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Nuel92/바부르

무함마드 바부르
바부르의 초상
바부르의 초상
자히르 앗딘
재위 1526년 4월 30일 ~ 1530년 12월 26일
후임 후마윤
이름
ظهیرالدین محمد بابر
신상정보
출생일 1483년 2월 23일
출생지 페르가나 분지의 안디잔
사망일 1530년 12월 26일
사망지 아그라
왕조 티무르 왕조

무굴 제국

부친 우마르 셰이크 미르자
모친 쿠틀라크 니가르 카눔
배우자 무바리카 유세프자이

아이샤 술탄 베굼
딜다르 베굼
굴나르 아가차
굴루크 베굼
마함 베굼
아에시아 리즈비
사이다 아파크
자이남 술탄 베굼

자녀 후마윤 (아들)

캄란 미르자 (아들)
아스카리 미르자 (아들)
힌달 미르자 (아들)
굴바단 베굼 (딸)
파크룬니사 (딸)
알툰 비식 (아들임을 자칭함.)

종교 순니파 이슬람교
묘소 아프가니스탄카불

자히르 앗딘 무함마드 바부르(우르두어: ظہیرالدین محمد بابر, 페르시아어: ظهیرالدین محمد بابر , 힌두어: ज़हीरुद्दीन मुहम्मद बाबर. 1483년 2월 23일[율리우스력으로는 2월 14일] - 1531년 1월 5일[율리우스력으로는 1530년 12월 26일])는 안디잔(지금의 우즈베키스탄의 한 지방) 출신의 모험가로, 여러 차례 실패를 경험했으나, 1504년, 결국 아프가니스탄카불에서 왕국을 세우는데 성공했다. 그곳에서 그는 군대를 모아 1526년까지 인근 지역을 정복하고, 이후 로디 왕조를 공격하고 약탈해 무굴 제국의 기초를 쌓았다. 그의 자서전이 남아 있다. [1]

바부르는 아버지를 통해 티무르의 피를 이어받았고, 그의 어머니를 통해 칭기즈 칸의 피를 이어받았다[2]. 바부르의 혈통은 티무르와 차가타이-투르크계에 속했으나, 주변의 환경, 문화, 교육 등은 페르시아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에 그는 그 문화를 존중했고, 이는 페르시아 문화가 인도아대륙에 전파되는 계기가 되었다. 또, 페르시아 문화는 그로 하여금 휼룡한 문학적, 예술적 기질과 사료 편찬 기술을 갖추게 해주었다.[3]

후마윤은 그의 부황 바부르를 1530년에 22세에 계승하였다.

개관 편집

이름 편집

스테판 프레데릭 데일에 의하면, 바부르의 어원은 페르시아어 낱말 babr(‘호랑이’) 로, 피르다우시샤나마에서 여러 차례 나타났으며,[4][5] 아마 중앙아시아의 투르크어에 차용된 것이다.[6]

W.M. 색스턴은 ‘바부르’의 어원에 대해 이와 다른 견해를 제시했다. 그에 의하면 페르시아어와 투르크어, 양 언어에서 해당 이름이 /bāh-bor/라고 발음되는 것을 볼때, ‘바부르’는 babr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인도-유럽어족의 beaver에서 나왔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주장했다.[7]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 차가타이인들은 아주 거칠고 미개 (bázári) 하고 세련되지 않았 (buzurg) 었다. 그래서 그들은 자히르웃딘 무함마드를 표현하는데 어려움을 느꼈고, 이런 탓에 그에게 바바르 (Bábar) 라는 이름을 주었다. 공개 기도 (‘khutba’) 에서 그는 언제나 ‘자히르웃딘 바바르 무함마드’라 불리었으나, 그는 바바르 파디샤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 바부르의 사촌, 미르자 무함마드 하이다르, [8]

전기의 출처 편집

바부르의 전기의 출처는 바부르 그 스스로가 쓴 기록에 기초하고 있다. 그의 자서전은 「바부르나마」라 알려져 있는데, 이것이 이슬람 문학 최초의 자서전이다. 그는 「바부르나마」를 그의 모어인 차가타이 투르크어로 썼으나, 그가 페르시아 문화에 조예가 깊었던 탓에 문장 구조, 어형, 어휘는 페르시아어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4] 이 작품은 바부르와 그의 세계에 대해 잘 묘사한 귀중한 기록물이다.[7]

이 모든 것을 불평하기 위해 쓴 것은 아니다. 나는 단지 진실만을 쓰고자 했다. 내게는 나 자신을 미화하려는 의도가 없다. 나는 단지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정확하게 적었다. 내가 이 역사서에 모든 사건들의 진실을 적었고, 모든 사건에 대해 일말의 거짓도 보태지 않은 탓에 나는 결과적으로 내가 보았던 아버지와 형제의 선과 악을 보고했으며, 친척과 이방인들의 모든 실수와 덕에 대해 적었다. 독자들이여, 양해해주시오. 듣는 이들이 나를 이 일에서 떼어놓을지도 모르니.
 
