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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순천 사건'[3]1948년 10월 19일부터 10월 27일까지 당시 전라남도 여수시에 주둔하고 있던 14연대의 군인 2,000여 명이 중위 김지회, 상사 지창수 등을 중심으로 제주 4·3 사건 진압출동을 거부하고 대한민국 단독정부를 저지하려고 무장봉기하여 반란을 일으킨 사건이다.

여순 사건
교전국

대한민국 대한민국 제1공화국

대한민국14연대
지휘관
이승만
송호성
원용덕
김백일
백선엽
정일권
백인엽
송석하
김창룡
김지회 
지창수 
병력
최소 약 1만 2,000여 명 이상[1] 약 2,000여 명
피해 규모
군인 약 180명
경찰 74명
최소 1만 명 이상의 시민 사망.[2]
민간인(경찰 제외)
대략 3,384명(행방불명 825명 포함)

목차

명칭편집

‘여순사건’의 현재 공식 명칭은 ‘여수,순천 10.19사건’이다. 그동안 ‘여수 14연대 반란사건’, ‘여수군란’, ‘여순반란사건’, ‘여순항쟁’ 등으로 불렸지만 전남도와 여수시가 제정한 조례로 공식 명칭이 정해졌으며, 올해 ‘여순사건 70주년 기념 추모사업 시민추진위원회’도 갈등의 여지가 있는 항쟁이나 반란 대신 ‘여순 10.19사건’, ‘여순사건’을 명칭으로 쓰기로 의견을 모았다.[4]

이승만 정부 수립 2개월 만에 일어난 이 사건을 계기로 국가보안법을 제정하고 강력한 반공국가를 구축하였다.[5][6][7]

사건의 진행편집

배경편집

1945년 8월 15일 이후 미군정은 관리직으로 일제시대 때 관리들을 재임용하였다. 경찰 또한 일제순사들이 재임용되어 일반인들은 적대감을 갖지 않을수 없는 상황이다. 1948년 국방경비대(대한민국 국군의 전신)는 모병제였고, 여수 또한 그 지역민들이 군인을 지원하였다. 입대 시 신원조회를 하는 지금과 달리 신원조회가 허술했기 때문에 경찰의 탄압을 받았던 좌익계열과 친일 지주에 반감을 품은 소작농, 빈곤 노동자의 자식들이 신분상의 보호를 받기 위해 입대하는 경우도 있었다. 건군 초기 미 군정은 군인이 정치적 견해를 갖는 것에 대해서도 전혀 제재를 가하지 않고, 완전한 사상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었다. 남로당에서 을 장악하기 위해 일부러 위장입대시킨 요원들도 있었는데, 이들은 군내에서 많은 동조자를 포섭했다. 여기에 당시 군과 경찰은 국가주도권을 놓고 무장충돌을 벌일 정도로 매우 관계가 좋지 않았다.

이 사건은 당시 여수에 주둔 중이었던 국방경비대 제14연대를 제주 4·3 사건 진압에 1개 대대 규모의 군인들을 파견하기로 한 것이 발단이 되었다. 제주에서 잔인무도한 민족상잔의 제주진압에 항거한 김익렬중령이 여수 제14연대로 전출되면서 제14연대는 제주 상황을 더욱 명확히 알게 된 시점이고, 일제에 부역한 무리들이 경찰이 된 상황에서 경찰들의 만행으로 여수전남지역은 군과 경찰의 대립이 팽팽하였다.

경과편집

1948년 10월 19일, 14연대 지창수 상사가 외쳤다. “지금 여수 경찰이 쳐들어 왔다!”

여수에서 군인의 봉기가 시작됐다. 제주도에서 발발한 ‘4.3사건’. 양민토벌을 반대한 14연대 군인들의 저항 성격이었다. 하지만 국가는 처음으로 대규모 양민을 학살했다. 그리고 이승만 정부는 국가보안법을 제정했다. 국가가 70년째 빨갱이를 구분하는 잣대를 들이밀기 시작한 것이다.

