게 광개토태왕의 즉위년을 착각한 것은 칭원법의 차이 때문이라고요. 님이 좋아하는 통설, 그리고 통설을 담은 백과사전에서는 삼국시대엔 즉위년칭원법이, 고려 이후엔 유년칭원법이 쓰였다고 말합니다. 이는 전 국사편찬위원장인 이만열 교수에게 배운 내용이기도 합니다. 서로 다른 칭원법에 의해 발생하는 연대 착오는 年을 중심으로 움직이지, 月을 중심으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러니 392년에는 의심을 품어도 9월에는 의심을 품지 않는 겁니다.
추신에 대한 답. 나는 4만 대군이 1년 내내 기동했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남의 글을 읽을 때는 제발 자세히 살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백제 영토로 이동하는 시간에다가 성을 점령하는 시간, 거란 지역으로 다시 이동하여 거란에게 빼앗긴 함몰구민을 구하는 시간, 이 시간이 과연 2개월 안에 가능할까요? 그리고 거란을 친 것은 9월이고 관미성을 친 것은 10월입니다. 1개월 안에 거란에서 관미성이 있는 곳까지 와서 성을 치는 것이 가능할까요? 군사들의 사기며 피로는 또 어찌 합니까?
위 글에서 누가 1년 내내 4만 대군을 기동했다고 말했나요? 또한 내가 첫번째 백제 원정 외의 다른 병력에 대해 언급했었나요? 혹시 난독증 있으신가요? 난독증이 없다면.. 광개토왕에 대한 님의 실력은 여기까지라고 생각지 않으시나요. 광개토왕에 대해 관심이 별로 없다고 하셨죠. 관심 없는 분야에는 손 떼시고 다른 사람이 감히 넘볼 수 없는 5호 16국에 대해 열심히 매달리십시오.
추신. 병력에 대한 정보는 첫번째 백제 원정 이후에도 나옵니다.

3년 가을 7월, 백제가 침략하였다. 왕은 정예 기병 5천을 거느리고 그들을 쳤다. 남은 적들이 밤에 달아났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광개토왕 3년

가을 8월, 왕이 좌장 진무 등에게 명하여 고구려를 치게 하니, 고구려왕 담덕이 직접 군사 7천 명을 거느리고 패수에 진을 치고 대항하였다. 우리 군사가 크게 패하였으니 사망자가 8천 명이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아신왕 4년

자, 님의 실력을 이제 아시겠습니까. 관심 없고 실력 없는 분야에서 기준 운운하면서 달려드는 것은 과욕으로 보입니다. --고구려인 (토론) 2012년 3월 5일 (월) 22:15 (KST)답변
1. 네. 말 바꾸는 겁니다. 이미 말했다시피 저는 광개토왕 따위에 관심도 없고 그저 백과사전이나 통사 수준 정도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그 정도로도 김용만의 주장보다는 훨씬 공신력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되네요. 적어도 위키백과의 원칙에 따르면 말이죠. 저는 무식하니 소수설을 주장하시는 귀하께서나 제가 말씀드린 것을 수행해 주십시오. 그렇지 않는 한 귀하의 편집은 영원히 위키백과 상에서 용납될 수 없습니다. 이미 다른 분들도 귀하의 편집을 되돌리고 있는 것을 보고 알아채셨겠지만 말입니다.
2. 제가 김용만과 한판 붙은 것을 귀하가 그렇게 해석한다니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군요. 북위가 고구려에 조공을 했다(!)는 김용만의 파천황적인 옛 주장에 비하면 저의 사료 고수 태도는 백만배는 더 합리적일 것 같습니다. 북연 종속 논쟁도 별반 다를 바는 없습니다. 뭐, 변명해봤자 귀찮기만 할테니 마음대로 생각하십시오. 마찬가지로, 연도는 의심하는데 월은 의심하지 않을 근거라는 귀하의 말씀도 그다지 참신하지는 못하군요. 칭원법 운운하는 식으로 년만 옮기고 월은 믿을 수 있다는 해석이라도 가능하려면 《삼국사기》와 광개토왕릉비의 기록이 최소한 교차 검증이라도 되어야 할텐데 그런 건 없거든요. 게다가 백제본기와 교차검증되는 것은 어쩌지 못하면서 기록 하나만 옮기는 건 어차피 설득력 없습니다. 그냥 김용만의 마음대로일 뿐.