— 자히르 앗딘 무함마드 바부르, [7]

바부르나마의 역사와 번역에 대해 편집

이 자서전은 본래 지금의 것보다 방대했다. 이 차이는 1508년부터 1519년까지, 또, 1520년부터 1525년까지의 부분이 여러 차례의 자연재해으로 인해 소실되었기 때문에 발생했다. 바부르의 말년인 1528년부터 1529년까지의 내용은 차가타이어에 능통해 아버지의 자서전을 읽을 수 있었던 그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후마윤에 의해 수정되었다. 차가타이어에 대해서는, 바부르와 후마윤의 문체가 서로 비슷했기 때문에, 이 수정은 철자의 오류와 사실관계의 오류들에 대해 바로잡는 수준에 그쳤다.

1556년 후마윤이 죽자 바부르의 손자 악바르가 14세의 나이로 왕좌에 올랐다. 이 어린 황제는 할아버지대부터 바부르를 위해 일했던 이란 출신의 관료 바이람 칸에 의해 옹립되었다. 섭정 바이람 칸은 차가타이어와 페르시아어에 능통해, 시를 쓸 수도 있었다. 그의 아들 압둘라힘은 차가타이어, 우르두어, 페르시아어, 세 언어 모두에 능통했다. 그는 바부르의 기록을 페르시아어로 번역했다. 차가타이어로 기록된 원본은 자한기르의 치세인 1628년에서 1638년 사이에 황실 서고에서 마지막으로 확인되었다.

편집

배경 편집

 
바부르의 아버지, 우마르 셰이흐 미르자. 1875 ~ 1900년 경 제작됨.

1483년 2월 23일 (구력으로는 2월 14일)[9], 바부르는 페르가나 분지의 안디잔에서 태어났다. 그는 아부 사이드 미르자의 아들이자 페르가나의 통치자인 우마르 셰이크 미르자와 그의 아내, 모굴리스탄 칸의 유누스 칸의 딸인 쿠틀루그 니가르 카눔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우마르 셰이크의 맏아들이다.[7][8][10]젊은 시절의 바부르에게 많은 영향을 준 것은 그의 어머니와 외할머니 아이산 다울라트 베감이였다. 이 점은 이후 무굴 제국의 역사에서 나타났던 강하고 지적인 여인들의 출현을 예고하는 듯 하다.[3]

바부르가 속한 바를라스 부족이 몽골 계통이기는 했으나, 이 부족은 투르크 문화[11]와 페르시아 문화[3][12]를 받아들였고, 이슬람으로 개종했으며, 투르키스탄호라산에 정착했었다. 바부르의 모어는 차가타이 투르크어 (바부르에게는 Turkī, 즉, “투르크어”) 였고, 티무르 왕조 엘리트들의 공용어인 페르시아어에도 그만큼의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13]

따라서, 바부르는 명목상은 몽골인(또는, 페르시아어로는, ‘모굴인’)이었지만, 그의 추종자들은 중앙아시아의 투르크인들과 페르시아인들이었고, 그의 군대 역시 중앙아시아의 바를라스 부족민이나 차가타이인들 외에도 타지크인 (바부르의 표현을 빌자면, 사르트인), 파슈툰족 (아프간인), 아랍인 등을 포함한 다인종 군대였다.[14] 또한 바부르의 군대는 사파비 왕조에 속한 시아파 수피들의 종교 집단 키질바쉬 전사들을 포함하도 있었다. 키질바쉬들은 후일 무굴 궁정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파벌을 형성했다.

바부르는 육체적으로 아주 강건했다고 일컫어진다. 속설에 의하면 그는 운동삼아 두 남성을 양 어깨에 지고 경사지를 달려올라갔다. 바부르는 그가 마주친 모든 큰 강들을 수영해서 건너갔다는 전설도 있는데, 이 큰 강들에는 북인도갠지스 강도 포함되있다. 그는 이 강을 두 번이나 건넜다고 전해진다.[15]

종교가 그의 인생에서 중심에 놓여있었다고 하나, 바부르 역시 그의 동시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아래 시의 내용에 격렬하게 찬성했다.

장교 나으리, 난 지금 취했수다. 처벌은 술이 깨면 하쇼.

그는 죽기 2년 전에 건강 상의 이유로 술을 포기했는데, 그의 궁정 전체에도 이를 강제했다. 그러나 그는 그러면서도 씹는 마약을 포기하지 않았으며, 마찬가지로 이런 아이러니를 느낄 감각을 잃지도 않았다. 그는 이렇게 적었다.

모두가 술을 마신 것을 후회하고, (금욕을) 맹세하네. 나는 맹세를 하고 그것을 후회하네.
 
— 자히르 앗딘 바부르, [16]

군대 경력 편집

 
무함마드 샤이바니의 초상화
 
바부르나마의 한 장면

1495년, 바부르는 12세의 나이로 그의 아버지의 뒤를 이어 페르가나의 지배자가 되었다. 그의 삼촌들은, 그들이 다른 티무르 왕조의 영토들에 그랬듯, 바부르를 그 지위에서 몰아내려고 했다.[17] 그리하여 바부르는 그의 삶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친구나 농민들이 아닌 다른 사람들의 보호를 받을 생각도 못하는 추방자로서 살았다. 이 와중에도 그는 결단력과 단호한 행동, 침착함 등의 능력을 보여줬다. 또, 그는 상황을 되도록 긍정적으로 보고자 노력했다.[3] 1497년, 바부르는 우즈베크족이 지배하는 사마르칸드를 공격해 7개월간 그 도시를 지배했다.[18] 그러는 동안에 페르가나의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바부르는 고향에서 거의 350 km 떨어진 곳에서 고향을 잃었다.[18] 그래서 바부르는 페르가나를 탈환하기 위해 진군했으나, 그의 군대는 그를 버리고 떠났다.

