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산 신씨

영산 신씨(靈山 辛氏)는 경상남도 창녕군 영산면을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영산 신씨 (靈山 辛氏)
영월 신씨 (寧越 辛氏)
관향경상남도 창녕군 영산면
강원도 영월군
시조신경 (辛鏡)
집성촌경상남도 창녕군 도천면
경상남도 창녕군 영산면
경상남도 창녕군 계성면
경상남도 거제시 하청면
경기도 양평군 강상면 송학리
경기도 여주군 대신면 후포리
함경남도 이원군 차호읍 포항리
충청북도 증평군 증평읍 남차리
충청남도 금산군 제원면 수당리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동중리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모서리
경상북도 김천시 아포면
주요 인물신천, 신돈, 신예, 신부, 신빈 신씨, 신유정, 신인손, 신윤, 신석조, 신영희, 신응시, 신경행, 신경진, 신초, 신계영, 소원 신씨, 신석정, 신격호, 신상우, 신춘호, 신준호, 신동주, 신동빈, 신재기, 신건, 신학용, 신기남, 신경민, 신경림, 신정훈
인구(2015년)200,000명

역사편집

영산 신씨(靈山 辛氏) 시조 신경(辛鏡)은 중국 8학사의 한 사람으로 고려에 동래했다고 전해지며 1138년(인종 16년) 문과에 급제하고 금자광록대부(金紫光錄大夫)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이르렀으며, 정의(貞懿)라는 시호(諡號)를 받았다고 한다. 지금의 경상남도 창녕군 영산면에 있는 영취산(靈鷲山)에 살았다고 전해진다. 역사학자들은 다산 정약용이 언급한 것처럼 영산 신씨((靈山 辛氏)도 다른 많은 한반도 성씨들과 같이 한반도 토착민이 모화사상(模華思想)으로 중국 성씨를 빌려 쓴 것으로 보고 있다.조선시대에 53명의 문과 급제자와 7명의 공신을 배출하였다.

본관편집

영산(靈山)은 경상남도 창녕군 영산면이다. 본래 신라의 서화현(西火縣)인데 경덕왕이 상약(尙藥)으로 고쳤고 고려 때 영산으로 개칭하였으며 1913년에 창녕군에 병합하여 영산면이 되었다.

분파편집

신경의 8대손에서 덕재공파(德齋公派)·초당공파(草堂公派)·상장군파(上將軍派)·부원군파(府院君派)·판서공파(判書公派)의 5파로 갈리는데, 앞의 3파는 영산신씨, 나머지 2파는 영월신씨이다. 영산신씨는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를 지낸 신천(辛蕆: 신지화(辛至和)의 장자)을 파조로 하는 덕재공파(德齋公派)와 좌찬성(左贊成)을 지내고 영산부원군(靈山府院君)에 봉해진 신혁(辛革: 신지화의 차자)을 파조로 하는 초당공파(草堂公派), 중정대부(中正大夫) 신성렬(辛成烈: 신공근(辛恭近)의 아들)을 파조로 하는 상장군공파(上將軍公派)로 갈라졌고, 영월부원군(寧越府院君)에 봉해진 신온(辛蘊: 신지화의 3자)을 파조로 하는 부원군파(府院君派)와 이부판서(吏部判書)를 지낸 신한(辛{革+漢-氵}: 신지화의 4자)을 파조로 하는 판서공파(判書公派)의 후손들은 영월로 분관하여 세계를 이어왔다.

영산 신씨편집

  • 덕재공파(德齋公派) - 신천 - (정당문학,판밀직사사)
  • 초당공파(草堂公派) - 신혁 - (좌찬성 영산부원군)
  • 상장군공파(上將軍公派) - 신성렬 - (중정대부)

영월 신씨편집

  • 부원군파(府院君派) - 신온 - (영월부원군)
  • 판서공파(判書公派) - 신한 - (이부판서)