당시에 지금처럼 고속도로가 있고 철도가 있어서 몇 시간 만에 요서를 갔다가 황해도 남단 및 경기도 북부를 갈 수 있었나요? 그것도 4만 대군이 말입니다. 순수 군대만 4만이지 치중부대까지 합치면 근 10만에 달하는 인원입니다

3. 이렇게 글을 써 놓고서 제 해석을 나무라시면 참 가련해 보입니다. 요서를 갔다가, 황해도로 간다라... 출발점이 어디인지는 모르겠으나 4만 명이라는 숫자는 1차 원정인 황해도에 있었으니 아무리 에누리해서 보고 싶어도 황해도에서 요서 갔다가 황해도로 간다는 것 같습니다만? 뭐, 귀하께서는 그런 의도로 쓰시지 않았을지 모르겠으나 이렇게 해석하는 사람이 비단 저 하나만은 아닐 것 같습니다. 게다가 다른 병력 정보라고 가져오는게 귀하의 언급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3년 뒤의 기록이라는 건 참 아이러니까지 합니다.
4. 어쨌든 이런 이야기를 여기서 아무리 해봤자 귀하의 편집에는 하등 도움은 안될 겁니다. 뭐, 계속 스스로의 밑바닥을 드러내고 싶으시다면 상관 없습니다만.--Xakyntos (토론) 2012년 3월 6일 (화) 01:38 (KST)답변
저도 야스페르츠 Xakyntos 님과 여러 차례 토론해 보아서 압니다만, 이 사람이 지식도 많고 역사에 대한 애정도 있는 좋은 분인데, 말투가 좀 거칩니다. "고구려인" 님처럼 논리적으로 품위 있게 말씀하시면 듣는 사람을 설득하기도 좋을텐데요. 정말 Xakyntos 님은 말투만 좀 고치면 많은 사람들이 따를 것 같은데, 참 아쉽습니다. 또한 패권주의적인 경향이 심한데요. 이것도 지적해야겠습니다. "그렇지 않는 한 귀하의 편집은 영원히 위키백과 상에서 용납될 수 없습니다. 이미 다른 분들도 귀하의 편집을 되돌리고 있는 것을 보고 알아채셨겠지만 말입니다."---> 이런 식으로 상대방을 힘으로 밀어부치는 듯한 태도는 별로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다수가 꼭 진실인 것은 아닙니다. 위키백과에는 상하관계가 없고, 누구나 평등합니다. 심지어 관리자와 중재위원도 사용자를 돕기 위한 사람이지 위에서 군림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자기와 의견이 다른 사람이라고 하여 위키백과에서 그 사람을 쫓아낼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습니다. Xakyntos 님은 자기와 견해가 다르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을 글을 소수설로 몰아가고 나중에는 유사 역사학 = 사이비 역사학이라고 몰아부치면서, 마구 삭제하고 되돌리기하는 좋지 않은 버릇이 있는데요. 이 토론에 참가하는 우리 중에 누구도 환빠가 아니고 사이비 역사학자가 아닙니다. 소수설이라고 하여 모두 환빠이고 모두 파시즘이고 모두 제국주의자인 것은 아닙니다. 소수설을 주장하는 양심적인 학자들이 얼마든지 많이 있을 수 있습니다. 다음 위키백과의 정책을 명심하는 것이 우리 모두에게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이 먼저 기여한 부분을 함부로 지우거나 되돌리기를 하지 말아주세요. 지우는 것도 위키백과에 기여하는 방법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그 사람의 기여를 살리는 방향으로 고쳐나가야 더 큰 참여를 만들 수 있습니다. 출처가 없다고 지우기보다는 출처를 달아주고 사용자페이지에 가서 출처달기를 독려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게 어렵다 하더라도 출처필요 틀을 달고 기다리며 해당 사용자 페이지에서 알려주는 노력을 해야합니다. 페이지 이동이나 되돌리기도 마찬가지입니다. 되도록 해당 사용자가 직접 하도록 유도하거나 그것이 어려우면 간단한 설명을 먼저 한 후 며칠 뒤에 작업하는 것이 좋습니다. 힘들더라도 토론페이지를 충분히 살펴보는 노력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특히 기여자가 위키백과 초보사용자라면 더욱 그를 배려해야 합니다. 한명의 기여자라도 더 정착시키는 것이 장기적으로 문제를 줄여나가는 유일한 길입니다.

