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Frei24/작업장

독일 사회민주당
Sozialdemokratische Partei Deutschlands
로고
약칭 SPD
상징색 빨강
이념 사회민주주의, 민주사회주의,
제3의 길
당직자
당수 지그마어 가브리엘
역사
창당 1863년 5월 23일
전 독일 노동자동맹(ADAV)
1869년 8월 7일
독일 사회민주노동당(SDAP)
내부 조직
중앙당사 Willy-Brandt-Haus
D-10911 베를린
외부 조직
유럽정당 사회민주진보동맹

독일 사회민주당 (독일어: Sozialdemokratische Partei Deutschlands, 약칭 SPD, 에스페데)또는 독일 사민당독일사회민주주의 정당이다. 정치 성향은 중도 좌파이며 사회민주주의를 표방하고 있다. 국제적으로는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에 가입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독일 언론등에서 빨간색은 사회민주당을 상징한다.

독일의 현존하는 정당 중 가장 오래 되었으며, 프랑스 사회당, 영국 노동당, 이탈리아 올리브나무동맹, 스페인 사회민주노동당 등과 함께 유럽 사회민주주의 정당의 주도적 존재이다.

중도우파독일 기독교 민주연합 (CDU, 체데우. 한국에서는 기독교 민주당이나 약칭인 기민당이라고 부르며, 독일에서는 Die Union이라 부름)과 함께 독일의 2대 정당 중 하나이다. 2005년까지 독일 녹색당과 연합(적녹연합정권)하여 정부를 구성, 국정을 담당하였다. 제7대 연방총리(1998~2005)였던 게르하르트 슈뢰더와 당시 하원의장 볼프강 티에르제, 현 연방수도 베를린의 시장 클라우스 보버라이트(2001~)등이 소속되어 있다.

2005년 독일연방공화국 국회의원 (연방하원) 총선거에서 222석(34.3%)을 확보, 기민당이 주도하는 대연정의 파트너로 계속 내각에 참여했으나, 2009년 총선에서 146석(23%)을 얻는 데 그쳐 지지율은 크게 낮아지고 의석수를 많이 잃으면서 기민당이 주도하는 연정에서 배제되었다.

강령 및 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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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강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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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민당의 역대 강령은 다음과 같다.

과거 독일 사회민주당은 사회주의적 노동자 정당이었으나, 하이델베르크 강령과 고데스베르크 강령을 거치면서 사회민주적 국민정당으로 전환된다.

함부르크 강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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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민당의 현 강령은 함부르크 강령으로 2007년 당대회에서 채택되었다. 강령은 당의 목적을 "연대하는 다수"와 함께 집권하는 것이라 밝히고 있다.

조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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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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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세 이상으로 사민당의 목적에 대해 동의하는 사람은 누구나 당원이 될 수 있다. 해외에 거주한느 독일인이나, 독일에 거주하는 외국인도 사민당의 당원이 될 수 있다.

2011년 5월 현재 사민당 당원수는 50만명 정도로 100년 만에 최저 상태를 기록하고 있다.[2] 당원의 44%는 60세이상 이고, 6%가 29세 이하다. 69%가 남성이고, 34%가 정년퇴직자, 23%가 공무원, 15%가 사무직, 8%가 노동자, 5%가 실업자, 5%가 가정주부, 4%가 자영업, 2%가 자유직, 2%가 학생이다. [3]

당원수의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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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대전이 끝난후 사민당은 사회주의와 사회민주주의 저항조직과 망명조직의 조직원을 당원으로 가입시켰다. 1949년 독일 연방하원 선거때 이미 75만의 당원을 확보했고, 1951년에 이전의 최대 당원수였던 82만명을 돌파한다. 50년대를 거치면 다시 당원수가 감소해서 1958년에는 59만이 된다.

1960년대 다시 당원수를 회복하기 시작해 1977년 처음으로 백만명을 돌파한다. 80년대 다시 당원이 감소해 90만 정도를 유지한다. 독일통일후 일시적으로 당원수가 증가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후 당원수가 감소하기 시작한다. 1990년에서 2008년 사이 40만명의 당원이 줄어들어 현재는 50만 정도에 머물고 있다.[4] 또한 인구변화에 따라 당원구성도 많이 변했다. 50년대에서는 노동자가 많았으나 현재에는 정년퇴직자와 공무원이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다.