1501년, 바부르는 다시금 사마르칸드를 점령했으나, 얼마 안가 그의 대적(大敵), 우즈베크족의 칸 무함마드 샤이바니에게 패배했다.[18][19] 그가 평생토록 가지기를 염원했던 사마르칸드가 또 한 번 그의 손을 떠났다.

1504년 6월 ~ 7월, 21세의 바부르는 그의 세대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티무르의 후예였지만, 이미 모든 것을 잃어버린 상태였다. 바부르는 페르가나에서부터 함께 해온 소수의 측근들, 그리고 동생들 ─ 자한기르, 나세르 ─ 과 함께 중앙 아시아의 정치무대로부터 탈출했다. 그는 처음에는 호라산으로 갔으나, 곧 계획을 바꿔 카불 왕국을 정복하기로 마음먹었다. 이 원정에서 그는 큰 충격을 받았다. 페르가나에서 바부르는 정당한 군주였고, 그 백성들은 그들의 왕을 위해 피난처를 제공해줬다. 하지만 아프간에서 그는 그런 권리는 말할 것도 없었고, 그 부족민들에게서 충성심을 확보하기도 힘이 들었다. 그러나 그는 이전에 중앙 아시아의 유목민들 사이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던 경험이 있었다. 그는 옛 몽골 조상들의 충격 전술 ─ 예컨데, 적의 목으로 산을 쌓는 등의 ─ 을 부활시키는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모든 적들을 쳐부셨다.[3]

그는 마침내 아르군 왕조에게서 카불을 빼았았다. 아르군 왕조는 칸다하르로 도망쳤다. 이 원정으로 그는 부유한 왕국을 얻게 되었고, 운을 회복하여 파디샤를 자칭했다. 그 이듬 해 바부르는 우즈베크인들의 칸, 무함마드 샤이바니에 대항하기 위해 먼 친척인 헤라트후세인 바이카라와 연합했다.[20] 비록 술탄 후세인 미르자가 이전에 그의 도움 요청을 거절했던 적이 있었지만, 그는 삼촌의 요청에 응했다.[3] 그러나, 후세인 바이카라는 바부르가 헤라트에 도착하기도 전에 죽는[3] 바람에 이 원정은 미뤄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부르는 동맹자의 도시인 헤라트를 방문해 2개월을 보냈으나, 후세인의 아들들의 내전을 보고는 후라산을 포기하고 카불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는 헤라트의 지적 풍족에 경탄했다. 그는 이렇게 적었다. “교육받은 사람들로 가득하다.”[21] 또, 그는 위구르 시인 미르 알리 시르 나바이의 작품들을 접하게 되었는데, 그는 차가타이 투르크어를 사용해 시를 짓는 것을 유행시킨 사람이었다. 차가타이어에 대한 나바이의 능수능란한 사용은 아마 바부르가 그의 자서전, 《바부르나마》를 차가타이어로 쓰기로 결심하는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어쩃든, 그의 예상대로 헤라트는 후세인이 죽은 이듬해의 봄에 우즈베크인들에 의해 정복되었다.[3]

그가 헤라트에 있는 동안 카불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그는 이 반란을 진압하는데는 성공했으나, 그로부터 겨우 2년 뒤에 주요 군 지휘관들의 반란으로 인해 카불에서 쫓겨났다. 이때 우즈베크족의 무함마드 샤이바니가 아프간으로 온다는 소문이 돌았는데, 이에 두려움을 느낀 바부르가 도망친 탓이었다.[3] 소수의 친구들과 탈출한 바부르는 얼마 안가 카불을 재점령하고 반란자들에게서 충성을 맹세를 다시 받아냈다. 1510년, 무함마드 샤이바니가 사파비 왕조의 이스마일 1세에게 패배했고,[22] 바부르는 이 기회를 이용해 티무르 왕조의 옛 땅을 재점령하려고 시도했다. 그 뒤 몇 년간 바부르와 이스마일은 공조해 중앙아시아를 점령하려 했다. 바부르는 이스마일의 후원을 얻어내는 대가로 사파비 왕조의 종주권을 인정하고,[23] 시아파의 교리를 인정해야 했으며, 투르크만들의 복식을 받아들여야 했었다.[3] 또, 이스마일은 바부르에게 강제로 샤이바니와 결혼했던 바부르의 여동생 칸자다를 돌려줬다.[24] 바부르는 사마르칸드를 정복하기 위해 이스마일의 신하가 되기는 했지만, 동전에 바부르 그 자신의 이름을 새길 권리와 후트바를 그 자신의 이름으로 세길 권한만은 지켜냈다.