여순사건 70년, 여순사건을 군대 내 남로당을 중심으로 한 좌익폭동으로 지금까지 알려져 왔다. 하지만 여러 학자의 분석은 지금까지 정부의 평가와 달랐음을 보여준다.

여순사건, 한반도 분단과 일제 미청산 역사의 축소판

대다수 학자의 분석을 종합하면, 여순사건의 발생 배경은 해방정국의 복잡한 당시 상황과 맞물려 있다.

먼저, 1948년 5월 10일 남한 단독선거로 대표되는 단선단정을 통한 한반도 분단 고착화가 대표적이다.해방 이후 분단을 꿈에도 꾸지 못한 국민에게 이승만 정부의 단선단정은 용납되지 않았다.

김구를 중심으로 정치적으로 반대하는 세력이 있던 한편, 남로당은 행동으로 이승만 세력에 저항하며 단선단정에 반대했다. 이러한 남로당 계열이 군대 내에도 존재했던 것이 사실이다.

여순지방에서도 5.10선거 반대투쟁이 있었다. 여수 지방 종고산, 구봉산, 미래산, 예암산 등에서 단선 반대 봉화가 올랐고, 전남 13개 학교가 동맹휴학을 했는데, 여기에 여수가 3개 학교로 가장 많았다.

이는 제주토벌을 위해 모인 14연대에도 영향을 미쳤다. ‘제주토벌 출동거부 병사위원회’가 발표한 ‘애국인민에게 호소함’에는 “이승만 괴뢰, 김성수.이범석 도당들은 미 제국주의에 발붙이기 위해 조국을 파는 것과 마찬가지인 분단정권을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정치적으로 한반도 분단이 굳어지던 시기, 해방 후 청산되지 않은 친일문제도 여순사건의 한 배경이었다. 동족을 억압하고 수탈하며 일제의 군국주의 협력자였던 당시 경찰이 해방 후 미 군정과 이승만의 묵인 하에 다시 경찰 제복을 입고 등장한 것.

당시 김옥주 국회의원은 “군정 3년 동안 행정 부패와 폭압행위를 저지른 경찰에 대한 원한이 민중의 뇌 속에 침투했던 것이 여순사건의 최대 원인”이라고 주장했을 정도. 미 대사관도 여순사건 당시 공산주의자와 경찰 중 어느 쪽이 더 나쁜지 모르겠다고 보고하기도 했다.

이는 당시 친일파 출신 경찰과 국방경비대 간의 반목에서도 드러난다. 전남지역의 경우, 1947년 4월과 6월 광주에서 경찰과 경비대의 충돌이 있었다. 여순사건이 발생하기 전 9월 구례에서 경찰과 경비대 충돌사건이 벌어졌다.

14연대 지창수 상사의 “지금 여수 경찰이 쳐들어왔다”는 외침이 경비대를 자극했고, 경찰과 충돌해 여순사건으로 확대됐다는 게 중론이다.

여기에 제주도에 대한 당시 지역 민심도 여순사건의 배경이 됐다. 당시 14연대는 여수지역에 창설된 향토경비대였다. 1946년 8월 제주도가 전남에서 분리됐지만, 제주도와 전남은 같은 고향이라는 인식이 있었다고 한다.

그렇기에 제주4.3사건이 동족상잔이라는 인식이 퍼졌던 당시 여론에 14연대는 더 자극받을 수밖에 없던 것. 제주도 파병을 반대한다는 명분은 경찰과의 충돌로 표출되었다.

물론, 14연대 내 좌익의 활동도 무관하지 않다. 1948년 6월 제주도 제9연대장 박진경 대령 암살사건 이후 전국에는 사상검열과 숙군이 진행됐다. 정부 수립 후에는 숙군 바람이 불었고, 14연대 창설 요원이자 본부중대 하사관이 10월 11일 체포되자, 14연대 남로당 조직은 제주도 파병에 앞서 무장 반란계획을 수립.실행했다.

