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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 이씨(陽山 李氏)는 한국의 성씨 중 하나이다.

이천일(李天一)을 원조(遠祖)로 하고 이백령(李栢齡)을 시조로 하며 이성(李晟)을 입향조로 하는 경상북도 영천 지역의 세거 성씨. 경상북도 영천시 화남면 사천리에 현재에도 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루며 세거하고 있다.

공주 이씨와 동원으로 양산 이씨는 공주 이씨의 31세 이백령에서 분파, 마찬가지로 수원 이씨는 공주 이씨의 34세 이자송에서 분파하여 세 성씨가 같은 동원이다.

주의*경상남도 양산시를 본관으로 하고 있는 같은 이름의 양산 이씨(梁山 李氏)와는 다른 성씨이다.

역사편집

  • 고려 충렬왕 때에 이백령(공주 이씨 31세)이 삼중문하찬성사(三重門下贊成事)를 지내고 왕명으로 중국에 갔을 때, 지은 시가 널리 회자되어 황제가 황금과 비단·말 등 상품을 하사하였으며, 귀국 후 임금이 위로하여 양산군(陽山君)에 봉하고 시호를 충민(忠敏)으로 하였다. 이로부터 양산을 본관으로 하고 이백령을 시조로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 15세(世) 이승수(李承須)는 중종(中宗) 때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대사헌(大司憲)에 이르고 시호가 충간(忠簡)인데 그의 손자 이성이 영천으로 입향하였다

분파편집

  • 공주 이씨와 동원으로 양산 이씨는 공주 이씨의 31세 이백령에서 분파, 마찬가지로 수원 이씨는 공주 이씨의 34세 이자송에서 분파하여 세 성씨가 같은 동원이다.
  • ‘공주이씨족보(公州李氏族譜)’를 보면 시조가 이천일(李天一)이어서 양산 이씨(陽山李氏)와 동원(同源)임이 드러나 있고, ‘기축보(己丑譜)’ 서문에도 “양산 이씨(陽山李氏)는 공주(公州), 수원(水原), 전의 이씨(全義李氏) 등과 동조동원(同祖同源)이다”라고 되어 있다. 그리고 양산 이씨(陽山李氏)는 30세 희안(希顔)이 송(宋)나라에 들어가 문과에 올라 정당문학(政堂文學)이 된 뒤 귀국해 고려 문종 때 중시(重試)에 장원하여 태상(太常)이라 시호(諡號)되었는데, 아들 3형제가 모두 과거에 급제하였다고 ‘기축보(己丑譜)’ 손록(孫錄)에 적혀 있다. 
  • 큰 아들 송령(松齡)의 현손(玄孫)대에 공주 이씨(公州李氏)와 수원 이씨(水原李氏)가 분관되었는데, 양산 이씨(陽山李氏)는 바로 31세 송령(松齡)의 아우 백령(栢齡)이 원(元)나라에서 세운 공으로 충민(忠敏)이라 시호(諡號)되고 양산군(陽山君)에 봉해짐으로써 양산 이씨(陽山李氏)의 관조(貫祖)가 되었다. 그리고 34세 교송(喬松)은 공주 이씨(公州李氏)로 분적(分籍)되었고, 아우 자송(子松)은 수원 이씨(水原李氏)의 시조가 되었다. 
  • 백령(栢齡)의 손자인 인의(仁義)도 양산군(陽山君)에 봉해진 사실이 ‘계유보(癸酉譜)’ 손록(孫錄)에 보이나 35대 이후 5세보(譜)가 실전(失傳)되어 소목(昭穆)이 뚜렷치 않다가 40세 당(棠)이 조선 태종조에 공조전서(工曹典書)에 오르고 아들 근(根)은 세종조에 이천현 감무(伊川縣監務)를 지냈으며, 손자 중손(仲孫)이 문종조에 안성군수(安城郡守)와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를 지냄으로써 양산 이씨(陽山李氏)의 중흥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아들 항무(恒茂)가 뛰어난 인물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그는 세조조에 호성원종공신(扈聖原從功臣)이 되었고 강계부사(江界府使)를 지냈으며, 양산군(陽山君)에 봉해짐으로써 양산 이씨(陽山李氏)의 중조(中祖)가 되었다.