인물편집

고려시대편집

  • 신천 (辛蕆, ? ~ 1339) : 호는 덕재(德齋). 충렬왕(忠烈王) 20년(1294)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1314년(충숙왕 1) 3월에 선부직랑(選部直郎)이 되었다. 안향(安珦)의 문인으로 1319년 6월에 총랑(摠郎)으로 있으면서 반대 의견을 무릅쓰고 극력 주청하여 스승을 문묘(文廟)에 종사하게 하였다. 1326년에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이달중(李達中) 등을 발탁하였으며, 그 뒤 1339년 12월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종2품)로 죽었다. 시호는 문헌(文憲)
  • 신예(辛裔, ? ~ 1355) : 간신, 충혜왕(忠惠王) 때 문과에 급제, 좌정언(左正言)과 지신사(知申事)를 거쳐 첨의평리(僉議評理)가 되었다. 1342년(충혜왕 복위 3) 지신사로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었다. 첨의참리(僉議參理)로서 서연(書筵)에서 시강(侍講)하였으며, 1345년(충목왕 1) 정방(政房)을 복치(復置)하였을 때에는 참리로 그 제조관(提調官)이 되었다.충목왕 때 취성부원군(鷲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신예의 행동에 대해서는 ‘매부인 고용보의 세력을 믿고 남의 재물을 강탈하고, 벼슬을 파는 등 횡포가 심하였는데 장기간 정방(政房)에 재임하자 온 나라 사람들이 그 문전에 몰려드니 사람들이 그를 보고 ‘신왕(辛王)’이라 불렀다.’한다, 전숙몽(田淑蒙) 등과 더불어 친척과 친구에게 경상(卿相)의 자리를 주고 정권을 농락하였다.신예의 모친이 남의 종을 빼앗자 그 주인이 돌려달라고 애걸하였으나 오히려 그를 구타하였다. 주인이 다시 정리도감(整理都監)에 호소하자 도감에서 관리를 보내 그 집안사람을 체포하려 했지만 도리어 관리가 구타당했다. 이에 도감에서는 신예의 동생인 대호군(大護軍) 신순(辛珣)을 수감하고 곤장을 쳤다.
  • 신렴(辛廉,?~?):1351년 공민왕(恭愍王)의 즉위와 함께 소부주부(小府注簿)가 되었으며, 공민왕이 원나라에 있을 때 시종하였던 공으로 이듬해 연저수종(燕邸隨從) 3등공신에 봉해졌다. 1361년(공민왕 10) 2차로 홍건적(紅巾賊)이 침입하자 방어전에 참여하였으며, 특히 개경 수복작전에 공을 세움으로써 1363년 2등공신이 되었다.1373년 한양부윤(漢陽府尹)으로 재임중, 당시 전국각처에 창궐하던 왜구들이 한강·예성강 일대에 집결, 연안 각지를 침략하고 한성부(漢城府)에까지 이르러 민가에 방화하고 백성들을 살육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 때 왜구를 막지 못하였다 하여 장형(杖刑)을 받고 일시 봉졸(烽卒)로 쫓겨났다가 다시 등용되어 밀직부사(密直副使)에 올랐다. 1379년(우왕 5) 전공을 믿고 권세를 부리던 찬성사(贊成事) 양백연(楊伯淵)이 당시의 권신(權臣) 이인임(李仁任)에 의하여 주살될 때, 그와 친구가 된다 하여 고향으로 쫓겨남으로써 숙청당하였다.
  • 신귀(辛貴, ? ~ 1371) : 증조는 전교령(典校令) 신지화(辛至和), 조부는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 신화(辛華), 부는 합문지후(閤門祗候) 신원경(辛原慶)장인은 곡산인(谷山人)이며 찬성사(贊成事)를 강윤성(康允成)으로 태조 이성계(李成桂)와 동서지간이다. 당시에 ‘신왕(辛王)’이라고 불릴 만큼 세도(勢道)가 있었던 형 신예(辛裔)와 동생 신순(辛恂)과 더불어 치부와 발호가 매우 심하였다. 1357년(공민왕 6) 채하중(蔡河中)이 역모해 옥중에서 목숨을 끊자, 그 연루자로 지목되어 전우상(全祐祥)·조휘(趙暉)·정인(鄭姻)·강찬(康贊)·홍상재(洪尙載) 등과 함께 장형(杖刑)을 받고 유배되었다. 그러나 공민왕(恭愍王)이 신돈(辛旽)을 기용해 공신 재상가(宰相家)를 숙청할 때에도 신돈의 동종(同宗)이라 하여 판서(判書)로 기용되었다.한편 신돈을 초대해 대접하고자 친구인 판소부시사(判小府寺事) 강원보(姜元甫)의 집에 그릇을 빌리려고 심부름꾼을 보냈었다. 