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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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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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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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당, 사회주의자 법: 1863-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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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민당의 창당일은 명확하지 않다. 사민당은 페르디낭 나살레가 1863년 라이프치히에서 창립한 전독일노동자협회에서 그 뿌리를 찾는다. 1871년에서 1875년까지 빌헬름 하젠클레버가 노동자협회를 이끈다. 1869년에는 아우구스트 바벨과 빌헬름 립크네히트가 아이젠나흐에서 사회민주 노동당(SDAP)를 창당한다. 전독일노동자협회와 사회민주노동당이 고타에서 1875년 5월 22일에서 27일까지 개최된 통합당대회를 통해 독일 사회노동자당(SAP)를 창당하는데, 이 시점이 실제적 창당시점으로 자주 언급된다.

사회주의자 탄압법이 효력이 없어진 1890년 가을 이 정당은 "독일 사회민주당"으로 개칭한다. 1년후 에어프르트 당대회에서 강령을 채택한다. 이 강령은 칼 카우츠키와 에두아르드 베른슈타인이 작성했으며, 개혁주의를 거부하고 다시 마르크스주의를 수용했다.

초기 사민당은 노동조합과 밀접한 연관이 있었으며, 19세기 유럽의 사회주의 또는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이 그랬던 것 처럼 혁명적 마르크스주의를 지향했다. 19세기말 20세기 초 에두아르드 베른슈타인은 사민당의 다수파였던 혁명적 세력에 반대해 수정주의이론을 제시했다. 수정주의이론은 1차세계 대전이후 당에서 확고한 기반을 갖게된다. 이 이론의 핵심적인 내용은 선거를 통해 민주적이고 정통성을 가진 방식으로 집권을 한후, 개혁을 통해 사회의 사회주의적 변화를 이끌어 낸다는 것이다.

이런 유사한 논쟁이 깔려있던 것은 1905년 러시아 혁명과 같은 유럽의 파업운동의 영향으로 일어났던 총파업 논쟁이었다. 이 논쟁은 로자 룩셈부르크를 중심으로한 당내 좌파와 개혁적 노조와 일부 수정주의 세력 사이에 벌어졌으며, 노동자의 노동조건을 개선하는 수단 이외의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느냐를 두고 갈라졌다. 이 논쟁은 1906년 만하임결의를 통해 노동조합의 승리로 최종 결론이 났다.

사민당을 둘러싼 역사적 갈등(특히 비르마르크 시대의 탄압)은 사민당 당조직을 집중적이며, 효율적인 조직으로 발전하게 만들었다. Die historischen Auseinandersetzungen um die Sozialdemokraten (Verfolgung, Repressionen vor allem unter der Reichskanzlerschaft Otto von Bismarcks – siehe Sozialistengesetz) führten dazu, dass die Parteistruktur der SPD sich am intensivsten entwickelte und hohe Effizienz erlangte. In dieser Zeit wurden oftmals Stimmen laut, die ein gewaltsames Vorgehen der Staatsgewalt gegen die Sozialdemokraten forderten, allen voran der Generalfeldmarschall Alfred Graf von Waldersee, der sich als „politischer“ Offizier einen Namen gemacht hatte und ein reaktionärer Vertreter der Staatsmacht war. Der riesigen Bevölkerungsgruppe der Arbeiter wohnte durch ihre kritische soziale Lage ein hohes politisches Potenzial inne. So wurde die SPD bald zur damals mitgliederstärksten Partei in Deutschland.

사민당 제국의회 선거 결과
(1871-1912)
35%
30%
25%
20%
15%
10%
5%
0%
71
74
77
78
81
84
87
90
93
98
03
07
12
사민당의 득표 및 의석
(1871-1912 제국의회 선거)[5]
연도 득표율 의석
ADAV 와 SDAP의 합
1871 3,2 % 2
1874 6,8 % 9
SAP
1877 9,1 % 12
1878 7,6 % 9
1881 6,1 % 12
1884 9,7 % 24
1887 10,1 % 11
SPD
1890 19,8 % 35
1893 23,3 % 44
1898 27,2 % 56
1903 31,7 % 81
1907 28,9 % 43
1912 34,8 % 110

사민당은 비스마르크 시대의 억압과 탄압에도 불구하고 노동조합과의 긴밀한 관계등을 이유로 노동자와 의회에서의 영향력이 점점 커졌다. 이 정당은 사회주의탄압법이 철폐된 직후인 1890년 19.8%의 득표로 제국내에서 최다 득표정당이 되었다. 그리고 1912년에는 34.8% 득표(110석)로 제국의회내 최대정당이 된다. 당내에서 혁명그룹과 개혁그룹을 중재, 통합하던 베벨이 1913년 사망한 이후 후고 하제와 더불어 아주 온건한 성향의 프리드리히 에버트가 당대표가 된다.

