쑹산 공습(중국어: 松山空襲), 또는 마츠야마 공습(일본어: 松山空襲)은 1938년 2월 23일 중일 전쟁 당시 중화민국 공군소비에트 자원군 폭격부대가 일본 제국 육군항공대가 운영하는 타이베이 쑹산 공항을 오전 11시 5분부터 오후 3시 42분까지 폭격한 공습을 가리킨다.[3] 당시 소련 공군은 중화민국 공군의 이름으로 공습에 참여했으며, 소련 공군의 전투기에는 중화민국 공군을 상징하는 청천백양의 문장이 그려져 있었다.[4] 공습을 주도한 인물은 소련 공군 조종사였던 파벨 리차고프였다.

쑹산 공습
중일 전쟁의 일부

쑹산 공습을 다룬 일본어 신문 대만일일신보(일본어판) 1938년 2월 23일자 1면.
날짜1938년 2월 23일
장소
결과 중화민국-소련 연합군의 공습 성공
교전국
일본 제국 일본 제국 중화민국 (1912년~1949년) 중화민국
소련 소련
지휘관
일본 제국 고바야시 세이조
일본 제국 스기야마 겐
일본 제국 히가시쿠니 나루히코
소련 파벨 리차고프
소련 표도르 폴리닌
군대
일본 제국 육군항공대 중화민국 (1912년~1949년) 중화민국 공군
소련 소비에트 자원군
병력
불명 폭격기 28대
피해 규모
중화민국-소련 측 기록: 항공기 40대 파괴[1]
일본 측 기록: 8명 사망, 25명 부상[2]
투폴레프 SB 2대 파괴

쑹산 공습은 중화민국 공군이 일본 제국에 직접적으로 가한 첫 공습이며, 일본이 점령하고 있던 대만을 연합국이 처음으로 폭격한 공격이기도 하다.

이름 편집

‘쑹산’(松山)은 타이베이의 지명으로, 지금의 쑹산구에 해당한다. 일본어로 읽으면 마쓰야마(まつやま)가 된다. 영어권에서는 타이베이를 일본어로 읽은 다이호쿠를 따라 타이호쿠 공습(Taihoku Air Strike)이라 부른다.

배경 편집

중일 전쟁이 발발한 후 일본군은 난징을 점령하고 국민정부는 우한으로 수도를 옮겼다. 1938년 2월 초, 우한에 주둔하고 있는 중화민국 공군사령부는 중요한 정보를 하나 발견하였는데, 일본 육군 항공대가 대만의 쑹산 비행장 부근에 지대한 군사기지를 건설하고, 지속 가능한 물자를 보충하여 일본군이 우한을 점령하는 것을 돕고, 이탈리아에서 입수한 피아트 BR.20 치코냐 폭격기를 조립하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중화민국 공군사령부는 이 정보를 소련의 지원 항공대에 공유하며, 쌍방이 협력하여 공동으로 비행기를 보내 쑹산을 기습할 수 있기를 희망하였다.[5]

계획 편집

1938년 2월 22일 소련 의용항공대 지휘관인 레차고프 소령과 정치위원인 리토프가 한커우에 도착했다. 이들은 당시 폭격기 대대장 표도르 폴리닌 대위가 부대를 이끌고 쑹산을 공습할 것을 지시했으며, 난창(南昌)에 주둔 중인 중국 폭격기 12대와 함께 이동해 회항할 때 푸저우(福州)에 착륙해 급유한 뒤 우한(武漢)으로 돌아갈 예정이었다.[5] 중화민국 공군과 소비에트 자원군의 원래 계획은 난창 공항을 거점으로 한 소련·중화민국 혼성 투폴레프 SB 폭격기 12대와 한커우 비행장을 거점으로 한 소비에트 자원군 SB폭격기 28대 등 2개 팀이 동시에 운용될 예정이었다.[5]