이때 강원보가 장차 우리가 신돈을 제거하려 한다고 통고하자, 이를 신돈에게 알렸다. 그날 밤에 신돈이 궁검(弓劍)으로 호위하고 왕에게 고해 모반자를 순군(巡軍)에 가두고 국문해 처단하였다.1371년 신돈의 당여(黨與)가 거사를 모의하자, 문객(門客) 선부의랑(選部議郎) 이인(李韌)이 재상 김속명(金續命)의 집에 밀서(密書)를 투입하였다. 이에 신돈의 당이 숙청되면서 신귀도에 유배된 뒤 참살되었다. 동생 신우(辛祐), 아들 신극공(辛克恭)·신극람(辛克濫)·신극례(辛克禮)·신극경(辛克敬)은 모두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이 되었다. 사위 정희계(鄭熙啓) 역시 개국일등공신(開國一等功臣)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가 되었다. 또, 조카인 신유현(辛有賢)·신유정(辛有定)도 개국원종공신으로 영산(靈山) 신씨(辛氏) 일문은 조선조의 명문세가로서 기틀을 이루었다.
  • 신순(辛珣, ? ~ 1371) : 조부는 첨의찬성(僉議贊成) 신혁(辛革)이고 부는 합문지후(閤門祗候) 신원경(辛原慶)이며, 충목왕(忠穆王) 때 형 신예(辛裔)가 취성부원군(鷲成府院君)이 되어 그의 매서(妹壻)인 폐행권신(嬖幸權臣) 고용보(高龍普)와 더불어 정권을 농단하였는데, 이 때 대호군(大護軍)의 직함을 가지고 권력을 남용하였다.1356년(공민왕 5) 요동팔참(遼東八站)의 정벌전에 서북면이마사(西北面兵馬使) 강중경(姜仲卿)의 휘하에서 사윤(司尹)의 관직을 띠고 그 부사(副使)로 참전하였다. 이 때 원나라의 사신 직성사인(直省舍人)이 기철(奇轍)이 이미 살해된 줄 모르고, 기철에게 태사도(太司徒)를 삼는 선명(宣命)과 도장을 가지고 오는 것을 발견하고 이를 빼앗고 옥에 가두었다.1359년 홍건적(紅巾賊)의 위평장(僞平章)과 모거경(毛居敬)이 4만의 병력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침입하였을 때, 판도판서(版圖判書)로서 홍건적을 격퇴한 공으로 1363년 기해격주홍적1등공신(己亥擊走紅賊一等功臣)에 녹훈되었다. 이후 신돈(辛旽) 일당에 가담하여 권세를 부리다가 신돈이 숙청되자, 함께 죽었다.
  • 신부(辛富, ? ∼ 1360) : 1355년(공민왕 4) 취산군(鷲山君)에 봉하여졌으며,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종2품)로 재임중이던 1359년 홍건적(紅巾賊)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출전하였다. 이 때 평양 서쪽의 함종(咸從)에서 쌍방간에 대대적인 전투가 벌어졌는데 이 싸움에서 장군 이견(李堅)과 함께 전사하였다.
  • 신돈(辛旽, ? ~ 1371) : 승명(僧名)은 편조(遍照), 자는 요공(耀空). 공민왕이 내린 법호(法號)로 청한거사(淸閑居士)
  • 신정(辛靖,?~1388) : 중조는 판밀직사 신천(辛蕆), 조부 신인거(辛引𥚑), 부는 신경운(辛慶云)이다. 우왕(禑王) 6년(1380)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전력은 판관, 관직은 직제학에 이르렀다.
  • 신봉생(辛鳳生,?~1388): 중조는 판밀직사 신천(辛蕆), 조부 신인거(辛引𥚑), 부는 신경방으로 우왕(禑王) 9년(1383)에 문과 급제하였다. 전력은 판관
  • 신몽검(辛夢劒,? ~ ?): 부 신란(辛蘭),충렬왕(忠烈王) 16년(1290) 문과에 급제 ,전력은 재생(齋生)으로 성균관 유생중 동,서재에 기숙하던 유생을 뜻한다.
  • 신사천(辛斯蕆,?~1382): 호는 곡강(曲江)이다. 조부는 중정대부(中正大夫) 신성열(辛成烈)이다. 고려 조에 벼슬이 봉익대부(奉翊大夫) 전공판서(典公判書)에 이르렀다. 만년에 벼슬을 버리고 낙동강 유역의 곡강(曲江)에서 퇴거생활을 하던 중 1382년(우왕 8) 왜적의 침입에 맞서 싸우다가 낙동강 멸포(蔑浦)에서 적에게 붙잡혔고, 항복을 거부하다가 끝내 순국하였다. 이때 16세의 딸 또한 절개를 지키다가 목숨을 잃었다. 1405년(태종 5) 이 일이 전법판서 조준(趙浚)에 의해 알려지면서 삼강정려비가 내려져 정려(旌閭)되었다. 또 1701년(숙종 27)에 도천서원(道泉書院)이 사액되었다.슬하에 판안변부사(判安邊府事) 신열(辛悅) 등 6남 2녀를 두었다.