1차 세계대전, 11월 혁명, 분당:1914-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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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사민당 제국의회 교섭단체는 전쟁채권발행에 동의한다. 1914년 12월 카를 리프크네히트(빌헬름 리프크네흐트의 아들)만 전쟁공채발행에 반대한다. 1915년에 오토 륄레도 립크네흐트와 함께 반대표를 행사한다. 1916년 립크네흐트는 반전데모로 체포된 후 징역형을 선거받고 복역하다가 종전 직전에 풀려난다. 많은 사민당 당원들은 전쟁이 계속되면서 사민당의 전쟁지지 입장에 더 이상 동의를 하지 못하고, 독립사회민주당(USPD)를 창당한다. 립크네흐트외 여러 당원의 출당이후 1916년 칼 립크네흐트와 로자 룩셈부르크의 지도아래 국제주의자 그룹을 만들고 전쟁반대활동을 했던 좌파혁명주의적 성향의 스파르타쿠스단도 독립사민당에 참여해 당내좌를 형성한다.

독립사민당에 좌파 "반수정주의자"만이 참여한 것이 아니라 오래동안 잡지《새시대》의 발행인을 지낸 카를 카우츠키나 수정주의의 아버지이자 개혁그룹의 핵심이론가인 에두아르드 베른슈타인도 참여했다. 사민당에 남은 다수파사민당(MSPD)에서는 1915년부터 카우츠키나 베른슈타인을 대신해 과거 좌파 반수정주의 그룹이었던 렌쉬-쿠누브-헨니쉬(Lensch-Cunow-Haenisch) 그룹이 주도권을 행사했다. 이들은 이론 논쟁당시 독일계 러시아인 언론인 알렉산더 파르푸스(Alexander Parvus)를 지지하던 그룹이다. 그들이 전쟁을 지지한 이유는 독일의 1차대전 승리를 통해 유럽을 사회주의적 사회로 바꾸고, 짜르의 멍에에 잡혀 있는 동유럽인을 해방시키는 데 이용하기 위해서였다.

사민당 민속학자이자, 사민당 연수원 강사였던 하인리히 쿠누브는 1917년 카우츠키를 대신해 《새시대》맡는다. 그리고 그는 후에 괴어리츠 강령과 하이델베르크 강령의 공동작성자가 된다. 콘라드 헤니쉬는 1918년 사민당이 이끌던 프로이센 정부의 문화부 장관을 지내고, 지방행정구역인 비스반덴구역의 수반을 지낸다. 그리고 바이마르 공화국의 적인 극단주의자로부터 바이마르 공화국을 보호하기 위한 의회민주주의 정당연합이며, 사민당이 주도한 "제국기 흑적황"을 결성한다. 1917년 전쟁이 독일의 패배를 끝나갈 무렵 이 그룹의 영향력은 쇠퇴한다.

1차대전이 끝나가고, 독일제국 군부가 패전을 준비하고 있던 1918년 빌헬름스하펜과 킬에서 수병반란이 11월 혁명으로 이어지고, 그로 인해 황제는 물러나고, 네덜란드로 망명한다. 막시밀리안 폰 바덴 왕자로부터 정부를 이양받은 프리드리히 에버트의 다수파사민당은 사건의 진행속에 정권인수를 준비해야 했다. 에버트는 내전을 피하기 위해 우선 군주제 폐지를 하지 않는 고려했으나, 그렇게 되지 않았다.

스파르타쿠스단과 독립사민당 일부는 1년 전 러시아에서 10월 혁명으로 만들었던 평의회공화국(소비에트공화국) 건설을 위해 투쟁했다. 소비에트를 통해 혁명을 수행하는 군사평의회와 노동자평의회를 통해 볼세비키가 성공적으로 전복시켰던것을 따라하려 했다. 그들의 다수는 종전과 군부지배를 종식 꾀했다. 이런 목적을 가지고 그들이 신뢰하고 있던 사민당 지도를 지지하며, 사민당과 독립사민당의 재통합을 요구했다. 사민당 지도부는 독립사민당에 새 정부로 국민의 위임을 받은 평의회(소비에트)의 건설을 제안했다. Diese paritätisch mit MSPD- und USPD-Mitgliedern besetzte Revolutionsregierung unter der Führung von Ebert und Haase verstand sich als Provisorium für die revolutionäre Umbruchphase und legte sich auf eine aus baldigen allgemeinen Wahlen hervorgehende Nationalversammlung als verfassungsgebendes Organ fest.