국가, 양민 학살의 역사를 열다편집

27일 일단락지을 줄 알았던 여순사건은 다른 양상으로 번졌다. 간도특설대 출신 진압군들이 양민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이른바 부역자를 대상으로 한 즉결심판이 자행된 것이다.

일제 당시 항일빨치산을 토벌하기 위해 만든 ‘잠정징치도비법(暫定懲治盜匪法)’ 중 군대 사령관이나 고급 경찰관이 토벌 시 사태가 급박할 때는 자신들의 재량에 의해 ‘임진격살(臨陣格殺)’할 수 있도록 한 법이 여순사건에서 재현된 것. 더 심각한 문제는 이런 일이 양민에게 적용됐다는 점이다.

진압군이 순천에 들어온 23일 순천 읍민들은 순천북국민학교에 집합했다. 26일 이미 빠진 14연대 대신 여수에는 소수 반군과 남녀 중학생이 저항했는데, 주민들은 공설운동장, 종신국민학교 등 다섯 군데로 끌려갔다.

심사요원들이 ‘저 사람’이라고 손가락질 받은 이를 교사 뒤에 파놓은 구덩이 앞으로 끌고 가 즉결처분했다. 김종원은 일본도를 휘두르며 양민들을 살해했다. 종신국민학교에서 처형된 시신은 만성리 굴 너머에서 불태워졌다. 이는 여수와 순천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보성, 구례 등지에서도 양민학살이 자행됐다.

순천에서 당시 상황을 목격한 유건호 <조선일보> 기자는 이렇게 적었다.

“주로 청년들만 모아놓은 곳이 있는 하면, 남녀 학생들만 모인 곳, 또 팬츠만 입고 벌벌 떨고 있는 벌거숭이 집단도 있다. 경찰대가 구분해놓은 것이다. 심사 중인 그룹 앞에는 경찰관에게 끌려 나온 사람이 충혈된 눈으로 이 얼굴 저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면서 누군가를 찾고 있고, 웅크리고 앉아서 떨고 있는 사람들은 고개를 숙인 채 그 시선을 피하려고 무진 애를 쓰고 있다. 얼굴을 들었다가 그와 시선이 마주쳐서 ‘저놈이다’ 손가락이 가리키기만 하면 끝장이 나는 것이다. 이것이 정확한 정황파악도 제대로 못 한 채 천신만고 사건 현장에 도착한 기자의 눈앞에 전개된 첫 광경이었다.”

여수지역사회연구소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여수 5천 명, 순천 2천2백 명, 보성 4백 명, 고흥 2백 명, 광양 1천3백 명, 구례 8백 명, 곡성 1백 명 등 총 1만 명이 학살됐는데, 이 중 95%가 진압군에 의해 자행됐다. 지방 좌익과 빨치산 등에 의해 학살된 이는 5백여 명으로 추산된다.

진압군의 양민학살은 과연 국가와 무관한 일이었을까. 22일 현지 사령관에 의한 계엄령이 내려졌다. ‘본관에게 부여된 권한’이라는 표현이 있지만, 계엄사령관이 누구인지도 명시되지 않고, 누가 권한을 부여했는지 명확하지 않다. 근거도 없이 사형을 처할 수 있도록 한 자의적 조치였던 것.

배후에는 이승만 정부가 있었다. 당시에는 계엄법이 제정도 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국무회의가 계엄법을 제정하고 의결했는데, 당시 법상 국무위원회는 법률안을 국회에 제출할 수만 있을 뿐, 제정 권한은 없었기 때문에, 여순사건 당시 내려진 계엄령은 위헌이었다.

이승만도 22일 “계엄령을 내렸다고 외국에서 전보가 들어오고 있는데, 사령관이 내린 것은 해당 지구에만 내린 것”이라고 말해 사실상 계엄령 선포를 정부는 묵인한 것이다.