바부르는 우선 이스마일의 후원을 이용해 부하라로 진격했다. 이 곳의 백성들은 우즈베크인들을 싫어한 반면에 바부르를 티무르 왕조의 진정한 후계자로 생각하고 있었던 덕분에 그의 군대는 해방자 대접을 받았다. 도시와 마을들은 그를 환영하고 그의 군대에 조력과 식량을 제공하기 위해 비워졌다고 이야기되었다. 이 시점에서 바부르는 페르시아 제국과 결별했는데, 그가 이제 그들의 도움이 필요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511년 10월, 바부르는 10년 간의 방황을 끝내고 사마르칸드로 다시금 입성했다. 바자르는 금으로 장식되었고, 도시와 마을은 해방자를 맞이하기 위해 비워졌다.

로디 제국 정복 편집

바부르는 회고록에서 사마르칸드의 손실을 알라가 그에게 준 선물이라 생각한다고 적었다. 바부르는 이제 페르가나를 탈환하려는 모든 희망을 버렸다. 비록 우즈베크인들이 카불 왕국의 서쪽을 압박하기는 했으나, 그의 주의는 이미 동쪽의 인도, 특히 부유한 델리 술탄국의 재산으로 옮겨간 상태였다.[25]

바부르는 그가 로디 왕조가 차지하고 있는 땅의 진실로 정당한 군주라고 주장했다. 테무르는 과거 델리 술탄국의 사이드 왕조를 창건한 속신 키즈르 칸에게 펀자브 지방을 하사했었는데, 바부르는 그 자신이 테무르의 왕좌를 계승해야할 후계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26] 그러나 사이드 왕조는 파슈툰족 길자이 부족 출신의 이브라힘 로디에게 쫓겨났고, 바부르는 티무르 왕조의 군주로서 이를 돌려받고자 했다. 실제로 바부르는 펀자브 원정군을 모으는 동안 이브라힘에게 이런 요청을 보내기도 했다. “나는 그에게 참매를 보내며, 그 나라는 오래 전부터 투르크인들에게 의존해 왔음을 상기시켰다”, 여기서 ‘그 나라’란 델리 술탄국을 의미한다.

당연하지만, 이브라힘은 이 ‘제안’을 거부하기는 했다. 하지만 굳이 원정을 서두를 필요가 없었던 바부르는 전쟁에 앞서 아르군 왕조에게서 칸다하르를 빼앗았다. 이 도시는 바부르가 인도로 떠난 사이에 카불을 공격할 수 있는, 전략적인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칸다하르와 그 성채는 천혜의 요새였던지라 공성전은 그의 기대 이상으로 길어져 3년이나 계속되었다. 이 공성전이 끝난 뒤에는 인도에 대한 소규모 습격이 다시 시작되었다. 이 소규모 접전은 시간이 지날 수록 그 규모가 커져, 어느새 하나의 원정이 되었다.

펀자브 초원에서 바부르 최대의 조력자 랑가르 칸 니아지는 바부르에게 잔주아 라즈푸트족을 원정에 끌어들이라고 조언했다. 이 부족은 델리 술탄들에게 반항적인 것으로 유명했다. 이 부족의 수령들인 말리크 하스트 (아사드) 와 라자 상가르 칸들과의 만남에서 바부르는 잔주아인들의 조상들이 그의 가장 아미르 티무르가 힌드 원정을 치르는 동안 지원했다는 점을 상기시켰다. 1521년, 바부르는 잔주아인들이 그들의 적인 가카르족을 격파하는 것을 도왔고, 이는 바부르와 잔주아인들 사이의 동맹을 더욱 돈독하게 만들었다. 바부르는 라나 상가 정복과 델리 원정을 비롯한 인도 정복에서 그들을 장군으로 고용했다.

1508년부터 1519년까지를 다룬 바부르의 회고록은 소실된 상태이다. 이 기간동안 샤 이스마일 1세는 오스만 제국에 의해 대패를 당했다.(찰디란 전투) 이 패배는 오스만 제국의 화승식 머스킷 채택에서 기인한 바가 컸는데, 이 때문에 이스마일과 바부르는 이를 그들 각각의 군대에도 채택했다. 이 몇 년 동안 바부르는 머스킷의 우스타드(Ustad: 대가) 알리를 초빙해 자신의 군대에 이를 가르치게끔 했다. 바부르의 회고록은 전투에서 그의 반대자들이 그의 군대를 흉내내는 내 머스킷을 도입한 것을 묘사한 기록이 있다. 총이 발사될때 만들어지는 소음은 그 어떤 활과 창으로도 만들 수 없었던 것이기 떄문이다.

이 총들은 소수의 군대로 넒은 땅을 정복할 수 있게 했다. 단지 적의 세력을 시험해보기 위해 파견된 소수의 분견대가 인도로 나아갈 길을 열어줬다. 그러나 바부르는 그 전에 두 번의 반란을 진압했어야 했다. 하나는 칸다하르에서, 또 다른 하나는 카불에서 일어났다. 그는 승리한 후에도 지역의 토착민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토착 전통을 따르고, 미망인들과 고아들을 도왔다.