1918년 말 다수파사민당과 독립사민당 연정은 반란 수병에 군사를 투입하는 문제로 갈등을 빗었다. 집권하고 있던 다수파 사민당만이 평의회(소비에트)의 독자적 통치행위를 노동운동의 민주적 원칙에 대한 배반으로 봤다. Versuche, eine demokratische Volkswehr aufzubauen oder mehrheitssozialdemokratischen Freiwilligenverbänden eine Chance zu geben, scheiterten. Als während des Spartakusaufstandes im Januar 1919 die Volksbeauftragtenregierung angegriffen wurde, fiel die Entscheidung, dem Militär der alten Offiziere und den neuen Freikorpsführern zu vertrauen.

다수파 사민당은 1918/19년 해가 바뀌던시기 구스타프 노스케가 채용한 우익민족주의자 의용군으로 1919년 중순까지 스파르타쿠드단 봉기와 뮌헨 소비에트를 유혈 탄압한다. 이 과정을 거치면서 바이마르 공화국의 초대 국방부 장관이 되는 구스타프 노스케는 "혈견"이라는 별명을 얻는다. 이 별명은 그가 혁명의 진압을 요구하면서 "누군가는 혈견이이 되어야 한다"고 한데서 유래했다. 그의 정치적 책임하에 유명, 무명 혁명가와 심지어 혁명가로 조작해서 의용군이 수 많은 살인을 저질렀다. 발데마르 파브스트의 지도아래 의용군이 1919년 1월 15일 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리브크네흐트를 살해한 사건도 수 많은 살인중 하나다.

11월 혁명기 에어크와 노스케,샤디데만의 역할과 그들의 탄압은 여러 원내 및 재야 좌파 그룹과 정당의 사민당에 대한 역사의 비판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이로 인해 많은 유권자들이 사민당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다. 스파르타쿠스단과 기타 좌파혁명 그룹이 1919년 1월 1일 독일 공산당을 창당하면서 사민당의 혁명적 그룹과 개혁적 그룹은 최종적으로 갈라서게 된다.

바이마르 공화국:1919-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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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마르 공화국 초기 사민당은 프리드리히 에버트를 제국 대통령(1919-1925)으로, 1920년까지 모든 정권(프리드리히 에버트, 필립 샤이데만, 구스타프 바우어, 헤르만 뮐러)을 장악했다. 하지만 그 이후로, 특히 독립사민당 잔류파가 다른좌익세력에 합류한 1922년 이후에는 정권에 거의 참여하지 못했다. 프로이센주에서는 오토 브라운이 1920년 1932년까지 주지사를 지낸데 반해, 공화국 전체에서는 1928년에서 1930년 사이 헤르만 뮐러가 이끌던 대연정에 참여한 것이 전부였다.

사민당은 정권에 자주 참여할 경우 실망한 노동자 유권자들이 공산당을 지지하게 될까봐 "건설적인 야당"의 입장을 취하면서 제국정치에 영향력을 유지하려 했다. 당시 사민당의 사회적 기반은 주로 조직된 공장노동자들이었다.

나찌당이 성장하면서 사민당은 고정 지지층을 지키지도 못했고, 나찌당이 기권층이나 청년층에서 많은 지지를 확보하는 것에 대등하지도 못 했다. 사민당의 조직적 제약과 사민당을 "사회주의적 파시스트"로 규정하던 공산당과의 협력불가, 그리고 부르조아 정당 한계화 등으로 새롭게 등장하던 나찌에 대항한 연합을 구성할 수가 없었다.

사민당 역대선거 결과
(1919-1933)
35%
30%
25%
20%
15%
10%
5%
0%
19
20
24
24
28
30
32
32
33
사민당의 국민의회(1919)와
제국의회(1920-33) 득표율[6]
연도 득표 의석
1919 37,9 % 163
1920.06 21,7 % 102
1924.05 20,5 % 100
1924.12 26,0 % 131
1928.05 29,8 % 153
1930.09 24,5 % 143
1932.07 21,6 % 133
1932.11 20,4 % 121
1933.03 18,3 % 120

1930년에서 1932년 까지 사민당 의회그룹의 브뤼니히 소수정부의 지지 정책은 당청년조직과 당내 좌파의 당지도부와 원내지도부에 대한 불만과 비판을 키웠다. 또 이는 1931년 당내 좌파 일부가 탈당해 독일 사회노동자당을 창당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프로이센쿠데타로 사민당이 마지막 보루를 빼앗기고, 나찌가 민주주의를 철폐하고 권력을 장악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기점이 되는 전권위임법에 반대표를 던진다. 이 때 다른 보수정당들은 찬성표를 던졌다.