(진압군의 양민학살은 과연 국가와 무관한 일이 아니라고 볼 수 있다.) 22일 현지 사령관에 의한 계엄령이 내려졌다. ‘본관에게 부여된 권한’이라는 표현이 있지만, 계엄사령관이 누구인지도 명시되지 않고, 누가 권한을 부여했는지 명확하지 않다. 근거도 없이 사형을 처할 수 있도록 한 자의적 조치였던 것.

추후 여파편집

여순사건, 국가보안법을 만들다

현재 집계 결과 (2018년) 1만 명의 양민이 학살된 여순사건은 학살에서만 그치지 않았다. 이승만 정부는 여순사건 배후로 단선단정을 반대하던 김구 세력을 지목했다. 김구를 좌익으로 몰아 정치적으로 거세하려고 했던 것.

그러나 김구가 자신의 배후설에 반발하자, 이승만 정부는 남로당으로 눈을 돌렸다. 그리고 빨갱이 색출을 위한 법안 마련에 주력했다.

여순사건이 마무리되던 27일 한민당을 중심으로 국회 법사위원회에서 진전이 없던 ‘내란행위특별조치법’ 동의안이 통과됐다. 그리고 11월 9일 본회의에 법안이 제출됐다. 기존 내란죄와 명칭이 중복된다는 이유로 ‘국가보안법’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여순사건을 계기로 밀어 붙여진 ‘국가보안법’의 위력을 이승만을 알고 있었다. 군에 의한 양민학살이 진행 중이던 11월 5일 이승만은 담화를 통해, “남녀 아동까지라도 일일이 조사해서 불순분자는 다 제거하라”며 “앞으로 어떠한 법령이 혹 발포되더라도 민중이 절대복종하라”고 밝혔다. ‘어떠한 법령’은 ‘국가보안법’을 의미했다.

70년 전 일어난 여순사건은 국가에 의한 빨갱이 색출의 시작이었다. 여순사건으로 시작된 양민학살은 ‘빨갱이’ 처단이라는 명분으로 자행됐고, 제주 4.3사건 양민학살로 이어져 한국전쟁 당시 양민학살로 확대됐다.

그리고 여순사건으로 만들어진 ‘국가보안법’은 법의 이름으로 국가가 국민을 ‘빨갱이’와 ‘빨갱이’가 아닌 자로 구분하는 잣대가 됐다. 그리고 ‘국가보안법’으로 형장의 이슬로 수많은 이들이 사라졌다.

‘빨갱이’ 처단 역사의 시작이었다는 점에서 아직도 여순사건은 금기어이기도 하다. 70년 전 벌어진 여순사건은 아직 살아있는 역사이다.[8]

여순사건, 8일간의 전쟁편집

이러한 배경 속에서 10월 19일 지창수의 외침이 있자, 14연대 2천여 명의 병사들이 미제 M-1소총과 칼빈 소총 등을 들고 여수 시내로 향했다. 20일 이들 중 주력 부대는 오전 순천으로 향했고, 순천역에서 홍순석 중위가 지휘하던 14연대 2개 중대가 여기에 가담했다. 같은 날 오전 광주에서 파견된 제4연대 1개 중대도 합류했다.

여순사건이 발생하자, 20일 정부와 주한미군은 비상회의를 열고 송호성을 사령관으로 한 토벌사령부를 설치했다. 그리고 이범석 국무총리는 22일 ‘반란군에 고한다’라는 포고문을 발표, “14연대의 봉기가 반란이니 국법이 도저히 용서할 수 없으면 총살당하지 않으려면 즉시 투항하라”고 요구했다.

21일 로버츠 임시군사고문단 단장은 송호성에게 명령을 보내, “정치적, 전략적으로 여수와 순천이 중요하기 때문에 가능한 빠른 시일 안에 탈환해야 한다”고 압박했다.