아사달 (토론) 2012년 3월 29일 (목) 03:43 (KST)답변

김일제

[1]자세하게 알려주세요~--18호 (토론) 2012년 4월 11일 (수) 16:33 (KST)답변

백과사전의 표제를 직접적으로 설명하는 개요 수준에서까지 출처가 요구될 필요는 없습니다. 하단의 본문과 주석에 모두 제시되어 있습니다.--Xakyntos (토론) 2012년 4월 11일 (수) 18:21 (KST)답변
제시되어 있지만 확인할 방법이 없는 주석 뿐이군요?--18호 (토론) 2012년 4월 11일 (수) 18:23 (KST)답변
확인할 방법이 없다는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지금이라도 도서관에 가셔서 논문을 직접 찾아보시면 됩니다. 무슨 인터넷 링크 같은 것을 바라신겁니까?--Xakyntos (토론) 2012년 4월 11일 (수) 18:29 (KST)답변
그렇다면 몇 페이지에서 보셧는지는 기재하셔야 되는거 아닙니까? 게다가 서적 인용은 왜 사용하시지 않습니까? 또한 문단 중[2]읽을 거리는 주석으로 해놓아야 되는거 아닙니까? --18호 (토론) 2012년 4월 12일 (목) 13:18 (KST)답변

[3]의 편집은 Xakyntos님의 독자연구 아닙니까? 이 부분이 독자연구 → 김일제는 역사에 등장하는 최초의 김씨로 일부 재야사학자들은 대한민국의 김씨 역시 김일제의 자손이라 주장하고 있다. 어떻게 생각하시지요?--18호 (토론) 2012년 4월 12일 (목) 13:35 (KST)답변

1. 페이지의 명기나 서적인용 틀은 반드시 적용해야 하는 강제 사항이 아닙니다. 그리고 책이라면 모를까 논문을 레퍼런스로 제시할 경우에는 페이지를 굳이 명기하지 않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해당 논문의 전체적인 결론 또는 소결론을 인용할 때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귀하께서 논문을 직접 찾아보고 나서 페이지가 필요하다라고 말씀하신다면 얼마든지 페이지를 추가해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논문을 찾아보지도 않고 페이지나 서적인용 틀 같은 사소한 문제로 요구하는 출처에는 응대할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Xakyntos의 글 중에 논문을 '직접 찾아보고 나서 페이지가 필요하다라고 말씀하신다면 얼마든지 페이지를 추가해 드리겠습니다. Xakyntos님께서 쓰셧네요..페이지를 원하고 있는 분이 있고 해서 그 책을 보신 분이 먼저 기재해야 하는 것이 맞지 않겠습니까? 그 인용한 부분의 페이지를 추가해야 되는 것은 당연한거 아닙니까?--18호 (토론) 2012년 4월 13일 (금) 10:41 (KST)답변
2. 읽을거리는 제가 만든 내용이 아니니 저에게 말씀하실 이유가 없습니다. 솔직히 저는 저 내용들을 모조리 다 삭제해 버리고 싶습니다. 학술적으로 거의 가치가 없는 음모론이나 소수설일 뿐이니까요. 하지만 명백히 존재하는 것이니 그냥 내버려두는 것 뿐입니다.
문단 읽을 거리 내용을 주석으로 처리하지 못한다면 다 삭제해야 하고..--18호 (토론) 2012년 4월 13일 (금) 10:35 (KST)답변
3. [4] 이미 이 반론을 통해서 적절하게 수정된 부분을 지금 꺼내시는 저의는 무엇입니까?--Xakyntos (토론) 2012년 4월 12일 (목) 17:37 (KST)답변
독자연구는 삭제되어야 합니다. → 대한민국의 김씨 역시 김일제의 자손이라는 주장이 있으나 인정되지 않고 있다. 그리고 [5]의 수정은 저와는 관계가 없습니다. 저는 지금 처음 제기하는 것입니다. 이점 알아 주셧으면 감사하겠습니다.--18호 (토론) 2012년 4월 13일 (금) 10:33 (KST)답변
1. 직접 찾아보시고 나서 요구하십시오. 본인이 찾아보시지도 않고서 페이지부터 요구하시는 행동에는 공감하지 못하겠습니다.
2. 그럼 알아서 삭제하십시오. 왜 저에게 말씀하십니까?
3. 이미 수정이 된, 과거의 사실을 가지고 독자연구냐 아니냐를 묻는 게 무슨 의미인지 묻는 겁니다. 지금 현재 판에 대해서라면 모르겠지만, 지금 현재 공개되어 있지도 않은 내용에 뭘 어떻게 하라는 말씀이십니까? 저야말로 이 의문점을 해결해 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Xakyntos (토론) 2012년 4월 13일 (금) 12:39 (KST)답변

