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 이사금

신라의 제3대왕 (?–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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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이사금(儒理尼師今, ?~57년, 재위: 24년~57년) 또는 노례이사금(弩禮尼師今)은 신라의 제3대 이사금으로 남해차차웅의 태자이며 어머니는 운제부인(雲帝夫人)이다. 박혁거세의 손자이다.[1] 왕후는 일지(日知) 갈문왕(葛文王)의 딸, 혹은 허루왕(許婁王)의 딸 박씨라는 설이 있지만,[2] 삼국유사에 나오는 사요 갈문왕의 딸일 가능성이 높다. 아들 둘을 두었다. 다른 이름으로는 노례(弩禮), 치리(治理), 치리(齒理), 치리적(治理赤) 등이 있다. 삼국유사에서는 노례이다.

신라 유리이사금
新羅 儒理尼師今
경주 오릉
경주 오릉
제3대 신라 이사금
재위 24년 - 57년
전임 남해 차차웅
후임 탈해 이사금
이름
박유리(朴儒理)
신상정보
부친 남해 차차웅(南解次次雄)
모친 운제부인(雲帝夫人)
배우자 사요 갈문왕(辭要 葛文王)의 딸

24년부터 57년까지 재위하는 동안 24년부터 43년까지 친정하였고 43년부터 57년 붕어할 때까지 매제 석탈해(훗날 탈해이사금)가 대보의 신분으로 대리청정을 하였다.

생애 편집

즉위 이전 편집

삼국사기》는 왕호에 대해 김대문의 말을 인용하기를: "이사금은 방언이니 잇금을 이른다. 이전에 남해가 바야흐로 죽으려 할 즈음 아들 유리와 사위 탈해에게 일러 말하기를 '내가 죽은 뒤 너희 박 석 두 성씨 가운데 나이가 많은 사람이 왕위를 이을 일이다'라고 하였다."[3] 이때 탈해는 38세였고, 유리의 나이는 기록되어 있지 않아 알 수 없다. 둘은 지혜가 많은 자는 잇금이 많다고 하니, 그것으로 왕위 계승자를 결정하자는 탈해의 제안으로 시험해보니 유리의 이 자국이 더 많아 유리가 왕이 되고 왕호를 이사금이라 하였다.[4]

즉위 이후 편집

즉위 이듬해인 25년 친히 시조 묘에 제사를 지내고 죄수를 크게 사면했으며,[5] 28년(즉위 5년)에 홀아비, 과부, 고아, 늙고 병든 이들에 대한 구휼을 실시했다.[6] 이 해에 백성들 사이에서 평안함을 기뻐하며 처음으로 「도솔가(兜率歌)」를 지었으니, 이것이 가악(歌樂)의 시초이다.

즉위 9년에 진한 6부의 이름을 고치고 성씨를 내렸는데, 이 무렵 신라의 진한에서의 영향력이 커졌음을 나타낸다. 또한 <삼국사기>에 따르면 관위 17등급을 정리했는데, 삼국사기에는 17등급이 전부 이때 정해진 것처럼 기록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유리 이사금이 그 기틀을 다지고 후에 제도를 손봐 17등급이 완성된 것으로 생각된다.

36년(즉위 13년) 음력 가을 8월에 낙랑이 북쪽 변경을 침범하여 타산성(朶山城)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7]

37년(즉위 14년) 고구려대무신왕낙랑을 습격하여 멸망시켰다. 낙랑 사람 5천 명이 와서 투항하였으므로 6부에 나누어 살게 하였다.[8]

말년 편집

40년(즉위 17년) 가을 음력 9월에 화려현(華麗縣)과 불내현(不耐縣) 두 현의 사람들이 함께 모의하여 기병을 이끌고 북쪽 변경을 침범하였는데, 맥국(貊國)의 우두머리가 곡하(曲河)의 서쪽에서 군사로써 막아 물리쳤다. 유리 이사금은 기뻐하여 맥국과 우호를 맺었다.[9] 그리고, 42년(즉위 19년) 가을 음력 8월에는 맥국의 거수(渠帥)가 사냥하여 얻은 새와 짐승을 바쳤다.[10]

56년(즉위 33년) 음력 여름 4월에 용이 금성의 우물에 나타나고, 얼마 있지 않아 갑작스럽게 비가 서북쪽으로부터 와서 쏟아졌다.

또 그 해 음력 5월에는 바람이 세차게 불어 나무가 뽑혔다.

57년(즉위 34년) 가을 음력 9월에 유리 이사금은 병환이 들자 신료들에게 '탈해는 그 신분이 임금의 척족(戚族)이고 지위가 보필하는 신하의 자리에 있으며 여러 번 공과 명성을 드러내었다. 짐(朕)의 두 아들은 재주가 그에 훨씬 미치지 못한다. 내가 죽은 후에 그로 하여금 왕위에 오르게 할 것이니, 나의 유훈을 잊지 말라.'며 유언을 남겼다. 57년 겨울 음력 10월에 왕이 돌아가시니 사릉원(蛇陵園) 안에 장사지냈다.[11]