입향 경위편집

  • 이성은 팔거리(八莒里)[현 칠곡군]에서 신녕현 동쪽 사천리[현 영천시 화남면 사천리]에 입향하게 되는데 입향 시기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입향한 동기는 부인 청주 양씨(淸州楊氏)의 증조부인 양효지(楊孝智)가 영천으로 입향하여 터전을 확실하게 다지던 시기이기에 처가 고향으로 이주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 ‘기축보(己丑譜)’에 보면, 선대의 세거의 터를 짐작하기 어렵고 29세 승경(承景)의 대부터 전북 남원(南原), 충남 공주(公州) 등지에 양산 이씨(陽山李氏)의 묘영(墓塋)이 있는 점으로 미루어 그곳에 살았다고 믿어진다. 그리고 34세 교위(喬違) 이하 5대가 실전(失傳)하였으나, 교위(喬違)가 충남 부여(扶餘)에 살기 시작했다고 나타나 있는 점으로 보아 일부 자손들은 한동안 이 지역에 터를 잡고 살았던 것 같다. 42세 중손(仲孫)의 대를 전후하여, 지금의 경북 칠곡(漆谷)으로 옮겨왔고, 중손(仲孫)의 5대손 성(晟)이 다시 지금은 경북 영천군(永川郡)에 속해 있는 신녕(新寧)의 사천(沙川)에 가 자리잡은 이래, 영천군(永川郡) 일원에 세거해 온 것으로 보인다.

과거 급제자편집

  • 입향 이후 인물을 향지(鄕誌)인 『영양지(永陽誌)』에서 살펴보면, 문과 급제 후 대사헌(大司憲)을 지낸 이승수, 훈련판관(訓練判官) 이득정(李得禎), 증(贈) 참판(參判) 이성, 첨정(僉正) 이시욱(李時郁), 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의 문인이며 수직으로 첨추(僉樞)인 이양욱(李暘郁)이 있다.

이승수(李承須), 1491 ~ 1550편집

  • 자는 자건(子健) 호는 만휴(晩休) 고려때 문하찬성(門下贊成) 이백령(李栢齡)이 공훈을 세워 양산군으로 봉해지고는 관향을 양산(陽山)으로 되었고, 1516년(중종11년)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헌까지 벼슬이 올라갔으나 자연을벗삼고 후진을 위해 글을 가르치며 한평생 임금의 은덕을 사모하는 시를 썼으나 여러번 겪은 난리통에 잃어 버리고시 몇수가 남아 있다.
  • 60살로 세상을 떠난 뒷날 명종임금께서 예조판서로 추증하고 충간(忠簡)이란 시호를 내렸다. 그를 추앙키 위해 화북면 사천동에 만휴정(晩休亭)을 1923년에 지음. 이후 화남면 사천리에 1964년에 만휴정(晩休亭)을 중건함.
  • 승수(承須)의 둘째 아들 수전(守全)은 자는 전지(全之)로 명종 때 음사(蔭仕)로 한성참군(漢城參軍)을 거쳐 안성군수(安城郡守)를 지냈으며, 그 후손으로 시욱(時郁)ㆍ동원(東元)ㆍ성춘(成春) 등이 환로(宦路)에서 명맥을 지켜낸 분들이다.

이성(李晟)편집

  • 이성(李晟)의 본관은 양산. 자는 일성(日成)이다. 고조는 강계부사(江界府使)를 지내고 양산군(陽山君)에 봉해진 이항무(李恒茂)이며, 증조는 진사(進士) 이강(李絳), 조부는 대사헌(大司憲)으로 시호가 충간(忠簡)인 이승수(李承須)이다.
  • 부친은 안성군수(安城郡守) 이수전(李守全)이며, 모친은 영인(令人) 진주 강씨(晋州 姜氏)로 진사(進士) 강중묵(姜仲默)의 딸이다. 처는 숙부인(淑夫人) 청주 양씨(淸州 楊氏)로 양희택(楊希澤)의 딸로, 슬하에 두 아들 증(贈) 공조참판(工曹參判) 이영번(李英蕃)과 이영란(李英蘭)이 있다.
  • 이성은 1545년(명종 원년) 4월 1일 팔거리(八莒里)[현 경상북도 칠곡군]에서 태어났으며, 팔거리에서 신녕현(新寧縣) 동쪽 사천리(沙川里)[현 영천시 화남면 사천리]로 입향하였다. 1590년(선조 23) 6월 1일 4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으며, 효종(孝宗) 때에 형조참의(刑曹參議)를 증직 받았다.

관련 유적편집

  • 경상북도 영천시 화남면 사천리에 시조인 이백령의 기적비와 시조 이백령 이하 19세(世)의 양산 이씨 모선제단(陽山李氏慕先祭壇), 이승수의 만휴정(晩休亭)과 기적비, 장학소(獎學所), 사천리 가묘 등이 남아 있다.

참고 자료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