문단 중에 김일제와 신라 김씨의 관계 중에서 문경현, 〈신라건국설화의 연구〉, 《대구사학》, 대구사학회, 1972년 으로 주석을 해놓고 있군요, 그래서 문경현을 검색해 본 결과[6]에서의 책은 고려사연구, 세계사를 바꾼 한국인, 조선사연구, 신라사연구, 高麗時代의 纖維와 服飾 총 5개의 저서가 있는데 이 중에서 김일제의 문서의 문단 부분에 있는 전근대에는 가계를 신성시하기 위해 고대의 전설적인 제왕 또는 유명한 위인들을 시조로 간주하는 일이 많았으므로 김일제 후손설은 사실로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의 글은 5개의(고려사연구, 세계사를 바꾼 한국인, 조선사연구, 신라사연구, 高麗時代의 纖維와 服飾) 저서 중에 어느 책에 있는지 알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제가 직접 찾아서 페이지를 기재 하겠습니다. 만약 모르신다면 관련 글은 삭제 해주셧으면 좋겠습니다.--18호 (토론) 2012년 4월 13일 (금) 13:48 (KST)답변

지금 대구사학회에서 발간하는 학술지에 실린 단일 논문을 출처로 제시했는데 왜 뜬금없이 엉뚱한 책을 말씀하십니까? 혹시 논문을 어떻게 보시는지 모르십니까? 아니면 출처 표시를 읽는 방법을 모르세요? 제가 분명 책의 제목, 그 안에 실린 논문의 제목을 적어 놓았는데 말입니다? 지금이라도 국회도서관이나 중앙도서관에 가셔서 1972년도 《대구사학》을 찾아 보십시오. 그 안에는 적어도 5편 이상의 논문이 실려 있으며, 저 논문은 그 중 하나입니다. 이미 말씀드렸습니다만, 학술 논문을 인용할 때는 해당 논문의 결론이나 소결론을 언급하는 것이므로 굳이 페이지를 적을 필요가 없습니다. 해당 논문의 지엽적인 부분을 인용하는 것이 아닌 이상 말입니다.--Xakyntos (토론) 2012년 4월 14일 (토) 00:09 (KST)답변
그러면 관련된 ISBN을 적어주세요!--18호 (토론) 2012년 4월 16일 (월) 09:29 (KST)답변
DBPIA나 KISS 들어가셔서 검색을 해보시는것이... 최소한 네이버 전문정보 검색은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 adidas (토론) 2012년 4월 16일 (월) 10:32 (KST)답변
좀더 자세한 사이트 주소를 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KISS 사이트[7]에서 대구사학을 검색해봤지만 Xakyntos님의 관련 내용은 알 수 없네요..--18호 (토론) 2012년 4월 16일 (월) 10:44 (KST)답변

