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조 (조위)
생애
편집238년(경초 2년), 태위 사마의가 공손연을 토벌하고자 보병과 기병 4만 명으로 진격해왔다. 양조와 비연은 요수현(遼隧縣, 遼隊縣)에 해자 등의 장애물을 20여 리[1]에 걸쳐 설치해놓고 수만 명으로 맞섰다. 그러자 사마의는 동남쪽 방향으로 수비망을 뚫으려 하였다. 이에 신경을 쏟았는데 사실은 사마의의 작전에 속은 것으로 위나라군은 북쪽으로 우회하여 강을 건너고 일부 병력만을 대치시킨 채 그대로 양평(襄平)을 향해 내달렸다. 양평현은 요동태수 공손연의 거점이었다. 양조 등은 애써 구축한 진지를 버리고 급히 사력을 다해 사마의를 공격했지만 수산(首山)도 뚫리고 양평이 포위당하고 말았다. 공성이 시작되어 토산, 땅굴, 누거(樓車), 발석거, 연노 등으로부터 연일 돌과 화살이 빗발쳤다. 성엔 식량이 바닥나 인육을 먹어야 했고, 죽은 자도 매우 많았다. 결국 양조는 공손연에게서 이탈하여 위나라에 투항하였다. 이후의 행적은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
삼국지연의
편집사서가 아닌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도 사마의를 막으러 요수현으로 나아가 해자와 녹각(鹿角) 등 장애물을 깔아두고 맞서는데 병력은 8만 명으로 설정하였다. 양조와 비연은 지키고만 있다가 위군의 식량과 꼴이 다하여 퇴각할 때 습격할 생각이었지만 사마의는 이를 우회하여 곧장 양평으로 향한다. 양조 등도 양평으로 철수하는데 중간에 하후패와 하후위의 복병을 만나 고생한다. 이후 등장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