폭격 편집

1938년 2월 23일 당일, 난창 공항에 출발한 소련-중국 폭격부대가 조종사의 실수로 폭격 경로에서 벗어나 회항하였고,[4] 회항 중 폭격기 한 대가 실수로 호수면에 착륙해 승무원이 사망하는 결과를 낳았다.[6] 결국 이 작전은 한커우에서 출발한 폭격기 연대에서만 이뤄졌다. 폭격 범위가 호위 전투기의 이동 거리를 넘어서면서 폭격작전은 전투기 호위를 받지 않았고 조종사들은 연료 절약을 위해 산소 결핍과 저체온을 유발할 수 있는 고도 5,500m에서 비행하게 되었다.[7] 그러나 폭격기의 고고도 비행 덕분에 일본군의 경계를 받지도 않았고, 이로 인해 일본군 전투기가 출격하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공습작전은 거의 방해받지 않았다.[8] 폭격편대는 쑹산 공항에 폭탄을 투하한 후 푸저우 공항에서 급유를 받고 한커우로 돌아왔다.[8]

결과 편집

중화민국과 소련군은 280개의 폭탄이 투하되고 40대 이상의 전투기, 10동의 막사와 3개의 격납고가 파괴돼 많은 배가 침몰·파손됐으며 쑹산 공항은 완전히 마비 상태에 빠졌다고 추정했다.[9] 그러나 일본 육군은 내각에 피해가 경미하고[10] 피해를 입은 주민도 소수였다고 보고했다.[4]

러시아 전기 <러일전쟁 1904~1945>는 쑹산 공습이 국제사회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고, 일본 정부는 사건 이후 쑹산 공항 직원 대부분을 송치했고 쑹산 공항 사령관은 할복까지 했다고 기록했다.[11] 국립 성공 대학 연구자인 장싱진은 쑹산 공습은 어디까지나 상징적인 것으로 중화민국이 소련의 지원을 받아 이미 바다를 넘어 일본을 폭격할 수 있음을 일본군에 알리는 것이 주목적이었다고 말했다.[12]

이 폭격은 대만에서 처음 일어난 폭격이자 일본이 직면한 첫 공습이었기 때문에, 쑹산 공습 이후 대만은 전시체제에 들어가 대만의 방공 강화에 착수해 갔다.[5]

같이 보기 편집

각주 편집

  1. “敵機來襲!──中美盟軍轟炸臺灣的歷史全記錄”. 2016년 2월 26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22년 12월 3일에 확인함. 
  2. [1] Daily Capital News. February 24, 1938.
  3. 台灣軍司令部23日午後四時半發表,"臺北,新竹に—敵機來襲す—我戰鬥機直に擊退",臺灣日日新報/號外,臺灣日日新報社,臺北市,昭和13年(1938年)2月23日.
  4. 中時新聞網. “談國民黨掩蓋蘇聯空襲台灣 - 軍事”. 《中時新聞網》 (중국어). 2022년 12월 3일에 확인함. 
  5. “1938年 ソ連軍機が台湾の日本軍を攻撃し、長距離爆撃の記録を樹立。”. 新民晚報. 2019년 8월 12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22년 12월 3일에 확인함. 
  6. “蘇聯志願航空隊轟炸機部隊在中國(1937-1946)”. 空軍之翼. 2019년 8월 12일에 보존된 문서. 2013년 11월 25일에 확인함. 
  7. “Налёт на Тайвань”. 2017년 5월 18일에 보존된 문서. 2016년 2월 26일에 확인함. 
  8. “О налёте на Тайвань 23 февраля 1938 года”. 2021년 2월 23일에 보존된 문서. 2016년 2월 26일에 확인함. 
  9. “揭秘苏联援华航空队:轰炸台湾与日本本土(图)-中新网”. 《www.chinanews.com.cn》. 2022년 12월 3일에 확인함. 
  10. “写真週報 73号”. 《www.jacar.archives.go.jp》 (일본어). 国立公文書館アジア歴史史料センター. 1939년 7월 12일. 2022년 12월 3일에 확인함. 
  11. “被遺留的歷史─前蘇聯空軍曾轟炸台北松山機場 - 大紀元”. 《大紀元 www.epochtimes.com》 (중국어 정체). 2003년 2월 20일. 2022년 12월 3일에 확인함. 
  12. “烈焰與重生:臺灣大轟炸七十年紀念”. 2022년 12월 3일에 확인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