문경현 논문 - 1977년 백초 (白初) 홍순창 박사 환력 (還曆) 기념사학특집 : 가야연맹 형성의 경제적 고찰, 그런데 1972년 신라건국설화의 연구, 1973년 신라국 형성과정의 연구 자 이 중에서 1972년에 있다 라고 하셧는데 관련 김일제의 본문에서 발췌 및 문경현의 주장 3개- 1.대한민국의 김씨 역시 김일제의 자손이라는 주장이 있으나 인정되지 않고 있다. 2.투후 김일제는 신라 왕족인 김씨의 조상이라는 일부 주장이 있으나 인정되지 않고 있다.3.전근대에는 가계를 신성시하기 위해 고대의 전설적인 제왕 또는 유명한 위인들을 시조로 간주하는 일이 많았으므로 김일제 후손설은 사실로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Pudmaker님의 도움(?)을 받아 검색결과 김일제의 문제가 되었던 부분에 관련 출처를 해 놓았고, Xakyntos님과 저는 싸우려고 한 것이 아닙니다.출처 때문에..--18호 (토론) 2012년 4월 16일 (월) 11:10 (KST)답변

DBPIA에 가 보십시오. 학생시절 논문을 무료로 검색할 수 있었기에 보았던 곳이지만, 지금은 무료로 볼 수도 없고 당연히 논문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아니면 이미 말씀드린 방법대로 하시기 바랍니다. 국회도서관이나 중앙도서관을 가십시오.--Xakyntos (토론) 2012년 4월 16일 (월) 17:57 (KST)답변

Xakyntos님은 역사의 진실을 무시한다!

저는 태왕이란 용어를 Emperor으로 번역하였는데 뭐가 문제죠? 또한 이것은 저와 직접적인 연관은 없지만 낙랑군은 갈석산 유역에 있다고 중국 기록에 적혀있습니다. 평안도에 있는 낙랑은 군과 별개인 낙랑국입니다. 그리고 평양 지방에서 발견된 봉니는 고구려에 잡혀온 한족 포로들의 것입니다. 괜히 진실을 모독하는 메세지 남기지 마십시오.—이 의견을 쓴 사용자는 World historia(토론 | 기여)이나, 서명을 하지 않아 나중에 추가하였습니다.

심각한 문제입니다. 적어도 현대 한국사를 연구하는 연구자들 가운데 누구도 태왕을 황제로 번역하고 있지 않으니까요. 귀하가 그러한 번역을 원하신다면 합당한 근거를 가져오시기 바랍니다.--Xakyntos (토론) 2012년 5월 18일 (금) 17:24 (KST)답변

Xakyntos님 저는 태왕을 황제라고 한적은 없습니다! 태왕과 황제는 모두 천자를 지칭하는 명칭으로 둘다 Emperor으로 번역할 수 있다고 한것뿐입니다! 태왕은 고구려 및 법흥왕(무즉지태왕] 혹은 진흥태왕때의 신라 문화권의 천자를 뜻하는 것입니다.World historia (토론) 2012년 5월 21일 (월) 09:06 (KST)답변

그렇게 번역하고 있는 학계 대다수가 인정하는 근거를 가져 오시기 바랍니다. 이덕일이나 김용만은 학계에서 인정하지 않는 일개 연구자일 뿐입니다.--Xakyntos (토론) 2012년 5월 21일 (월) 13:25 (KST)답변

위키백과 공동편집 행사 참석 요청

안녕하세요. 다음주 토요일(6월 2일) 오후 2시에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어르신들을 모시고 공동편집 행사를 진행할 예정입니다. 어르신들께서 역사에 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역사에 관심있는 위키백과 편집자 분들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공동편집 행사에 도우미로 참여해주시면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위키백과:함께 편집하기를 참조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땅콩샌드 (토론) 2012년 5월 27일 (일) 09:52 (KST)답변