조선시대편집

  • 신유현(辛有賢,미상∼1411) :부는 판개성부사 신부(辛富). 태조 5년(1396) 도성제조(都城提調-)로 있을 때 8 대문(大門)을 완성한 공으로 말 1 필을 하사받았으며, 11월엔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종2품)로 남경(南京)에 다녀왔다. 태조 6년(1397) 조전절제사(助戰節制使)로 황해도 ‧평안도‧함경도 등 처의 왜적을 잡아 위유하여 보냈다. 같은 해 폐사된 귀암사(龜巖寺) 소속 노비를, 박자안(朴子安)과 모의하여 조상이 시주한 노비라며 자신의 노비로 만들었다, 사간원(司諫院)의 탄핵을 받고 평택현(平澤縣)에 유배되었다.
  • 신극공(辛克恭,1353~1423)ㅣ 부는 영산부원군(靈山府院君) 신귀(辛貴)와 어머니 신천강씨(信川康氏)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모는 신덕왕후 강씨(神德王后康氏)이로 태조 이성계의 처조카이다. 1370년(고려 공민왕 19) 문과(文科)에 합격하고 1396년(태조 5)에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를 거쳐 도병마사(道兵馬使)가 되어 대마도(對馬島)를 공격하였으며 전주부윤(全州府尹)을 거쳐 1398년(태조 7) 도선위사선위(都宣尉使宣慰)로 동북면(東北面)에 갔다 왔다.
  • 신유정(辛有定,1353~1426): 부는 판개성부사 신부(辛富)이다.음보(蔭補)로 산원(散員)이 되었으며 용맹이 뛰어났다. 1386년(우왕 12)에 정용호군(精勇護軍)이 되어 족형인 충청도도원수 이승원(李承源)의 휘하에서, 남해에 출현하여 노략질하는 왜구를 무찔러 크게 용맹을 떨쳤다. 그 뒤 이성계(李成桂)의 휘하에서 무공을 세워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조선 태조가 즉위하자, 태조를 시종한 공으로 원종공신(原從功臣)이 되어 크게 총애를 받았다. 1397년(태조 6)에 이산진첨절제사(伊山鎭僉節制使)가 되었고, 1400년(정종 2)에 왕세제가 된 이방원(李芳遠))의 추천으로 봉상시판관(奉常寺判官)이 되었다.이어서 공조·예조·형조의 전서(典書)를 역임하였으며, 1403년(태종 3)에 강원도에 침입하여 약탈을 자행하는 왜구를 크게 무찌른 공으로 판강릉대도호부사(判江陵大都護府事) 겸 좌군동지총제(左軍同知摠制)가 되었다.1407년에 의주도병마사가 되었고, 1410년에 야인 우디거(兀狄哈)가 경원에 침입하자 좌군도총제(左軍都摠制)로 부원수가 되어 도원수 조연(趙涓)과 함께 출정하여 이를 토벌하였다. 그 뒤 충청도병마도절제사·평안도도안무사가 되었다. 1415년에 병으로 사임하였다.성품이 강직하여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였으며, 가난할 때나 부유할 때나 하루 두끼만 먹었다고 한다. 시호는 무절(武節)이다.
  • 신인손(辛引孫,1384~1445) : 자는 조윤(祚胤), 호는 석천(石泉). 신원경(辛原慶)의 증손으로, 조부는 판개성부사 신부(辛富)이고, 부는 신유정(辛有定)이다.1402년(태종 2) 식년시에 생원으로 급제하고 1408년 문과에 급제하여 병조판서·대제학에까지 올랐다. 처음 사관(史官)에 보임되고, 1413년에 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에 전임되어 항상 여러 대군(大君)과 함께 경전(經典)과 사기(史記)를 강론하였다.세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신인손을 각별히 대접하여 난죽(蘭竹) 병풍을 친히 그려주었다. 이어 예조정랑에 오르고 1420년(세종 2)에 사인(舍人), 1428년에 집의(執義), 1430년에 종부시판사 겸 형조지사, 1432년에 좌사간대부(左司諫大夫)가 되고, 곧 형조우참의, 다시 경상도관찰사가 되었다.1434년에 병조좌참의가 되고 이내 승정원우승지를 거쳐 도승지에 승진하였다. 1438년에 병조참판이 되었다. 1444년 주문사(奏聞使)가 되어 제주도를 약탈한 왜구를 압송하여 명나라에 바치고 돌아와, 그 공으로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로 승진되었다가 형조판서에 전임되었다. 1445년에 예문관대제학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취임하지 못하였고, 모친상을 당하여 슬퍼한 나머지 몸이 쇠약해지고 병도 깊어 62세로 죽었다. 성질이 강직하고 아첨하지 못하며, 남의 과실을 보면 참지 못하고 기탄없는 말로 내치었다. 글씨에도 뛰어났다. 시호는 공숙(恭肅)이다.
  • 신석조(辛碩祖,1407~1459): 자는 찬지(贊之), 호는 연빙당(淵氷堂).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 신부(辛富)의 증손으로, 조부는 병마절제사 신유정(辛有定)이고, 부는 병조판서 신인손(辛仁孫)이다. 1426년(세종 8) 생원시에 일등으로 합격하고 같은 해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집현전저작랑에 제수되었으며, 곧바로 권채(權綵)·남수문(南秀文) 등과 함께 사가독서(賜暇讀書)에 선발되었다. 이후 직제학·우사간·부제학 등을 지냈다. 1452년(문종 2) 『세종실록(世宗實錄)』을 시찬(始撰)하였으며, 이듬해 이조참의가 되었다. 1456년(세조 2) 공조참판 때에 정조사(正朝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이조참판·대사헌·중추원사·경기도관찰사·이조판서를 지냈으며, 1459년 한성부윤을 거쳐 개성유수로 있을 때 죽었다. 성품이 온순, 근엄하며 학문에 뛰어나고 문장이 능하였으며, 『의방유취(醫方類聚)』·『경국대전(經國大典)』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시호는 문희(文僖)이다.