가계 편집

참고 편집

전 대
남해 차차웅
제3대 신라 국왕
24년 ~ 57년
후 대
탈해 이사금

각주 편집

  1. 네이버 사전, 지길
  2. 김부식(1145), 《삼국사기》 〈권제1〉 유리 이사금 條 “ 儒理尼師今立 南解太子也 母雲帝夫人 妃日知葛文王之女也或云妃姓朴許婁王之女” (유리 이사금이 왕위에 올랐다. 남해의 태자이다. 어머니는 운제부인이고 왕비는 일지(日知) 갈문왕(葛文王)의 딸이다. 혹은 왕비의 성은 박씨이고 허루왕의 딸이라고도 하였다. )
  3. 김부식(1145), 《삼국사기》 〈권제1〉 유리 이사금 條 “金大問則云 尼師今方言也 謂齒理 昔南解將死 謂男儒理·壻脫解曰 吾死後 汝朴昔二姓 以年長而嗣位焉 ” (김대문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사금은 방언으로 잇금을 일컫는 말이다. 옛날에 남해가 장차 죽을 즈음에 아들 유리와 사위 탈해에게 일러 말하기를 '내가 죽은 후에 너희 박(朴), 석(昔) 두 성 가운데 나이가 많은 사람이 왕위를 이어라.'고 하였다. )
  4. 김부식(1145), 《삼국사기》 〈권제1〉 유리 이사금 條 “儒理齒理多 乃與左右奉立之 號尼師今” (유리의 잇금〔齒理〕이 많았으므로 이에 좌우의 신하와 더불어 그를 받들어 세우고 이사금이라 불렀다. )
  5. 김부식(1145), 《삼국사기》 〈권제1〉 유리 이사금 條 “二年 春二月 親祀始祖廟 大赦” (즉위 2년(25년) 봄 2월에 친히 시조묘(始祖廟)에 제사지내고 크게 사면하였다.)
  6. 김부식(1145), 《삼국사기》 〈권제1〉 유리 이사금 條 “五年 冬十一月 王巡行國內 見一老嫗 飢凍將死曰 予以眇身居上 不能養民 使老幼至於此 極 是予之罪也 解衣以覆之 推食以食之 仍命有司 在處存問 鰥寡孤獨 老病不能自活者 給養之” ( 즉위 5년(28년) 겨울 11월에 왕이 나라 안을 순행(巡行)하다가 한 할멈이 굶주리고 얼어서 죽어가고 있는 것을 보고 말하였다. "내가 미미한 몸으로 왕위에 있으면서 백성을 능히 기르지 못하여 늙은이와 어린 아이로 하여금 이 지경에까지 이르게 하였으니, 이는 나의 죄이다." [왕이] 옷을 벗어서 덮어주고 밥을 주어 먹게 하였다. 그리고 담당 관청에 명하여 곳곳에 있는 홀아비와 홀어미, 부모없는 아이, 자식 없는 늙은이와 늙고 병들어 스스로 살아갈 수 없는 사람을 위문하고 양식을 나누어 주어서 부양하게 하였다. )
  7. 김부식(1145), 《삼국사기》 〈권제1〉 유리 이사금 條 “十三年 秋八月 樂浪犯北邊 攻陷朶山城” (즉위 13년(36년) 가을 8월에 낙랑이 북쪽 변경을 침범하여 타산성(朶山城)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8. 김부식(1145), 《삼국사기》 〈권제1〉 유리 이사금 條 “十四年 高句麗王無恤 襲樂浪滅之 其國人五千來投 分居六部” (즉위 14년(37년) 고구려 왕 무휼(無恤)이 낙랑을 습격하여 멸망시켰다. 그 나라 사람 5천 명이 와서 투항하였으므로 6부에 나누어 살게 하였다. )
  9. 김부식(1145), 《삼국사기》 〈권제1〉 유리 이사금 條 “十七年 秋九月 華麗·不耐二縣人連謀 率騎兵犯北境 貊國渠帥 以兵要曲河西敗之 王喜 與貊國結好 ” (즉위 17년(40년) 가을 9월에 화려현(華麗縣)과 불내현(不耐縣) 두 현의 사람들이 함께 모의하여 기병을 이끌고 북쪽 변경을 침범하였는데, 맥국(貊國)의 우두머리가 곡하(曲河)의 서쪽에서 군사로써 막아 물리쳤다. 왕이 기뻐하여 맥국과 우호를 맺었다. )
  10. 김부식(1145), 《삼국사기》 〈권제1〉 유리 이사금 條 “十九年 秋八月 貊帥獵得禽獸獻之” (즉위 19년(42년) 가을 8월에 맥국의 우두머리가 사냥하여 얻은 새와 짐승을 바쳤다.)
  11. 김부식(1145), 《삼국사기》 〈권제1〉 유리 이사금 條 “三十四年 秋九月 王不豫 謂臣寮曰 脫解身聯國戚 位處輔臣 屢著功名 朕之二子 其才不及遠矣 吾死之後 卽大位 以無忘我遺訓 冬十月 王薨 葬蛇陵園內” (즉위 34년(57년) 가을 9월에 왕이 병환이 들자 신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탈해는 그 신분이 임금의 친척이고 지위가 재상의 자리에 있으며 여러 번 공명(功名)을 드러내었다. 짐(朕)의 두 아들은 재주가 그에 훨씬 미치지 못한다. 내가 죽은 후에 그로 하여금 왕위에 오르게 할 것이니, 나의 유훈을 잊지 말라" 겨울 10월에 왕이 죽어 사릉원(蛇陵園) 안에 장사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