당기관들이 압류되고, 대부분의 당지도자들이 망명한 후, 사민당 원내그룹 일부가 살해 위협속에 1933년 5월 17일 히틀러의 외교노선에 찬성표를 던진다. 6월 22일 사민당은 금지되고, 다음날 나찌당을 제외한 모든 정당과 함께 해산된다. 국가지도부 보위규정에 따라 7월 7일 모든 사민당 소속 제국의회 의원, 주의회 의원, 지방의회 의원을 체포한다. 그리고 7월 14일 정당 신설 금지법이 실행된다.

나찌, 2차대전, 전후:1933-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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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돌프 히틀러는 제국총리가 된지 몇 주도 되기전에 전권위임법을 의회에 제출한다. 사민당 당수엿던 오토 벨스는 이 법이 헌법에 대한 공격이자 제국의회 폐지 과정이라는 것을 인지했다. 그는 히틀러를 강력하게 비판하고, 헌법 파괴자라고 비난했다. 나찌 돌격대의 테러에도 불구하고, 아직 체포되거나 망명을 떠나지 않은 94명의 사민당 의원이 참석에 이 법에 반대표를 던졌다. 나머지 444명의 의원은 이 법에 찬성했다. 소수의 개인적 용기에도 불구하고 히틀러는 자신의 목적을 이뤘고, 정당들은 입법부에서 축출됐다. 사민당은 나찌시대에 탄압을 받기시작한 첫번째 집단중에 하나였다. 망명을 떠나지 못하거나 떠나지 않았던 많은 당원들이 강제수용소나 감옥에서 희생됐다.

야당:1949-6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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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연방하원 선거에서 쿠르트 슈마허가 이끌던 사민당은 콘라드 아덴나우어가 이끌던 기민련/기사련에 근소한 차이로 뒤져 야당이 된다.

사민당은 정부가 제출한 사회적 시장경제를 강력히 비판하고, 모든 원자제 산업의 국유화를 요구한다. 아데나우어의 서방통합정책에 대응해 미국와 서유럽과의 긴밀한 협력을 기반으로한 독일재통일정책을 주장했다. 당시 사민당의 통일정책은 독일의 중립국화와 비무장을 주장했다.

1953년가 1957년 사민당 총리후보로 나섰다가 아데나우어에게 패한 에어리히 올렌하우어는 사민당의 정책적 전환에 대해 운을 뗀다. 1959년 고데스베르크 강령을 통해 당의 노선을 전환해, 당을 마르크스주의 노동자 정당에서 국민정당으로 바꾼다. 1960년 베너의 외교정책노선 연설을 통해 서방으로 통합을 받아들인다.

이러한 정책적 전환과 더불어 베를린 시장이던 빌리 브란트의 총리후보 출마로 1961년, 1965년 선거에서 상대적으로 좋은 결과를 얻는다.

대연정:1966-6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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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에서 69년 사이 사민당은 전후 최초로 정부구성에 참여한다. 키싱거 정부의 연정파트너로 참여했으며, 빌리 브란트가 외무부장관을 맡았다. 당시 자유민주당은 의석이 많지 않아 야당의 역할을 거의 하지 못했고, 대신에 독일사회주의학생으로 대표되는 학생운동의 원외야당(재야운동)이 야당의 역할을 했다. 1967,68년 긴급입법의 도입에 반대하는 데모가 있어으며, 일부는 정부와 대연정을 반대하는 폭동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적황연정: 196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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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선거결과 사민당은 처음으로 연방총리를 배출할 수 있었다. 빌리 브란트는 "더 많은 민주주의를 시도하라" 슬로건아래 자민당과 사회자유 연정을 구성하고, 연방총리가 된다. 빌리 브란트와 기욤사건으로 브란트가 사퇴하고 정권을 이어받은 헬무트 슈미트정권은 동방정책에 따라 바르샤바 조약기구 국가들과 긴장완화정책을 펴는 한편, 법과 교육, 가족 분야에서 개혁정책을 편다.

신동방정책은 집권연정 속소 의원사이에서도 저항을 받았다. 그 중 일부가 야당이 기민련/기사련이로 당적을 옮기면서 집권연정의 과반수가 누너지기도 했다. 그래서 야당은 라이너 바르첼을 총리후보로 건설적 불신임투표를 제기하지만 과반수확보에 실패한다. 후에 들어난 사실에 의하면 동독의 슈타지가 기민련/기사련 소속 2명의 의원을 매수했기 때문으로 들어 났다. 이어진 재선거에서 사민당은 당역사상 최대득표율을 기록하고, 처음으로 원내 제1교섭단체가 된다.

총리실의 브란트의 비서 귄터 귀욤이 동독의 간첩이라는 사실이 밝혀진 기용사건으로 빌리 브란트는 사임하고, 헬무트 슈미트에게 총리직을 넘겨준다. 하지만 브란트는 당대표직은 80년대까지 유지한다.