이에 전주 3연대 2개 대대, 광주 4연대 3개 대대, 대구 6연대 1개 대대, 군산 12연대 3개 대대, 마산 15연대 1개 대대 등 육군 5개 연대와 비행대, 수색대대로 진압부대가 편성됐다. 그러다 반군의 대응이 거세자 22일 제5연대가 추가 배치됐고, 해군 함정이 여수 해안가로 접근하고 육군 항공대 비행대가 전남지역으로 출동했다.

당시 38선을 경계하던 부대와 제주도 주둔 부대와 제14연대를 제외하고 총 10개 연대 중 7개 연대가 진압부대로 편성된 것.

초기 진압에 실패한 진압부대는 22일 순천을 시작으로 24일 보성, 벌교에 진입하고 동시에 하동과 순천으로부터 광양을 향해 진격했다. 여수를 중심으로 육지와 바다에서 포위망을 구축한 것이다. 그러다 26일 진압군은 여수에 들어갔고 27일 여수를 완전히 점거하면서 여순사건을 일단락 짓는 듯했다.

진압군의 면면은 일제 당시 독립군을 토벌하던 만주군 출신이 대부분이었다. 김백일, 송석하, 최남근(남로당 스파이), 백선엽, 정일권 등은 모두 조선인 항일빨치산을 토벌하던 간도특설대 출신. 이들이 많은 토벌작전을 경험했다는 점에서 여순사건 진압작전에 투입됐다.

21일 이후 정부의 진압작전이 거세지자, 반군은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이른바 ‘구빨치산’ 활동이 시작된 것. 일부는 여순사건이 마무리되는 시점에 백운산으로 들어가기도 했다.[9]

14연대의 반란과 이승만의 진압편집

  • 1948년 10월 19일 : 여수에 주둔 중이었던 국방경비대 14연대의 군인들은 "제주도토벌출동거부병사위원회"라는 이름으로 "애국인민에게 고함"에서 1. 동족상잔 결사반대, 2. 미군즉시철퇴를 주장하였다. 그리고 그 당시 전남지역 경찰들의 만행을 응징하였다. 여수경찰서장과 사찰계 직원 10명, 한민당 여수지부장, 대동청년단 여수지구위원장, 경찰서후원회장 등 70여 명을 살해했고, 여수를 점령한 후 순천시로 이동해 중위 홍순석이 지휘하는 14연대 2개 중대 병력과 함께 순천을 장악하였다.
  • 10월 21일 : 14연대는 벌교, 보성, 고흥, 광양, 구례를 거쳐 10월 22일에는 곡성까지 점령하였다. 10월 21일 여수, 순천 지역에 계엄령선포(그 당시는 계엄령선포를 할 법적 근거가 없는 시기였음)를 하고, 송호성 준장을 총사령관에 임명해 10개 대대 병력을 이끌게 하고는 진압을 명령하였다. 이승만 정부는 군대가 빨갱이에 점령됐다며 "빨갱이는 인간이 아니다! " 주장하고, "이승만 대통령 포고문"에서 ".....남녀아동이라도 일일이 조사해서 불순분자를 제거하고...." 라고 함.
  • 10월 22일 : 진압군이 오후 3시에 순천 공격을 시작하였다. 반란군의 주력은 광양 및 인근 산악지대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 10월 23일 : 진압군이 오전에 순천을 장악하였다. 진압군은 순천 장악 직후 일사천리로 광양 일대의 반란군 주력을 섬멸하고, 여수를 탈환하기 위한 2단계 작전에 들어갔다. 하지만 반란군은 여수의 입구인 미평 근처에 매복, 진압군을 습격했다. 이로 인해 사령관 송호성 준장이 철모에 총을 맞고 장갑차에서 떨어져 고막이 터지고 허리부상을 입었다. 이 와중에 반란군의 주력이 백운산지리산으로 도망쳤다.
  • 10월 25일: 진압군의 여수 시내에 대한 박격포 사격을 시작으로 시가전이 이틀 동안 계속되었다.
  • 10월 27일: 진압군이 여수를 완전히 장악하였다.
  • 이승만 진압군은 빨갱이를 소탕한다는 명목하에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소위 "손가락 총"으로 근거없는 즉결심판으로 무자비하게 여수 순천지역의 수 천명을 사살하였다.[10][11][12]