국립중앙도서관 세미나실 대여 건

안녕하십니까. 땅콩샌드입니다. 국립중앙도서관 세미나실을 대여하기 위해서는 해당 세미나실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국립중앙도서관 사이트 아이디와 실명이 필요합니다. rlaakdls@gmail.com으로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땅콩샌드 (토론) 2012년 5월 29일 (화) 17:34 (KST)답변

반스타 증정 :)

  스페셜 반스타
저는 2012년 6월 2일에 진행된 백:함께 편집하기에 참여해 주신 Xakyntos 님께 이 반스타를 드립니다. -- 미네랄삽빠 (토론) 2012년 6월 3일 (일) 15:30 (KST)답변

위키백과 공동편집 제3차 행사의 건

안녕하십니까. 몇주 전에 뵀던 땅콩샌드입니다. 잘 지내셨는지요. 이번주 토요일(6월 16일) 오전 10시부터 12시까지 국립중앙도서관 세미나 제1실에서 어르신 7분을 모시고 공동편집 행사를 개최할 예정입니다. 아무쪼록 여유가 있으시다면 참석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위키백과:함께 편집하기를 참조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땅콩샌드 (토론) 2012년 6월 14일 (목) 01:05 (KST)답변

감사합니다. 저도 참여하도록 하겠습니다. --Xakyntos (토론) 2012년 6월 15일 (금) 20:00 (KST)답변
참여에 감사드립니다.^^ 내일 뵙겠습니다.땅콩샌드 (토론) 2012년 6월 15일 (금) 20:20 (KST)답변

감사 인사

안녕하세요. Xakyntos 님. 오늘 바쁘신대도 함께 편집하기 행사에 참석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미네랄삽빠 (토론) 2012년 6월 16일 (토) 20:56 (KST)답변

또 만나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Xakyntos (토론) 2012년 6월 18일 (월) 22:30 (KST)답변

틀토론:한국사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뵙는것 같네요. 다름이 아니라 현재 틀토론:한국사에서 지금 두막루라는 나라와 발해 멸망 뒤 요나라가 세운 괴뢰 국가 동란국을 한국사 틀에 추가하자 말자에 대해서 논의가 진행중인데요, 딱히 고대사에 대해서 잘 아시는 분이 없다하다가 불현듯 Xakyntos님이 생각났습니다. 토론에 들리셔서 개인적인 생각을 써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 윤성현 · 기여 · F.A. 2012년 7월 10일 (화) 03:24 (KST)답변

죄송합니다

엔샷 (토론) 2012년 10월 15일 (월) 20:55 (KST)답변

천산산맥

만리장성 토론을 보다보니 천산산맥이 언급되어 있더군요. 중앙아시아의 톈산 산맥과는 다른 압록강 유역의 산맥으로 보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산맥인가요? -- ChongDae (토론) 2012년 10월 17일 (수) 13:56 (KST)답변

랴오닝 성#지리 항목을 보시면 나와 있습니다. 톈산 산맥은 天山이고, 랴오닝 성에 있는 것은 千山입니다. 압록강 북쪽으로 압록강 줄기를 따라서 이어지는 산맥입니다. 대략 고구려의 초기 수도가 위치한 지역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토론:만리장성에도 지도를 통해서 위치를 서술해 놓았습니다.--Xakyntos (토론) 2012년 10월 17일 (수) 15:05 (KST)답변
첸산 산맥이었군요. 해당 문서를 생성하고, 천산산맥 등은 동음이의 처리했습니다. -- ChongDae (토론) 2012년 10월 23일 (화) 14:01 (KST)답변