슈미트는 1976년과 1980년 연방하원 선거에서 각각 헬무트 콜과 프란츠 요세프 슈트라우스를 물리친다. 이 두번의 선거에서 기민련/기사련 교섭단체가 제1교섭단체가 되고, 사민당은 제2교섭단체로 밀려나지만, 자유민주당과 연합해 의회내 과반수 확보에 성공하여 사회자유 연정을 이어간다.

1982년 9월 17일 자민당은 연정탈퇴를 선언한다. 연정 붕괴의 원인에 대해서 여러가지 주장이 있다. 자민당은 연정붕괴의 이유를 독일의 경제적 위기와 실업율의 증가였다고 주장한다. 또 헬무트 슈미트가 사민당 내에서 일치된 지지를 받지 못 했기 때문(예를 들어 나토의 더불트렉 전략같은 이슈에서)이라는 설도 있다.

사민당이 주장하는 다른 입장에 의하면, 자민당의 약속위반과 배반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자민당은 1980년 선거에서 슈미트의 이름을 선거포스터에 사용할 정도였는데, 사민당과 유권자에 대한 약속을 배반하고 순전히 권력투쟁적 동기에서 연정을 탈퇴했다는 것이다.

다시 야당: 1982-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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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민당 소속 다수 의원의 의원은 기민련/기사련과 연합해서 건설적 불신임 투표를 통해 헬무트 콜 정부를 구성한다.

야당이된 첫해 정책적 새방향 모색과 변화된 사회를 고려한 목표을 찾는 시기였다.

1983년과 1987년 선거에서는 헬무트 콜에 대항해 한스요헴 포겔과 요하네스 라우를 총리후보로 나섰다.

1989년 10월 7일 베를린에서 동독 사회민주당이 창당된 후, 10월 26/27일 통합당대회를 통해 사민당에 통합되었다. 동독 사민당의 창당멤버는 앙겔리카 바르베와 마르틴 굳차이트, 마르쿠스 멕켈, 슈테판 힐스베르크, 이브라힘 뵈메등이 었다.

자르란트 주지사였던 오스카 라퐁텐은 동독으로 독일 마르크화 사용지역을 확장하려는 계획에 대해 급한 화폐통합으로 동독지역의 실업율을 급격히 높아 질 수 있다며 비판했다. 또 콜과 달리 국가부채의 급격한 증가 없이는 통일비용 조달이 어렵다고 보고, 세금인상에 대해서도 우려했다. 반면 사민당 대표단과 라퐁텐의 당내 경쟁자였던 한스요헴 포겔은 화폐통합에 대해 긍정적 입장을 견지했다. 라퐁텐의 급격한 경제통합에 대한 우려는 당내와 여론조사에서 좋은 반응을 얻었다. 1990년 실시된 자르란트 주의회 선거에서 54.4%의 득표로 사상 최고 득표율을 기록했다. 이를 바탕으로 라퐁텐은 1990년 3월 사민당 총리후보로 선출된다.

통일과정에서 상황이 많이 변하게 된다. 라퐁텐은 암살시도로 중상을 입고, 통합과정에서 떨어져 있게된다. 헬무트 콜은 외교정책, 특히 고르마쵸르를 방문과 2+4 협약을 통해 언론의 칭찬을 받게된고, 사민당 후보는 이미 가망없다는 평가를 받게 된다. 언론과 유권자의 흥분된 분위기는 특히 동독에서는 정부의 낙관적 입장을 따르게 했다. 거기에 동독 지역 선거과정에서 사민당 후보가 동독 집권당이었던 통일사회당과 가깝다고 언론이 보도하면서 동독지역 선거운동이 어려움에 봉착했다. 동독 사민당의 원내대표였던 리하르트 슈뢰더도 가능한 한 빨리 통합을 이루기위해 화폐통합이 필요하다는 상황인식을 하고 있었다. 기존에 부정적이던 빌리 브란트도 입장을 바꿔 빠른 통합에 대해 "지금 함께 소속해 함께 성장하자"라는 말로 환영의 뜻을 표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민당은 1990년 3월 18일 실시된 국민의회선거에서 21.7%를 득표한다. 이후 동독 최초의 민주적이고 자유로운 선거로 선출된 정부인 로타 데 마이치에레(기민련)정부에 연정 파트너로 참여한다. 통일후 실시된 1990년 선거에서 사민당은 33.4% 득표에 그쳐 흑황연정(기민/기시련-자민당 연정)에 패한다.