제1차 파니파트 전투 편집

이렇듯 티무르인들이 연합한데 비해, 로디 왕조의 군대는 연합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브라힘을 싫어하는 사람은 많았는데, 심지어는 로디 왕조의 귀족들도 그랬다. 그래서 그의 아프간 출신의 귀족들은 바부르에게 중재를 요청한 것이다. 바부르는 12,000명의 군대를 마련해 인도로 들어갔다. 이 군대는 원정이 점차 진행됨에 따라 토착민들을 받아 들였기 때문에, 실제 숫자는 좀 더 많았을 것이다. 두 세력간의 첫 번째 대규모 충돌은 1526년 2월 후반의 일이었다. 당시 17세였던 바부르의 아들 후마윤이 이끄는 군대는 이브라힘의 전위대를 격파했다. 후마윤의 승리가 이전의 전초전들에 비해 얻기 어려웠던 것만큼 그 의미는 중요했다. 이 전투에서 포로는 100여명, 전투 코끼리는 8마리가 사로 잡혔다. 그러나, 이전의 전투들에서와 달리, 이 포로들은 억류당하지도, 풀려나지도 않았다. 후마윤의 명령으로 이들은 사살당했다. 바부르는 그의 회고록에서 이렇게 적었다. “우스타드 알리쿨리와 머스킷 사수들은 예에 따라 모든 포로를 사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는 후마윤 최초의 공적이고, 전투였다. 이는 좋은 징조였다!” 아마도, 여기서의 ‘예’는 이전에 존재했던 총살형을 이야기 하는 것 같다.

이브라힘 로디는 바부르에 대항하기 위해 100,000명의 병사와 100마리의 코끼리를 모아 진군했다. 비록 바부르의 군대도 수가 많이 늘기는 했으나, 여전히 소수라 로디 군대의 절반도 되지 않았고, 어쩌면 25,000명 수준이었을지도 모른다. 두 군대는 1526년 4월 21일에 격돌했는데, 이것이 그들 사이에서 일어난 최초의 대규모 충돌인 제1차 파니파트 전투이다. 이브라힘 로디는 전투의 와중에 죽었고, 그의 군대는 무너졌다. 바부르는 재빨리 델리와 아그라를 점령했다. 바부르는 후마윤에게 빨리 이브라힘의 수도였던 아그라로 가 그들의 국고와 재화들이 약탈당하기 전에 확보하라고 명령했다. 후마윤은 그곳에서 괄리오르의 라자의 가족들을 찾았다. 라자 본인은 파니파트에서 전사했으나, 그의 가족들은 침략자들을 피해 그 곳에 숨어있었다. 그들은 후마윤보다 빨리 그 곳에 닿았던 패잔병들로부터 ‘몽골인’들의 무시무시한 성정에 대해 들었기 때문에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후마윤이 이들에게 안전을 보장하자, 이들은 후마윤에게 가문의 보물, 아주 큰 다이아몬드를 바쳤다. 혹자들은 이 다이아몬드가 코이누르, 즉 ‘빛의 산’이라고 믿기도 한다. 아마 이들은 그들의 왕국을 지키기 위해 이를 바쳤을 것이다. 그들의 의도가 무엇이었든 간에, 이 가문은 티무르 왕조 치하에서도 괄리오르의 지배자로 남아있었다.

그때 바부르는 델리를 향해 진군하고 있었다. 전투을 치르고 3일이 지난 날에 그는 델리에 도착했다. 그는 야무나 강에서 승리를 자축하는 축제를 열었다. 그는 최소한 금요일까지 머물었다. 그는 그의 이름으로 후트바를 진행했는데, 이는 그의 지배권을 상징하는 일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난 뒤에 그는 후마윤과 합류하기 위해 아그라로 진군했다. 바부르가 도착하자 후마윤은 예의 엄청난 다이아몬드를 그에게 보여줬다. 바부르는 회고록에 이렇게 적었다. “나는 그냥 그에게 돌려줬다.” 그리고 이런 내용도 적었다. “상인의 설명에 의하면 그 보석의 가치는 전세계가 소모할 식량을 이틀하고도 반나절 공급할만하다고 한다.”

라즈푸트인들과의 전투들 편집

 
궁정인들과 함께 있는 황제 바부르

델리와 아그라가 바부르의 세력권 내에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우환은 계속되었다. 회고록에서 그는 메와트파티(메와트의 지배자를 뜻하는 칭호), 메와트의 칸자다 라자 하산 칸과 메와르의 라즈푸트인 지배자 라나 상가의 위협 때문에 여러 밤을 잠을 이루지 못 했다고 적었다.

1526년은 인도에 새로운 권력자가 출연한 해였다. 파니파트의 승전이후 절음발이 티무르의 대리인임을 주장한 바부르는 델리와 아그라를 지배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티무르와는 달리 단순한 약탈자에 머물 생각은 없었다. 그는 새로운, 그리고 길이 계속될 제국을 세우고자 했다. 라즈푸트인들은 독립을 위한 최후의 위대한 저항을 준비했다. 메와티의 수령 하산 칸은 북방에서 온, 새로운 무살만들의 군단에 대항하기 위해 초대한 메와르의 수령 라나 상가를 초대했다. 라나 상가가 라즈푸트인들을 이끌게 되었다.[27]

이 시기에 하산 칸은 정치적으로 아주 중요한 사람이었다. 바부르는 그의 회고록에서 하산 칸이 이 시대의 모든 혼란과 반란에서 가장 앞에 서있는 사람이었다고 적었다. 바부르의 증언은, 비록 힌두교도와 같은 불신자들에 대한 그의 편견이 많이 반영되기는 했으나, 하산 칸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하산 칸의 영지가 델리에 아주 가까웠음으로, 바부르에게 있어 이 적대자는 특히 위험하게 보여졌을 것이다. 당시 하산 칸은 울우르에 머무르고 있었으나, 그 지방의 전승에 의하면 그는 본래 울우르에서 8 마일 떨어진 바하다르푸르에서 통치했었다.[27]

바부르 황제는 칸와에서 있었던 대전투에서 그와 싸웠던 사람들 중 한 명인 에와트의 하산 칸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그는 “200여년 전부터 그곳을 다스려온 그의 조상들에게서 메와트의 통치권을 물려받았다.”[28]

『바부르나마』의 해당 부분을 아네트 수산나 베버리지는 이렇게 번역했다.