  • 신극례(辛克禮,?~1407): 1398년(태조 7) 제1차 왕자의 난 때 상장군으로 있으면서 공을 세워 좌명공신(佐命功臣) 1등에 녹훈되고, 취산군(鷲山君)에 봉하여졌다. 정종·태종 연간에 예조전서·좌군동지총제(左軍同知摠制) 등의 벼슬을 역임하였다.1407년(태종 7) 민무구(閔無咎)·민무질(閔無疾) 등과 함께 종친간을 이간질하였다 하여 이화(李和) 등의 탄핵을 받아 강원도 원주에 유배되었으나 태종의 지우를 받아 자원부처(自願付處)하게 되었다.관직에서 물러난 뒤에도 의정부·사헌부·사간원 등의 계속되는 탄핵을 받아오다가 그 해 11월 양주에서 죽었다. 죽은 뒤에는 태종이 좌명공신으로 후하게 사부(賜賻)하고, 조회를 사흘간이나 멈추었다.
  • 신열(辛悅,?∼1418) 증조부는 중정대부(中正大夫) 신성열(辛成烈)이고, 부친은 곡강(曲江) 신사천(辛斯蕆)이다. 6남 2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태종조(太宗朝)에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대신과 더불어 군사를 맡길만한 자와 종정무(宗貞茂:대마 도주)를 초유하는 문제를 의논하니 상공(相公) 유양(柳亮)이 천거(薦擧)하였다.1415년 우군동지총제(右軍同知摠制)로 삭주도병마절제사(朔州道兵馬節制使)와 판삭주도호부사(判朔州都護府事)를 겸하였다. 1416년 상주진주도병마도절제사(尙州晉州道兵馬都節制使)를 고쳐서 우도병마도절제사(右道兵馬都節制使)로 하였다. 1417년 명년 정삭(正朔)을 하례하기 위하여 도총제(都摠制) 김만수(金萬壽)와 함께 중국 경사(京師)에 갔다. 1418년 병마도절제사가 되었다가 다시 안변대도호부사(安邊大都護府使)가 되었다. 1418년 11월 임지(任地)인 안변(安邊)에서 사망하였는데 세종(世宗)께서 제사(祭祀)를 지내도록 제수를 하사(下賜)하셨다. )
  • 신처강(辛處康:?~1453):) 고조는 중정대부(中正大夫) 신성열(辛成烈)이고, 조부는 곡강(曲江) 신사천(辛斯蕆)이다 부는 신열(辛悅)이다. 관직은 지연일현사(知延日縣事), 제주안무사(濟州安撫使), 제주도안무사(濟州都安撫使),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 병조참의(兵曹參議), 충청도병마도절제사,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를 거쳐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에 이르렀다. 신처강이 제주목사(濟州牧使)로 있던 1440년경에도 왜구들이 중국 연해에까지 왕래하며 제주 지역을 약탈하거나 사람을 죽이는 일이 빈번했는데, 이때 조선에서는 관리들을 대마도나 일기도로 보내어 왜구들을 잡아오거나 잡혀간 조선인을 찾아오게 하였다. 1444년(세종 26)에는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로서 중국의 바닷가와 우리나라 제주도를 노략질한 일본 일기도의 왜인들을 중국으로 압송하는 임무를 맡기도 하였다. 북경에 다녀온 뒤 다시 외직으로 나가게 되자, 우정언(右正言) 허추(許錘)가 내직과 외직을 적절히 제수하여 노고(勞苦)를 균평하게 하는 뜻에 어긋난다고 아뢰자, 세종은 ‘적임자를 얻을 수가 없어서 대신에게 의논하여 제수한 것’이라고 말한다. 이로 미루어 보건대, 그가 직무를 적절하게 수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 신균(辛昀,1395~1473):자는 경화(敬和). 아버지는 신중선(辛中善)이다.1418년(태종 18) 문음으로 동부녹사(東部錄事)에 임명된 뒤 지안성군사(知安城郡事)·순흥도호부사 등의 외직을 거쳐, 지통례문사(知通禮門事)·예빈시윤(禮賓寺尹)·판제용감사(判濟用監事) 등을 역임하였다.이어서 노인직으로 검교한성부윤(檢校漢城府尹)·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검교호조참판(檢校戶曹參判) 등을 역임하였다. 1470년에 세조 및 성종을 보호하면서 길렀던 명빈(明嬪)의 청으로 지중추부사가 되었으나 곧 대간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뒤에 호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사가(史家)에 따르면 신균이 특별한 재능이 없이 중앙과 지방의 좋은 관직을 역임할 수 있었던 것은 호부(豪富)에 힘입은 바가 많았다고 한다. 시호는 호이(胡夷)이다.
  • 신주(辛鑄,1430~1526):1453년(단종 1) 무과에 급제하고, 1457년(세조 3) 중시(重試)에 합격하였다. 1460년(세조 6) 원종공신 3등에 책봉되었고, 이후 전라도 절도사, 함길도 절도사 등을 역임하였다. 함길도 절도사로 있을 때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평정하는 과정에 참여하였다. 1472년(성종 3년)부터 1478년(성종 9)까지 평안도 병마절도사, 경상 좌도 병마절도사 등을 역임하였고, 특히 국경 지대의 경비와 대책을 세우는 등 공이 많았다. 1479년(성종 10) 형조 참판과 영안북도 절도사를 지냈다. 영안북도 절도사로 재직할 때 영안남도 절도사 이흠석(李欽石), 영안도 관찰사 이덕양(李德良)과 함께 차역(差役)을 피해 삼봉도(三峯島)[지금의 독도]에 몰래 숨어든 수천 명의 인민을 토벌할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다. 이후 병조참판, 강원도 관찰사, 훈련원 도정, 동지중추부사, 개성부 유수 등을 역임하였다.
  • 신윤무(辛允武,?~1513):조부는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 신영손(辛永孫)이고, 아버지는 증 판서(贈判書) 신숙거(辛叔琚)이다.연산군 때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군자시부정(軍資寺副正)에 올라 왕의 총애를 받았다. 1506년(중종 1) 연산군의 학정에 불만을 품은 성희안(成希顔)·박원종(朴元宗) 등에게 내외정세를 세밀히 알려주어 중종반정을 결심하게 하고, 거사일에는 군사를 모아 임사홍(任士洪)·신수근(愼守勤)·신수영(愼守英) 등을 격살하고 일을 성사시켰다.그 공으로 정국공신(靖國功臣) 1등에 책록되고, 영천군(寧川君)에 봉하여졌다. 그 뒤 함경도병마절도사(咸鏡道兵馬節度使)가 되었는데, 탐오하고 군무에 소홀하다는 대간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으나, 박원종 등의 구원으로 4개월 만에 다시 서용되었다.그 뒤 공조판서를 거쳐 좌우참찬을 지내고 병조판서가 되었으나 대간들의 탄핵으로 다시 파직되었다. 이 때 역시 대간의 탄핵으로 파직된 박영문(朴永文)이 울분에 못 이겨 자주 신윤무의 집을 찾아와 조정을 비방하고 난언을 많이 하였다.신윤무는 늘 박영문에게 시기가 아니라며 타일러서 말렸으나, 이와 같은 사실을 엿들은 의정부의 노비 정막개(鄭莫介)의 고변으로 주살되고, 두 아들 신공(辛恭)·신검(辛儉)은 모두 교살당하였다