극우 연루설 유포편집

여순 사건 직후, 이승만 정부는 극우 세력[13] 일부가 이 반란에 동조했다는 주장을 유포하고, 내무부는 경찰국에 수사를 지시하였다. 당시 국무총리국방장관이었던 이범석10월 21일 기자회견에서 "이 사건은 정권욕에 눈이 먼 몰락 극우정객이 공산당과 결탁해 벌인 정치적 음모"라며 사실상 김구를 지목했다.[14]

이번 국군이 일으킨 반란의 주요 원인과 폭동 성질은 수식 전에 공산주의자가 극우의 정객들과 결탁해서 반국가적 반란을 일으키자는 책동이었다.[15]

— 서울신문 (1948년 10월 22일 기사)

10월 21일 오전 11시, 이범석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여순사건을 '공산주의자가 극우 정객들과 결탁해 일으킨 반국가적 반란'이라고 규정하고,[15][16] 국군 내의 '주모자는 여수 연대장이었던 오동기(吳東起)'라고 지목했다.[16]

10월 22일, 이범석은 '반란군에 고한다'는 제목의 포고문에서 '반란군이 일부 그릇된 공산주의자와 음모 정치가의 모략적 이상물이 되었다'(서울신문 1948. 10. 24)면서 '극우정객'을 재차 언급하였다.[15] 같은 날 김태선 수도경찰청장도 장단을 맞추었다. 같은 해 10월 1일 발생했던 '혁명 의용군 사건'에 대한 수사발표를 통해 여론몰이를 거들고 나선 것이다. 이범석, 김태선 등이 자기를 여순사건의 배후에 있는 극우파로 지목하자 김구는 분개하였다.

10월 27일, 김구는 여순사건 진압 직후 공식 기자회견을 열어 "극우분자가 금번 반란에 참여했다는 말을 이해할 수 없다"며 반박하였고, 그의 반박문이 조선일보를 통해 보도되었다.[14]

나는 극우분자가 금번 반란에 참여했다는 말을 이해할 수 없다. 그들은 극우라는 용어에 관하여 다른 해석을 내리는 자신만의 사전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 한성일보 (1948년 10월 28일 기사)

급히 열린 임시국회에서 국회의원 정광호는 극우가 참가했다는 국방부 장관의 발표 때문에 민심이 나쁘다며 극우가 참가했다는 발표에는 정정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윤치영은 극우가 참가한 것만은 사실이라고 계속 주장했다.[17]

김구는 여순 사건을 반란, 테러로 규정했다. 10월 28일의 공개 담화에서 김구는 '순진한 청년들이 용서할 수 없는 죄를 범하였으며', '반도(叛徒, 공산주의자)들의 목적은 북한 정권을 남한에 연장시키는 것'으로 보인다고 규정했다.[18] 10월 30일 담화에서는 여수, 순천 등지의 반란을 '집단 테러 활동'으로 규정하고, "부녀와 유아까지 참살하였다는 보도를 들을 때에 그 야만적 소행에 몸서리쳐지지 않을 수 없다"고 발표하였다.[19]

