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익성(申翊聖, 1588년 음력 11월 16일 ~ 1644년 음력 8월 2일)은 조선의 문신이다. 선조의 딸 정숙옹주와 혼인하여 동양위(東陽尉)에 봉해졌다. 자(字)는 군석(君奭), 호(號)는 낙전당(樂全堂), 본관은 평산이다.[1]

신익성
申翊聖
조선 선조의 부마

동양위 東陽尉
이름
시호 문충(文忠)
신상정보
출생일 1588년 11월 16일(1588-11-16) (음력)
사망일 1644년 8월 2일(1644-08-02)(55세) (음력)
가문 평산 신씨
부친 신흠
모친 전의 이씨
배우자 정숙옹주
자녀 5남 4녀
신면 · 신변 · 신경 · 신최 · 신향
신혜순 · 신경강 · 신순강 · 신지강

생애 편집

12세에 정숙옹주와 결혼하여 동양위(東陽尉)에 봉해졌으며[2], 광해군 때 폐모론을 적극 반대하였다.[3] 1627년에 정숙옹주와 사별하였고[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에서 왕을 모시고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하였다. 주화파 대신들이 세자를 적에게 인질로 보내 화의를 맺자고 주장하자 칼로 위협까지 해가며 반대하였다. 후에 시론을 주도하였다는 이유로 김상헌·최명길 등과 함께 선양으로 잡혀갔으나[5], 후에 소현세자의 덕으로 무사하였다.[6] 효성이 지극하고 글과 글씨에 능했다. 저서로 《낙전당집》이 있다.

가족 관계 편집

각주 편집

  1. 《국역 국조인물고》 권63 노난시 입절 정토인(虜難時立節征討人) 피구인부(被拘人附) 신익성의 비명(碑銘)
  2. 《조선왕조실록》 선조 119권, 32년(1599 기해 / 명 만력(萬曆) 27년) 11월 26일(신미) 2번째기사
  3. 《조선왕조실록》 광해 124권, 10년(1618 무오 / 명 만력(萬曆) 46년) 2월 9일(기해) 7번째기사
  4. 《조선왕조실록》 인조 17권, 5년(1627 정묘 / 명 천계(天啓) 7년) 11월 6일(기사) 2번째기사
  5. 《조선왕조실록》 인조 43권, 20년(1642 임오 / 명 숭정(崇禎) 15년) 12월 11일(병자) 1번째기사
  6. 《조선왕조실록》 인조 44권, 21년(1643 계미 / 명 숭정(崇禎) 16년) 2월 11일(을해) 1번째기사
  7. 《유인 신씨 묘지(孺人申氏墓誌)》
  8. 정묘호란의 패전의 책임을 묻고 처형됨
  9. 구사맹의 외손자이자 인조의 이종 사촌동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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