  • 신응시(辛應時,1532~1585):자는 군망(君望), 호는 백록(白麓). 신석(辛奭)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신윤형(辛尹衡)이고, 아버지는 부사 신보상(辛輔商)이다.1552년(명종 7) 진사가 되고 1559년(명종 14)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세자시강원설서(世子侍講院說書)·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을 지낸 뒤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1566년(명종 21) 문과중시에 병과로 급제, 예조·병조의 좌랑, 교리(校理) 등을 거쳐 선조 즉위 초에 경연관(經筵官)이 되었다. 그 뒤 어머니상을 입고 있을 때 『주자대전(朱子大全)』 중에서 예에 관한 부분을 발췌하여 『주문문례(朱門問禮)』를 간행하였다.전라도관찰사·연안부사·예조참의·병조참지를 거쳐, 대사간·홍문관부제학에 이르렀다. 경연에 임할 때면 고금의 사례들을 적절히 인용하여 막힘이 없었으며, 지방수령으로 재직시에는 풍속을 바로잡고 교육을 진흥시켰으며, 사사로운 일에는 청렴하여 집안에 가재도구가 거의 없었다.성혼(成渾)·이이(李珥)와 특히 교분이 두터웠다. 저서로는 『백록유고(白麓遺稿)』가 남아 있으며, 배천의 문회서원(文會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장(文莊)이다.
  • 신경진(辛慶晉,1554~1619) : 자는 용석(用錫), 호는 아호(丫湖). 부제학 신응시(辛應時)의 아들이다, 1573년(선조 6) 진사가 되고, 1584년(선조 17)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승문원·예문관 등에서 여러 벼슬을 지낸 뒤 1591년(선조 24) 병조좌랑으로서 진주사(陳奏使) 한응인(韓應寅)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귀국하였다.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지평이 되어 왕을 호종, 평양에 가서 체찰사 유성룡(柳成龍)의 종사관으로 활약하였다. 왜란 후 강릉부사·사간을 거쳐 이조참의·성주목사·충주목사를 역임하였다. 1609년(광해군 1) 경상도관찰사로 승진하고, 다시 예조참판을 거쳐 대사헌에 올랐다.그러나 1612년(광해군 4) 사돈인 황혁(黃赫)이 이이첨(李爾瞻)의 음모에 걸려 화를 입게 되자 파직되었다. 다시 등용되었으나 사퇴하였다. 신경진은 문무재(文武才)를 겸비하여 명성이 높았고, 청백리에 선정되었다.
  • 신응망(辛應望,1595~1654):자는 희상(希尙). 호남 출신. 아버지는 신장길(辛長吉)이며, 어머니는 이안당(李安鐺)의 딸이다. 강항(姜沆)의 문인이다.1617년 (광해군 9) 사마시를 거쳐 1624년(인조 2)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승문원에 등용되었다가 1627년 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로 있을 때, 지난 이괄(李适)의 난을 당하여 국왕을 호종하지 않았다는 죄목이 추론되어 잠시 체직된 바 있다. 전적으로 있을 때 모친의 봉양을 위하여 외직을 자청하여 모친이 있는 곳과 가까운 흥양·함평 등의 현감을 지냈다.장흥현감으로 있을 때는 노비가 상전을 죽인 강상변(綱常變)으 인하여 파직되었다. 황해도도사로 있을 때는 청나라 사신 정명수(鄭命壽)의 노여움을 사서 구금되었다가 석방된 적도 있었다.1646년과 이듬해에는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이 되어 언관과 감찰관으로 활약하였다. 공조와 예조의 정랑, 경상도도사·황해도도사·충청도도사 등을 거쳐 파주목사를 지내다가 병으로 사퇴하였다. 문한(文翰))과 대간직 및 외관을 역임하면서 문학과 행정실무에 능하였다.
  • 신경행(辛景行,1547년 ~ ?): 자는 백도(伯道), 호는 조은(釣隱). 신자전(辛自全)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신세주(辛世胄)이고, 아버지는 습독(習讀) 신질(辛垤)이다.1573년(선조 6)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1577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92년에 한산군수가 되었고, 1596년에 충청도순찰사의 종사관이 되었다. 이 때 관내 홍주에서 이몽학(李夢鶴)의 난이 일어나자 난의 진압에 공을 세웠다.다음 해에 군자감정(軍資監正)이 되었고, 1604년에 청난공신(淸難功臣) 삼등에 책록되고 영성군(靈城君)에 봉해졌다. 1608년(광해군 즉위년)에 충청도병사가 되었으나 시정이 바르지 못하다는 암행어사의 지적을 받았다. 뒤에 예조판서에 증직되었다.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 신계영(辛啓榮,1577~1669): 자는 영길(英吉), 호는 선석(仙石). 서울 출신. 신의정(辛義貞)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신진(辛鎭)이고, 아버지는 호조좌랑 신종원(辛宗遠)이다. 1601년(선조 34)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었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예산으로 낙향하였다. 