그 곳에서 이틀 간 쉬고 진군한 우리는 비아나에 도착했다.

비아나로 가는 길, 또 알루르미와트로 가는 길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이교도들과 배교자들이 도주 중에 낙오해 죽어있었다. …. 미와트 지역의 디힐 지역… 하산 칸 미와티와 그의 조상들은 대를 이어가며 그 곳을 백년 또는 이백년 동안 다스렸다.

 
— 자히르 앗딘 바부르, [29]

배교자들 ─ 바부르는 하산과 그의 추종자들을 이렇게 불렀다. 아마 이는 그들이 같은 인종인 라즈푸트인들과 함께 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산과 그의 추종자들, 메오스인이 대개 무슬림이기는 했으나, 그들은 힌두 전통에도 익숙했다. 미와트에 대해서는 P. W. 파울렛 소령의 Gazetteer of Ulvur (Alwar, Alur) 을 참고하시오.[29]

미와트 ─ 알와르는 미와트 지역에 속하는데, 바부르는 아마 미와트 국國의 중요 도시가 알와르 북쪽의, 디힐로 가는 길에 있었다는 점을 적은 것 같다.[29]

미와티 ─ 이 단어는 미와트의 지배 가문인 칸자다들에게만 제한적으로 사용되고, 그들의 신하들, 메오스인들에게는 이 단어가 사용되지 않는다. ‘미와티’와 ‘메오’의 관계는 바부르 시대의 ‘차가타이인’과 ‘무굴인’의 관계와 비슷한 것 같다.[29]

바부르 황제가 그의 회고록에서 적기를 “미와트의 하산 칸은 화승총 부대 (zarb-i-tufak) 에 의한 사망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그들 부족의 수령들 대개가 그런 방식으로 죽었고, 화승총과 화살 (tir u tufak) 에 의해 그들의 시대도 함께 끝났다.”[29]

라나 상카는 칸와 전투에서 살아남았다. 그는 이 해에 죽었는데, 독살 당했다는 의혹이 있다.[29]

바부르는 그의 적 하산 칸의 조상들이 거의 200년 간 메와트를 다스렸고, 그들의 수도는 테자라였다고 적었다..[30] 그는 무굴인들에게 대항하기를 선동하고, 또 실제로도 대항한 라자 하산 칸 메와티를 ‘불신자’라고 적었다..[31] ‘라자‘라는 칭호와 ‘불신자’라는 표현은 바부르가 하산 칸이 힌두교도의 후손이었다고 생각했음을 보여준다. ‘거의 200년 간’이라는 것은 회교력 752년에서 790년 사이인 피로즈 샤의 시대에 하산 칸의 조상들이 무슬림이 되었다는 점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32]

라즈푸트 군주들은 바부르의 개입 이전에 술탄국의 영토 약간을 정복하는데 성공했었다. 흔히 라즈푸타나라 알려진 요새화된 지역를 비롯한 그들의 영토는 바부르의 새 영지에서 딱 남서쪽에 위치해있었다. 이 땅은 하나의 연맹 왕국이라기 보다는,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라나 상가의 종주권을 인정하는 공국들의 연합이라고 보는 것이 적합하다.

라즈푸트인들이 로디 왕조가 바부르의 군대에 가한 막대한 피해에 대한 정보를 입수했던 것으로 보이며, 어쩌면 델리, 더 나아가, 힌두스탄 전체를 점령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들은 1192년, 고르의 술탄 무함마드가 라즈푸트 차우한 왕조의 왕, 프리트비라즈 3세에게 승리한 뒤 빼앗은 힌두스탄을 힌두 라즈푸트의 손으로 다시 돌려주고 싶었을 것이다.

더 나아가 라즈푸트인들은 바부르의 군대에서 내분이 일어났다는 점도 잘 알고 있었다. 인도의 무더운 여름 기후는 많은 병사들로 하여금 시원한 중앙 아시아의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게끔 만들었다. 라즈푸트인들의 용맹함과 수적 우세 역시 바부르의 군대가 후퇴를 고려하게끔 했을 것이다. 바부르 그 자신이 산출한 계산에 따르면 라즈푸트군이 파니파트에서 로디 왕조가 활용한 수보다 많은 수의 군인들을 동원할 수 있었다. 바부르는 전투를 좀 더 치르기로 결심했고, 티무르조가 이전에 차지한 적이 없었던 땅까지 나아가기를 원했다. 이를 위해서는 그의 군대가 라즈푸트인들을 격파해야했다.