고구려에 대한 질문

안녕하세요, 얼음집에서의 활동이 자자하다고 들었습니다. 저는 위키백과에서 토론란으로 처음 뵙네요. 아니, 이것이 요점이 아니라.. 고구려에 대한 질문이 있어서 이렇게 토론란에 찾아오게 되었어요. 제가 알기로는, 유리왕 22년, 즉 서기 3년에 국내성으로 천도하여 장수왕 시대까지 고구려의 수도가 국내성이라고 알고 있어요. 그런데 산상왕이 환도성으로 수도를 옮겼다는 말이 있어서, 도대체 어떤 것이 맞는 것인지 잘 모르겠어요. 편집을 하려고 하는데 어느 쪽이 맞는지 몰라서 못 하고 있는 상황이에요.. 전공이 역사와는 조금 거리가 멀어서.. ^^; 설명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Sotiale (토론) 2012년 10월 22일 (월) 18:18 (KST)답변

고구려의 수도 이동은 약간 복잡한 면이 있습니다. 게다가 평지성과 산성을 모두 수도로 운용하는 체제가 있기도 해서 말이죠. 산상왕 때 옮긴 환도성을 평지성인 국내성과 산성인 환도성으로 이해하기도 하며, 그냥 간단하게 위나암에서 환도로 옮긴 것으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고대의 성(城)은 지금의 도시와는 조금 다른 개념이어서, 도시를 둘러싼 커다란 성을 말하기도 하지만 도시와 별도로 요충지에 쌓은 요새를 말하기도 합니다. 물론 궁궐이 위치한 중심성(궁성)을 말하기도 하죠. 쉽게 말해서 경복궁에서 창덕궁으로 옮겨가는 것도 성을 새로 쌓고 수도를 옮겼다고 기록될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국내성 시기 고구려의 수도는 위나암, 환도성, 평양성, 평양 동황성 등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그 위치는 집안 근처에서 맴돌았을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Xakyntos (토론) 2012년 10월 22일 (월) 18:37 (KST)답변
그럼 위치상에서는 유사지역을 돌았기 때문에 천도라고 보기 힘든 것인가요? --Sotiale (토론) 2012년 10월 22일 (월) 18:44 (KST)답변
네. 그냥 기록을 따라 천도라고 쓸 수는 있겠지만, 그 구체적인 위치를 적시하고 천도의 의미를 서술하는 것처럼 진짜 천도와는 다른 개념이죠.--Xakyntos (토론) 2012년 10월 22일 (월) 19:12 (KST)답변
그렇군요~ 큰 도움이 되었어요. 좋은 답변 고마워요 ^^ --Sotiale (토론) 2012년 10월 22일 (월) 19:14 (KST)답변

문서 이동

문서 이동은 일반적으로 복사 & 붙여넣기로 옮기지 않습니다. 위키백과:문서 옮기기를 참고하세요. --ted (토론) 2012년 11월 30일 (금) 19:03 (KST)답변

임유관 대첩에 대해서 ...

님의 의견이 가장 타당합니다. 처음에 작업을 했을 때는 ... 참고 자료를 강씨 문주의 족보 관련 서적이었기 때문에 ... 객관성이 있다고 생각되지 않았습니다. 임유관 대첩이라는 용어는 주로 강씨 문중에서 밖에 사용하지 않으며, 성격상 임유관 전투가 가장 적절한 용어라고 생각됩니다. --Asfreeas (토론) 2012년 12월 1일 (토) 03:20 (KST)답변

폐비 윤씨에 대해서

안녕하세요. 역사와 관련한 질문이 생겨서, 토론란에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연산군의 모를 폐비 윤씨라고 부르는 것이 합당하다고 알고 있습니다. 비록 연산군이 제헌왕후로 추존하였기는 했으나 중종반정 이후에 다시 삭탈되었지 않나요? 가끔 폐제헌왕후라고 부르기도 하던데, 어떤 것이 올바른 표현인가요? (문서 훼손이 빈번하게 일어나서, 확실히 하고자..) --Sotiale (토론) 2012년 12월 9일 (일) 21:41 (KST)답변