사민당은 망명수용과 해외파병문제를 들러싸고 당내 갈등을 겪는다. 언론은 망명을 제한하고 파병에 찬성하자는 의견이 주류였다. 사민당도 소위 페터스베르그 전환을 통해 망명자수를 제한하고 해외파병에 찬성하는 것으로 입장을 수정한다.

임시 총리후보이자, 당대표였던 뵈른 엥그홀름이 1993년 조기 사임한다. 나중에 알려진 바에 의하면 바르셀 사건에서 위증한 것 때문에 사임했다. 이후 최초로 실시된 당원투표에 의해 루돌프 샤르핑이 게하르크 슈뢰더와 하이데마리 비체레크-쵸일레를 누르고 당대표가 된다.

총리 후보 샤르핑은 에서 게하르트 슈뢰더와 오스카 라퐁텐과 함께 소위 트로이카를 이뤄 1994년 선거를 치른다. 사민당이 이 선거에 제시한 선거공약중에는 "실업률의 감소"와 "생태적 시장경제"등이었다.

Bestimmende Themen des Regierungsprogramms zur Wahl waren unter anderem Pläne zur Verringerung der Arbeitslosigkeit und die Entwicklung hin zu einer „ökologischen Marktwirtschaft“. Die SPD kritisierte auch explizit, dass die Kosten der Einheit zu einem großen Teil den Sozialversicherungen aufgetragen wurden und wandte sich gegen Privatisierungspläne im Gesundheitswesen.[40] Bei der Bundestagswahl 1994 erhielt die SPD 36,4 % der Stimmen. Sie konnte somit ihre Stimmen vermehren, aber trotz der, nach der ernüchternden Entwicklung der Einheit, deutlich gesunkenen Popularität von Kohl keine Mehrheit erreichen. 1995 unterlag Scharping dann bei der Abstimmung um den Parteivorsitz dem damaligen saarländischen Ministerpräsidenten Oskar Lafontaine.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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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이후 선거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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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민당 연방하원선거 득표율
(1949-2009)
40%
30%
20%
10%
0%
49
53
57
61
65
69
72
76
80
83
87
90
94
98
02
05
09
독일 연방하원 선거 결과[7]
연도 득표수 득표율 의석 총리후보
1949 6,934,975 29.2 % 131 쿠르트 슈마허
1953 7,944,943 28.8 % 151 에리히 올렌하우어
1957 9,495,571 31.8 % 169 에리히 올렌하우어
1961 11,427,355 36.2 % 190 빌리 브란트
1965 12,813,186 39.3 % 202 빌리 브란트
1969 14,065,716 42.7 % 224 빌리 브란트
1972 17,175,169 45.8 % 230 빌리 브란트
1976 16,099,019 42.6 % 214 헬무트 슈미트
1980 16,260,677 42.9 % 218 헬무트 슈미트
1983 14,865,807 38.2 % 193 한스요헨 포겔
1987 14,025,763 37.0 % 186 요하네스 라우
1990 15,545,366 33.5 % 239 오스카어 라퐁텐
1994 17,140,354 36.4 % 252 루돌프 샤핑
1998 20,181,269 40.9 % 298 게하르트 슈뢰더
2002 18,488,668 38.5 % 251 게하르트 슈뢰더
2005 16,194,665 34.2 % 222 게하르트 슈뢰더
2009 9,990,488 23.0 % 146 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

주요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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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대전 전의 주요 지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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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당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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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민주당 출신 역대 독일 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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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마르 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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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연방 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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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독일 대통령(사회민주당 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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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마르 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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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연방 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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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독일연방공화국 부총리(사회민주당 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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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 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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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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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의 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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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사회민주당은 미국 민주당과는 달리, 매달 일정금액의 당비를 내는 진성당원(철저한 기초당원중심)들이 운영하는 정통 유럽식 정당 운영체계를 갖추고 있으며, 대한민국 민주노동당에 운영방식의 모델로서의 영향을 주었다. 참고로 진보신당독일 사민당민주노동당처럼 매달 일정금액의 당비를 자동이체로 납부하는 당원들에 의해 운영되는데,진보신당 당원들은 매달 당비를 내는 의무가 주어지는 대신, 지역공동체에서 일할 공직후보자와 지역당원협의회 간부를 선출할 수 있는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다.

현재 약 60만명의 진성당원들은 각 지역마다 의결권을 가지고 지역의 일꾼들을 지역전당대회에서 직접 선출하며, 여기서 선출된 대의원들은 연방(전국)전당대회에서 기초당원들의 의견을 전달하고 당의장선출 및 당의 강령과 핵심정책 등의 결정에 찬반의사를 표시한다.