비록 그의 군대가 더 이상 전쟁을 원하지는 않았으나, 바부르는 라즈푸트인을 압도할 수 있다는 확신과 힌두스탄을 정복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카피르(불신자)들에 대한 전투를 위해, 또 성스러운 일을 이루어내기 위해 음주 ─ 그의 백성들 사이에서 흔한 관습이었다 ─ 를 평생 동안 자제하겠다는 맹세를 이용해 선전을 만들어낸뒤, 라나 상가를 향한 전쟁을 선언했다.

죽음과 유산 편집

바부르가 심한 병이 들자 궁정의 고위 귀족들은 지도자의 아들들이 아니라 바부르의 매부인 마흐디 호자를 후계자로 세우려는 음모를 꾸몄다. 이를 들은 후마윤은 아그라로 달려갔다. 마흐디 호자는 바부르의 병중에 권위를 얻게 되었으나, 후마윤이 다시 바부르와 만나게 됨에 따라 지배자가 되려는 야망을 버려야 했다. 하지만, 후마윤 역시 아그라에 도착할 무렵 병에 걸려있었고, 목숨이 위태로웠다.

병상의 바부르는 울며 신에게 그의 아들이 아닌 그 자신의 목숨을 가져가 달라고 애원했다고 전해진다. 전설에 따르면 이 직후 후마윤은 회복되고 바부르는 열병에 걸렸다고 한다. 그의 유언은 아들 후마윤을 향한 것이었다고 전해진다. “너의 형제들이 죄를 짓는다 하여도 그들을 건드리지 말거라.”

1531년 1월 5일(율리우스력으로는 2월 14일), 바부르는 47의 나이로 죽었다. 그의 지위는 장남 후마윤에게 이어졌다. 생전 그의 희망대로 그는, 그가 언제나 사랑했던 도시, 카불에 있는, 그가 좋아했던 정원에서 화장되었으나, 유해는 아그라의 영묘에 안장되었다. 9년이 지난 뒤에 바부르의 희망은 이루어졌다. 셰르 샤 수리는[출처 필요] 바부르를 카불의 바부르 정원(Bagh-e Babur)에 안장했다.

그의 무덤에는 다음과 같은 페르시아어로 쓰여진 명문이 있다.

만약 낙원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바로 차처, 여기, 이곳이다![33]

바부르는 우즈베키스탄키르기즈스탄의 국가적 영웅으로 여겨지며,[34] 그가 영면하고 있는 아프가니스탄에서도 존경받는다. 2005년, 파키스탄군은 바부르를 기리는 의미에서 순항 미사일에 바부르라는 이름을 붙였다.

건축에 남긴 영향 편집

바부르는 자신의 국가 곳곳을 여행하며 경치를 음미하고 그 지역 토착의 힌두양식에 페르시아와 투르크인들의 양식을 섞어 여러 건축물을 세웠다. 그는 돌을 깍아서 만든 찬데리의 건물들과 괄리오르에 있는 만 싱그 1세의 궁정에 대한 경외심을 기록했다. 그러나 그는 괄리오르의 성채 아래 바위에 새겨진 자이나교티르탄카라들에 대한 혐오감을 표출하기도 했다. 다행히도 상들은 성기와 얼굴들을 제외하면 파괴되지 않았다. 현대 조각가들은 얼굴을 복원했다.

바부르는 또한 그 자신의 추억을 위해 또 무시무시한 인도의 태양을 피하기 위해 모든 궁과 지방에 우아한 정원들을 짓기 시작했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소라 여기던 또 마침내는 그가 묻히기도 했던 카불의 정원들을 옮겨놓고자 했다. 바부르는 회고록에서 30쪽에 걸쳐 힌두스탄의 동물들과 식물들에 대해 서술했다.

바브리 모스크 편집

바부르는 또한 아요디아바부르의 모스크(Babri Mosque)을 세웠다고 믿어진다. 그러나 모스크의 표면에 장식된 세 개의 명문은 그것이 바부르의 치세기에 해당 지역으로 진군한 바부르의 장군 중 한 명인 미르 바키의 명령에 의해 만들어 졌음을 알려준다. 1992년, 광신적인 힌두교도들은 바브리 모스크를 파괴했다.[35] 그 결과 무슬림들과 힌두교도 수 천명이 사망했다.[36] 2003년, 인도 고고학 연구소는 바부르의 모스크의 돌무더기 아래의 구조를 조사하기 위해 면밀한 연구와 발굴을 요청받았다.[37] 인도 고고학 연구소의 보고서 요약에 따르면, 모스크 아래에는 사원이 존재한다는 명확한 증거가 존재한다.[38]