우리는 일찍부터 폭력으로써 살인·방화·약탈 등 테러를 행하는 것을 배격하자고 주장하였다. 금번 여수·순천 등지의 반란은 대규모적 집단테러 행동인 바, 부녀 유아까지 참살하였다는 보도를 들을 때에 그 야만적 소행에 몸서리 처지지 아니할 수 없다. 멀리서 듣고도 그러하니 현지에서 목격하는 자는 비참 격앙함이 그 극에 달할 것이다. 남과 남의 부모처자를 살해하면, 남도 나의 부모처자를 살해하기 쉬우니 그 결과는 첫째, 우리 동족이 수없이 죽을 것이오 둘째, 외군에게 계속 주둔하는 구실을 줄 뿐이다. 이것은 우리의 자주독립을 좀먹는 행동이니 이로써 우리는 망국노의 치욕을 면하는 날이 없을 것이니, 반란을 일으킨 군인과 군중은 이 때에 있어서 마땅히 여동(勵動)된 감정을 억제하고 재삼숙고하여 용감히 회오(悔悟)하고 정궤(正軌)로 돌아갈 것이어니와 현명한 동포들도 마땅히 객관적 입장에서 그 반란을 냉정히 비판하면서 이것의 만연을 공동방지할지언정 허무한 유언에 유혹되거나 혹은 이에 부화뇌동하지 아니하여야 할 것이다.

여러분의 기대와 탁부(託付)와 애국의 만분의 일도 보답하지 못하는 나로서 무슨 면목으로 여러분께 왈가왈부를 말하랴마는 금번 반란이 너무도 중대하므로 인하여 국가 민족에 미치는 손해가 또한 중대한 까닭에 그대로 함구만 할 수 없어서 피눈물로써 이와 같이 하소연하는 바이다.

동지 동포는 우리의 고충을 깊이 양해하고 동족상잔에서 동족상애의 길로 공동매진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 서울신문 (1948년 10월 30일 기사)

결과편집

진압군과 경찰은 여수, 순천전라남도 동부 지역에서 민간인들을 대상으로 대대적인 반란군 협조자 색출 작업을 벌였고, 이 과정에서 여수 14연대 2천 2백여 명의 병사와 1만 3천여 명의 남녀노소 민간인은 잔인하게 학살당했다.[20] 중요한 것은 14연대는 그 지역민들이 지원한 군인이고, 진압군이 여수, 순천을 불바다로 만들때 14연대는 거기에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민간인을 협조자 색출작업이라는 명목으로 잔인부도한 학살을 했다는 것이다. 14연대는 억울한 제주43의 희생을 막고자 항거한 것으로 , 여순항쟁은 여수 등 4번의 전투에서 군민일치로 육해공군을 물리치고, 버텼지만 함포사격을 동반한 미국과 이승만 정권의 압도적인 진압 무력에 지리산으로, 백운산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21]

이승만 정부는 이 사건을 계기로 강력한 반공체제를 구축하였다. 군 내부적으로는 공산주의자들을 숙청하는 '숙군작업'을 벌이는 한편, 1948년 12월 1일에는 국가보안법을 제정하여 사회 전반에 걸쳐 극좌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색출·처벌에 나섰다.[22][23]