또한, 독일 사민당의 주요 정치인들은 전통적으로 산업별 노동조합의 지도자도 겸하는데, 주요 지지층인 중산층 및 서민 노동자들과의 긴밀한 연대를 위한 조치이다. 일례로 23년동안 최장수 당의장을 역임한 빌리 브란트 제4대 독일연방공화국 총리의 경우, 제지언론노조 위원장을 겸직하였다.

당의장 쿠르트 벡(2006~)과 아울러, 전당대회에서 선출된 상임중앙위원들이 현재 당을 이끌고 있다.

사회민주당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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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국 이전 (1863-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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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사회민주주의 노동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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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민주당은 1863년 5월 23일 페르디난드 라살레라이프치히에서 만든 전독일노동자협회아우구스트 베벨빌헬름 리프크네히트의 주도로 1869년 8월 아이젠나흐에서 만들어진 독일사회민주주의노동자당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두 조직은 "독일 문제"에 대한 의견차이로 갈라졌었다. 라살레주의자들은 소독일주의를 아이젠아흐 쪽은 대독일주의를 주장했다. 그러나 독일제국이 성립되면서 그 차이는 의미가 없어지게 되고 1875년 5월 고타에서 합동 대회를 열어 독일 사회주의 노동자당으로 통합하게 된다.

당명의 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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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제2제국 시기 독일 사민당은 독일제국의 내외 정책에 대해 아주 비판적 입장을 견지한다. 1878년 비스마르크의 제국의회에서 "사회주의자 탄압법"이 제정되면서 12년간 어려움을 겪었으나, 독일에서 사회주의 정당의 집회를 가지지 못하게 하면 다른 나라에서 갖는 등 지혜를 발휘하여 극복하였다. 사회주의자 탄압법이 폐지되는 1890년 독일 사회민주당 (독일어: Sozialdemokratische Partei Deutschlands)으로 당명을 개정하였으며 마르크스주의를 공식적으로 지향하였다.[8]

이념의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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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사민당은 노동조합과 가까웠으며 19세기 유럽의 사회주의 또는 사회 민주주의당과 비슷하게 이념적으로 혁명적 마르크스주의를 지향했다. 19세기말과 20세기 초 영국 사회주의 운동의 영향을 받은 베른슈타인에 의해 수정주의이론이 제기된다.[9] 민주적 선거를 통해 정권을 획득하여 사회주의로 사회를 변화시킨다는 것이 주요 내용인 수정주의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에야 받아 들여지게 된다. 그러나, 실제로 당은 정식으로 채택하기 이전부터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를 곳곳에 받아들이고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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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전시 공채 발행 문제로 독일 사회민주당은 심각한 내분을 겪게 된다. 대부분의 당원 및 의원들이 전시 공채 발행에 찬성표를 던졌고, 소수 세력들이 이에 반발했던 것이다. 결국 이 두 세력 간의 갈등의 골은 깊어져 한동안 두 개의 당으로 분열되기도 했다. 찬성표를 던진 다수파 세력들은 다수파사회민주당이라 불렸으며, 소수파는 독일 독립사회민주당이라는 당을 창설했다. 후자는 로자 룩셈부르크카를 리프크네히트 등이 주요 지도자였다. 그러나 독립사회민주당은 그들보다 더 급진적 좌파인 독일공산당(KPD)과 다수파 사회민주당 사이에서 모호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어 결국 다수파 사회민주당과 다시 통합하게 된다.

나치 독재정권 시절 (1933-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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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트 고데스베르크강령 전후 국민정당으로의 도약 (1945~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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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란트-슈미트 정부 : 중흥기 (1969~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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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통일전후의 암흑기 (1982~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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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뢰더정부와 제3의 길, 그리고 현재 : 도약기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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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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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Externer Link: Volltext des aktuellen Parteiprogramms der SPD („Berliner Programm“) (PDF)
  2. 인용 오류: <ref> 태그가 잘못되었습니다; Mitglieder라는 이름을 가진 주석에 텍스트가 없습니다
  3. Bundeszentrale für politische Bildung: Dossier SPD
  4. 틀:Tagesschau
  5. Gerd Hohorst, Jürgen Kocka und Gerhard A. Richter: Sozialgeschichtliches Arbeitsbuch II: Materialien zur Statistik des Kaiserreichs 1870–1914. München, 1978. 173–175.
  6. D. Petzina, W. Abelshauser, A. Faust: Sozialgeschichtliches Arbeitsbuch III: Materialien zur Statistik des Deutschen Reiches 1914–1945. München, 1978. S. 174.
  7. 독일 연방하원 역대 선거결과
  8. 《역사신문》/사계절
  9. 《사회주의란 무엇인가》/베른슈타인 지음/책세상의 저자소개

바깥 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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