각주 편집

  1.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
  2. 브리태니커 백과사전Mughal Dynasty
  3. F. Lehmann, “BĀBOR, ẒAHĪR-AL-DĪN MOḤAMMAD,” Encyclopædia Iranica.
  4. Stephen Frederic, The garden of the eight paradises: Bābur and the culture of Empire in Central Asia, Afghanistan and India (1483-1530), Brill, p.15.
  5. 사이막의 아들 후샹에 대한 묘사를 예로 들자면 이렇다.
    ترا بود باید همی پیشرو
    که من رفتنی‌ام تو سالار نو
    پری و پلنگ انجمن کرد و شیر
    ز درندگان گرگ و ببر دلیر
    Shahnameh, the Moscow edition.
  6. Albert, Handbuch des Sanskrit, mit Texten und Glossar, German original, ed. C. Winter, 1953, Snippet, p.318.
  7. Babur, The Baburnama: Memoirs of Babur, Prince and Emperor, Modern Library, 2002, W.M. Thackston ed. and tr..
  8. Mirzā Muḥammad Haydar, Tarikh-i-Rashidi: A History of the Moghuls of Central Asia, Elias and Denison Ross ed. and tr., 1898, reprinted 1972.
  9. Mirza Muhammad Haidar Dughlt(Author), N. Elias (Editor), Sir E. Denison Ross (Translator), A History of the Moghuls of Central Asia, Cosimo, Inc, 2008, p.173.
  10. The Tarikh-I-Jahan Gusha of Ala-ad-Din Ata-Malik Juvaini
  11. Babur at Encyclopædia Britannica
  12. 〈Timurids〉. 《The Columbia Encyclopedia》 6판.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2006년 11월 8일에 확인함. 
  13. Iran: The Timurids and Turkmen,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14. Manz, Beatrice Forbes (1994). 〈The Symbiosis of Turk and Tajik〉. 《Central Asia in Historical Perspective》. Boulder, Colorado & Oxford. 58쪽. ISBN 0-8133-3638-4. 
  15. Elliot, Henry Miers (1867–1877). 〈The Muhammadan Period〉. 《The History of India, as Told by Its Own Historians》. John Dowson (ed.). London: Trubner. 2008년 4월 2일에 확인함. ...and on the same journey, he swam twice across the Ganges, as he said he had done with every other river he had met with. 
  16. Pope, Hugh (2005). Sons of the Conquerors, Overlook Duckworth, pp.234-235.
  17. Lal, Ruby (2005년 9월 25일). 《Domesticity and Power in the Early Mughal World》. 69쪽. ISBN 0-521-85022-3. It was over these possessions, provinces controlled by uncles, or cousins of varying degrees, that Babur fought with close and distant relatives for much of his life. 
  18. Ewans, Martin (2002년 9월). 《Afghanistan: A Short History of Its People and Politics》. HarperCollins. 26–7쪽. ISBN 0-06-050508-7. 
  19. “The Memoirs of Babur”. 《Silk Road Seattle》. Walter Chapin Center for the Humanities at the University of Washington. 2006년 11월 8일에 확인함. After being driven out of Samarkand in 1501 by the Uzbek Shaibanids... 
  20. Brend, Barbara (2002년 12월 20일). 《Perspectives on Persian Painting: Illustrations to Amir Khusrau's Khamsah》. Routledge (UK). 188쪽. ISBN 0-7007-1467-7. 
  21. Lamb, Christina (2004년 2월). 《The Sewing Circles of Herat: A Personal Voyage Through Afghanistan》. HarperCollins. 153쪽. ISBN 0-06-050527-3. 
  22. Doniger, Wendy (1999년 9월). 《Merriam-Webster's Encyclopedia of World Religions》. Merriam-Webster. 539쪽. ISBN 0-87779-044-2. 
  23. Sicker, Martin (2000년 8월). 《The Islamic World in Ascendancy: From the Arab Conquests to the Siege in Vienna》. 189쪽. ISBN 0-275-96892-8. Ismail was quite prepared to lend his support to the displaced Timurid prince, Zahir ad-Din Babur, who offered to accept Safavid suzerainty in return for help in regaining control of Transoxiana. 
  24. Briggs, John (1829). 《History of the Rise of the Mahomedan Power in India Till the Year A. D. 1612》. Shah Ismael at this time sent Khanzada Begum (Babur's sister) to him. This princess had been made prisoner at the capture of Samarkand by Sheebany Khan, who afterwards married her. 
  25. The Economist, "Babur, the First Moghul Emperor: Wine and Tulips in Kabul", 16 December 2010, pp. 80-82.
  26. Francis Robinson, The Mughal Emperors and the Islamic Dynasties of India, Iran and Central Asia, Page 103.
  27. Gazetteer of Ulwur
  28. Baber's Memoirs, pp. 368-69.
  29. 《The Babur-nama in English (Memoirs of Babur)》. 1922. 
  30. Babur's Memoirs, pp. 368-69.
  31. Babur's Memoirs, p. 335.
  32. Archaeological Survey of India Reports
  33. Agrawal, Ashvini (1983년 12월 1일). 《Studies in Mughal History》. Motilal Banarsidass Publisher. ISBN 81-208-2326-5. 
  34. Dust in the Wind: Retracing Dharma Master Xuanzang's Western Pilgrimage By 經典雜誌編著, Zhihong Wang, pg. 121
  35. The Crisis in Kashmir: Portents of War, Hopes of Peace By Šumit Ganguly R Page no 94 , 웹 아카이브에서 인용.
  36. Anil das. (28 September 2010) "Chronolgy of Ayodhya's Ram Janambhoomi-Babri Masjid title suit issue" , 웹 아카이브에서 인용.
  37. Ratnagar, Shereen (2004) "CA Forum on Anthropology in Public: Archaeology at the Heart of a Political Confrontation: The Case of Ayodhya" Current Anthropology 45(2): pp. 239-259, p. 239
  38. Prasannan, R. (7 September 2003) "Ayodhya: Layers of truth" The Week (India), from Web Archi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