몇 년 뒤 부모상을 당했으며, 광해군의 난정에 혐오를 느껴 과거를 보지 않다가 1619년(광해군 11) 알성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같은 해 검열을 거쳐, 병조좌랑·예조좌랑 등을 역임하였다.1624년(인조 2) 통신사 정립(鄭笠)의 종사관이 되어 일본에 건너가 도쿠가와[德川家光]의 사립(嗣立)을 축하하고 이듬해 귀국하였다. 이 때 임진왜란 때 포로가 되어 잡혀간 조선인 146인을 데리고 돌아왔다. 당시 일본에서 겪은 감회를 읊은 기행시가 신계영의 시문집인 『선석유고(仙石遺稿)』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1634년 동부승지가 되었고, 1637년에는 병자호란 때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을 대가를 지불하고 귀환시키는 속환사(贖還使)가 되어 심양에 다녀왔는데, 이 때 속환인 600여 인을 데리고 왔다.그 뒤 나주목사·강화유수 등을 거쳐 전주부윤을 역임하였다. 1639년에는 볼모로 잡혀간 소현세자(昭顯世子)를 맞으러 부빈객(副賓客)으로 심양에 갔었고, 다시 1652년(효종 3)에 사은사(謝恩使)의 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1655년에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와 여생을 한운야학(閑雲野鶴)과 더불어 보냈다. 1665년(현종 6) 지중추부사가 되어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고, 1667년에는 판중추부사에 특제되었다. 시호는 정헌(靖憲)이다
  • 신광업(辛光業,1575~1623): 자는 백술(伯述), 호는 구계(龜溪). 아버지는 신팽년(辛彭年)이다.1603년(선조 36) 진사가 되고, 1610년(광해군 2)에는 별시 문과에 장원하였다. 1618년에 수찬·교리를 거쳐 사간에 올랐다.수찬으로 있을 당시 폐모에 대해 백관이 모여 논의하는 과정에서 “정의와 예의를 절충하면 은(恩)과 의(義)의 경중에 따라 스스로 대처할 바가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대북당(大北黨)인 허균(許筠)의 심복이 되어 김개(金闓)와 함께 폐모론에 동조하였다.인조반정 후 옥사에 관련되어 귀양가서 위리안치(圍籬安置)주 01)되었다가 이이첨(李爾瞻)의 당으로 몰려 반역죄로 사형 당하였다.
  • 신방집(辛邦楫,1556~1592): 자는 여제(汝濟), 호는 영모당(永慕堂). 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 신태(辛泰)이다. 정구(鄭逑)의 문인으로, 학식과 서예가 뛰어났다.1591년(선조 24)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다음 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성안의(成安義)·곽찬(郭趲)·조열(曺悅) 등과 함께 창의하고는 영산(靈山)의 소모관(召募官)이 되어 성천희(成天禧) 등과 함께 그해 8월 창녕전투에 참가하여 적을 격퇴하는 데 공을 세웠다. 형 신방주(辛邦柱)와 동생 신방로(辛邦櫓)도 의병으로 참전하여 공을 세웠다
  • 신진보(辛晉保,?~?):무과에 급제하였다. 1437(세종 19) 야인 3천여 기(騎)가 벽동(碧潼)에 침입하여 벽단 목책(碧團木柵)을 불태웠을 때 지벽동군사(知碧潼郡事)로서 벽단부만호(碧團副萬戶) 허유강(許惟剛)과 함께 그들을 추적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적에게 포위당하여 지창성군사(知昌城郡事) 김자옹(金自雍)과 창주도부만호(昌州道副萬戶) 이효정(李效精)의 도움을 받아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결국 지략이 부족하여 전투에서 패배했다고 여겨져 처벌을 받았다. 이후 경상도우도처치사(慶尙道右道處置使)에 제수되었으나 임지에서 탐오(貪汚)를 일삼고 비행(非行)을 저지른 죄로 파직되었다. 이후 1455년(세조 1)에 이르러 직첩(職帖)을 다시 돌려받았다. 슬하에 아들로 신주(辛柱)‧신량(辛樑)이 있다.
  • 신주(辛柱,?~?): 호는 종모당, 증조는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 신식(辛息),조부는 군수 신자녕 ,부친은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 신진보(辛晉保)이다. 세종 조(世宗朝) 무과(武科)에 등제한 후 벼슬은 고성군수(固城郡守)에 이어 남병사(南兵使)에 이르렀다. 세조(世祖) 정사(靖社) 때에 이미 황보인(皇甫仁)‧김종서(金宗瑞) 등을 살해하고 몰래 박호문(朴好問)을 보내 함경절도사(咸鏡節度使) 이징옥(李澄玉)을 소환하려 하자 신주(辛柱)가 먼저 중도에서 기다려 베어버리고 아뢰니, 세조가 가상히 여겨 계성(桂城)에 있던 이징옥의 전장(田庄)을 하사하였다. 1513년(중종 8) 종질(從姪)인 영천군(寧川君) 신윤무(辛允武)와 영성군(寧城君) 신윤문(辛允文) 형제가 박영문(朴永文) 원옥사건(冤獄事件)으로 화를 입었다.
  • 신초(辛礎,1549~1618):자는 우수(友叟), 호는 문암(聞巖). 증조는 병마절도사 신주,조부는 부사 신세경,부는 목사 신희수(辛希壽)이다.1583년(선조 16)이탕개(尼湯介)의 반란을 평정할 때 공을 세우고, 선조18년(1585년) 무과에 급제하여 1591년 천성만호(天城萬戶)가 되었다.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천성도(天城島)가 고도(孤島)이므로 김해성(金海城)으로 들어갔다가 성이 함락되자 적의 포위망을 돌파하였다. 합천군수 이숙(李潚), 박진영(朴震英) 등과 더불어 의병을 모집하고, 곽재우군(郭再祐軍)과 합류하여 활약하기도 하였다.공위겸(孔撝謙)이 적에게 항복하여 영산에 웅거, 경상도관찰사를 자처하며 위세를 떨치자 단신으로 신초의 진영에 잠입하고, 계략을 써서 사로잡았다. 1592년 7월의 영산전투에서도 공을 세워 곽재우의 천거로 현풍현감이 되어 선정을 베풀고, 백성을 안집하여 목민관으로도 영남에 명성을 떨쳤다.