여순사건 이후 서수(序數) '4'는 대한민국 국군의 독립 부대명에 들어가지 않게 되었다. 14연대는 없어졌고, 4연대는 20연대로 재편되었다.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1. [1] 전주 3연대 2개 대대, 광주 4연대 3개 대대, 대구 6연대 1개 대대, 군산 12연대 3개 대대, 마산 15연대 1개 대대 등 육군 5개 연대와 비행대, 수색대대로 진압부대가 편성됐다. 그러다 반군의 대응이 거세자 22일 제5연대가 추가 배치됐고, 해군 함정이 여수 해안가로 접근하고 육군 항공대 비행대가 전남지역으로 출동했다. 당시 38선을 경계하던 부대와 제주도 주둔 부대와 제14연대를 제외하고 총 10개 연대 중 7개 연대가 진압부대로 편성된 것. 통일뉴스 2018.10.19
  2. [2] 여수지역사회연구소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여수 5천 명, 순천 2천2백 명, 보성 4백 명, 고흥 2백 명, 광양 1천3백 명, 구례 8백 명, 곡성 1백 명 등 총 1만 명이 학살됐는데, 이 중 95%가 진압군에 의해 자행됐다. 지방 좌익과 빨치산 등에 의해 학살된 이는 5백여 명으로 추산된다. 통일뉴스 2018.10.19
  3. [3] 사건 발생 당시 정부는 이 사건을 여순반란사건 또는 전남반란사건이라고 불렀으나 1995년부터 국사 교과서에 '여수·순천 10·19사건'이라고 명명하였으며, 일반적으로는 여순사건이라 부른다. 오마이뉴스 2017.10.20
  4. [4] ‘여순사건’의 현재 공식 명칭은 ‘여수,순천 10.19사건’이다. 그동안 ‘여수 14연대 반란사건’, ‘여수군란’, ‘여순반란사건’, ‘여순항쟁’ 등으로 불렸지만 전남도와 여수시가 제정한 조례로 공식 명칭이 정해졌으며, 올해 ‘여순사건 70주년 기념 추모사업 시민추진위원회’도 갈등의 여지가 있는 항쟁이나 반란 대신 ‘여순 10.19사건’, ‘여순사건’을 명칭으로 쓰기로 의견을 모았다. 가톨릭 뉴스 2018.10.16
  5. 여순항쟁 양민 사망자 대부분 진압군에 희생 한겨레신문, 1999.10.20.
    원문 : "반란군에 의해서는 90~150명이 희생"
  6. 여수지역 여순항쟁 희생자 124명 연합뉴스, 2010.10.11.
    원문 : "진실화해위는 이번 조사에서 1948년 10월 말부터 이듬해 8월까지 여수 일대에서 국군과 경찰에 의해 민간인 124명이 불법적으로 집단 학살됐으며, 이 중 91.9%가 10대에서 30대 청년 남성인 것을 확인했다. … 다만, 1948년 11월 전남도 보건 후생당국의 피해조사로는 전남 동부지역 6개 시군에서 2천633명이 사망하고 825명이 행방불명됐다."
  7. 여순 60년에 위령탑 하나 없으니 경향신문, 2008.10.21.
    원문 : "여순사건은 해방정국에서 좌익과 우익의 대결이 빚어낸 비극이자 대참사였다. 말이 좌·우익의 대결이지 기실 양민들이 무차별 학살당했다. 희생자가 1만명(시민단체 추정)에 이른다."
  8. [5] 2018.10.19
  9. [6] 통일뉴스 2018.10.19
  10. [7] 통일뉴스 2018.10.19
  11. [8] 광주일보 2018. 09. 05
  12. [9] 한겨레21-극우반공국가의 탄생 2018. 03. 21
  13. 당시에는 '극우'가 오늘날처럼 반공주의자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민족주의자, 즉 김구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14. <볼록거울> 국가보안법 제정 60돌[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연합뉴스 2008년 8월 29일자
  15. 김구, 여순반란 '수괴' 될 뻔했다 - 오마이뉴스 2001년 10월 26일자
  16. 서울신문 1948년 10월 22일자
  17. 국회속기록 제1회 90호 (대한민국 국회, 1948) 678~679
  18. 한성일보 1948년 10월 28일자
  19. 서울신문 1948년 10월 30일
  20. [10] 2018.10.19
  21. [11] 2018.10.19
  22. “그때 오늘 '재일 조선인' 북송사업이 시작되다”. 중앙일보. 2010년 8월 13일. 2010년 12월 18일에 확인함. [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23. 박정희는 이 사건에 직접적으로 가담한 것은 아니었지만, 남로당의 군사총책 간부였다. 당시 소령이었던 박정희는 1948년 11월에 체포된 후 군사재판에서 사형이 구형되었으나, 자기가 가지고 있던 군부 내 남로당원 명단을 넘기는 등 수사에 적극 협조한 사정이 참작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1949년 1월 18일 박정희는 군사재판 2심(고등군법회의)에서 "징역 10년으로 감형하고, 형의 집행을 정지한다"는 판결을 받고 풀려나 강제 예편을 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