옳고 그름을 논하는 건 좀 이상할 것 같습니다. 누구나 입장이라는 게 있을테니까요. 보통은 종묘나 실록의 공식적인 기록을 통해서 더 합리적인 명칭을 찾는 것이 대부분이며, 폐비 윤씨 역시 공식적인 기록으로는 폐비 윤씨라고 되어 있습니다. 일단 중종 때 추숭이 취소되었으니까요. 보통 추숭이 취소된 것은 공식적인 호칭으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물론 제헌이라는 시호가 연산군 때 올려졌다가 중종 때 삭탈되었다는 것은 반드시 언급되어야 겠지요.--Xakyntos (토론) 2012년 12월 10일 (월) 00:20 (KST)답변
아하, 답변 감사합니다 :) --Sotiale (토론) 2012년 12월 10일 (월) 17:59 (KST)답변

Merry Christmas~ Xakyntos!

 
크리스마스까지 -2일 남았네요~! 메리 크리스마스, Xakyntos님 ^^
※참고: 이 메세지는 이 전달한 크리스마스 편지(?)입니다.
토론에 방해가 된다면, 편집을 취소하여 메세지를 삭제하여 주세요.
크리스마스까지의 D-day는 자동으로 계산되어 날짜가 떨어집니다.
단, 12월이 지나면.. 정확도에 대해서 면책이 됩니다(?)

분야별 전문가 제도

오랫만에 인사드립니다. 제가 요즘 한국어 위키백과를 위해 뭔가 기여할 일이 없을까를 생각하면서 이것저것 아이디어를 내 보고 있습니다. 그 중 하나로 '분야별 전문가 제도'를 두면 어떨까 하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예를 들면, 역사 분야의 전문가는 Xakyntos 님과 OOO 님.. 이런 식으로 특정 분야에 대해 전문가를 선정하고, 작은 썸네일 이미지를 만들어서 해당 사용자 페이지에 붙여두는 방안입니다. 아시다시피 위키백과에서 편집 분쟁이 자주 발생하는데, 그 때마다 모든 사용자가 평등한 입장에서 자유롭게 의견을 나누고 토론하는 것은 좋으나, 해당 분야에 대해 상당한 지식과 경험이 있는 사용자에 대해 약간의 권위를 부여하는 것도 좋을 듯 하여 의견을 내어봅니다. 물론 그 권위는 절대 강제적인 것이 아니며, 단지 해당 분야의 전문가임을 쉽게 확인하기 위한 작은 안내 정도로 보면 될 듯합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 아사달(Asadal) (토론) 2012년 12월 16일 (일) 04:26 (KST)답변

글쎄요. 현실성이 조금 떨어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권위 같은 게 통할지도 의문이고, 누가 무슨 근거로 그런 것을 부여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단지 아는 게 많다거나 기여가 많다는 것만으로 그런 것을 부여한다는 건 현실적으로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그렇다고 학위라던가 자격증을 요구할 수도 없는 노릇이죠. 그다지 흥미가 생기는 제안은 아니네요.--Xakyntos (토론) 2012년 12월 16일 (일) 20:50 (KST)답변
알겠습니다. 그냥 개인의 아이디어로 덮어두겠습니다. -- 아사달(Asadal) (토론) 2012년 12월 17일 (월) 01:58 (KST)답변

좋은 글

주 기여자 분에게 부탁드려봅니다. 환단고기 문서를 보니 꽤 괜찮은 문서인 것 같은데 #신시배달국에 출처만 보강하면 충분히 올라갈 수 있지 않을까요.--Leedors (토론) 2012년 12월 26일 (수) 16:46 (KST)답변

글쎄요. 환단고기 문서 자체가 좀 중구난방으로 내용이 작성된데다가, 실제 역사적으로도 전혀 가치가 없다고 평가되는 위서인지라... 제 생각에는 좋은 글이 되기에는 많이 부족한 문서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말씀하신 부분을 포함해서 대부분의 내용은 출처를 논하기가 어렵습니다. 애초에 환단고기라는 책 자체의 내용을 서술하고 있는 부분인데, 거기에 대체 어떤 출처가 필요할까요. 그 책 자체가 출처인데 말이죠.--Xakyntos (토론) 2012년 12월 26일 (수) 17:15 (KST)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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