정유재란 때는 창녕의 화왕산성(火旺山城)에 주둔하고 있던 곽재우군에 합류하여 화왕산성전투에서 조전장(助戰將)으로 활약하였다. 난이 끝난 뒤 보성군수을 역임하였다. 병조판서로 추증되었고, 창녕의 문암정(聞巖亭), 영산의 도천서원(道泉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 신석림(辛碩林,1766~1840): 영산현 거, 신초(辛礎)의 6세손, 자는 문담(文詹), 호는 청계(聽溪). 신경하(辛景夏)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신광복(辛光復)이고,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 신치보(辛致輔)이다.문음으로 관직을 제수 받았고 1798년(정조 22)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804년(순조 4) 승문원정자가 되고, 1806년 조경묘령(肇慶廟令), 이어 예조정랑이 되었으며, 1809년 사간원정언, 1819년 사헌부지평을 거쳐 이조좌랑과 양산군수를 지냈다.뒤에 통례원우통례(通禮院右通禮) 등이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792년에 유생으로 사도세자(思悼世子)에 관한 영남만인소(嶺南萬人疏)를 올린 일이 있는데, 1800년 소의 우두머리인 이우(李瑀)가 유배되자,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였다가 뒤에 재등용되었다.또, 곽재우(郭再祐)의 창의변무(倡義辨誣))와 채제공(蔡濟恭)이 사도(邪徒)가 아님을 강력히 변호하였다.
  • 신지정(辛志鼎,1800~?):영산현 거, 호는 포와 신초의 7세손,청계 신석림의 조카, 창녕 계성사람 ,문음으로 관직을 제수 받았고 순조 1834년 문과에 급제하여 순조34년 1834년 승정원 가주서(假注書-정7품),1843년 성균관 전적(典籍-정6품), 1845년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정5품), 1847년 사간원 헌납(獻納-정5품),1848년 사간원(司諫院) 사간(司諫-종3품),1856년 승정원(承政院) 동부승지(同副承旨-정3품)이 되었다. 조선후기 남인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당상관의 자리 까지 올랐으며 영산면 신씨고가의 주인들이 공의 후손이다.
  • 신숙청(辛俶晴,?~?):영산현 도천거 참판 신제(辛懠)의 아들이다. 모친은 정부인(貞夫人) 정씨이다. 무과에 등과하여 1447년(세종 29) 6월 이흥문(李興門)의 후임으로 제주목사에 부임하였다. 1448년(세종 30) 7월 관덕정을 창건하여 병사의 훈련 장소로 사용하였다. 대문장가 신석조(辛碩祖)에게 「관덕정기(觀德亭記)」를 짓게 하고 안평대군(安平大君)에게 제액(題額)을 받았다.1449년(세종 31) 7월에 첨지중추원사로 전출되어 떠나자 모두 명관이라 칭하였다. 1450년(세종 32)에 경상도병마절도사가 되었다. 성품(性品)이 온후하며, 지략(智略)이 뛰어났고, 청렴하고 근신하였다. 번진(藩鎭)을 역임하였으며 명성이 자자하였다. 특히 시와 예를 좋아하였으며 청백리(淸白吏)로 기록되었다.
  • 신필주(辛弼周,1478∼550): 자는 희경(姬卿) 거 영산현 도천거, 증조부는 신제(辛劑)이고, 조부는 신숙청(辛俶晴)이고, 부친은 조산대부(朝散大夫) 황주판관(黃州判官) 신수무(辛秀武)이다. 아내는 창원황씨(昌原黃氏) 황수정(黃粹精)의 딸이다.19세이던 1496년(연산군 2) 병진(丙辰) 증광시(增廣試) 진사(進士) 2등 23위로 합격하였다. 30세 때인 1507년(중종 2) 정묘(丁卯) 증광시(增廣試) 병과(丙科) 5위로 급제한 후 벼슬은 지평(持平)‧예조참의(禮曹參議)‧통례랑(通禮郞)을 역임하였다. 문무(文武)에 모두 뛰어나 세인의 추앙을 받았으며, 아들 광주목사(光州牧使) 신륜(辛崙)이 문과 급제한 뒤 이름을 높였다. 묘갈명(墓碣銘)을 승정원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 이휘령(李彙寧)이 찬(撰)하였다. 향양사(向陽祠)에 제향(祭享)되었다.
  • 신륜(辛崙,1504~1565): 자는 경립(景立) 영산현 거. 절도사 신숙청(辛俶晴)의 증손, 조부는 황주판관(黃州判官) 신수무(辛秀武)이고, 부는 참의 신필주(辛弼周)이다. 1546년(명종 1) 증광 문과에 을과로 급제, 성균관학정(成均館學正)·박사를 거쳐 전적(典籍)에 오르고 다시 형조좌랑에 임용되었다. 1550년에는 경상도도사(慶尙道都事)·춘추관기주관(春秋館記注官)을 역임하고, 1552년에는 함경도도사로 임명되었으나 노모를 봉양하기 위하여 부임하지 않았다.뒤에 예조·공조·형조의 정랑을 지내고 1563년 광주목사(光州牧使)가 되었으나 어머니의 봉양을 위하여 관직을 포기하고 돌아와 효도를 다하였다. 향양사(向陽祠)에 제향되었다.
  • 신영학(辛泳學,1853~1920): 자는 무형(懋馨)이고, 호는 이운(怡雲)이다.조부는 승지 신지정((辛志鼎)이다.부는 전행선공감가감역(前行繕工監假監役) 신규성(辛奎成)이다.1876년(고종 13) 식년시 생원 1등 4위로 합격한 뒤, 1894년(고종 31) 식년시에 병과 30위로 문과 급제한 후, 관직은 재랑(齋郞)‧전사(典事)‧비서감낭(秘書監郎)‧홍문관시강(弘文館侍講)‧규장각직각(奎章閣直閣)‧궁내부특진관이조참판(宮內府特進官吏曹參判) 등을 역임하였다. 특히 시강 재임 중에 황태자의 혼례식에 참여하여 임금으로부터 은장을 받았으며, 1910년(융희 4) 경술국치 후 일제에 의해 강요된 단발령에 따르지 않자 일본인들이 회유하려 하였으나 끝까지 거절하고 낙향하여 은거하였다.

대한민국편집

집성촌편집

  • 경상남도 창녕군 영산면
  • 경상남도 창녕군 계성면
  • 경상남도 창녕군 도천면
  • 경상남도 함안군 칠북면 영동리
  • 경상남도 거제시 하청면 하청리
  • 울산광역시 울주군 삼동면 (일부는 댐 건설로 인해 수몰)
  • 경기도 양평군 강상면 송학리
  • 경기도 여주시 대신면 후포리
  • 충청북도 청주시 문의면 산덕리
  • 충청북도 괴산군 증평읍 남차리
  • 충청남도 금산군 제원면 수당리
  • 충청남도 금산군 남일면 초현리
  • 충청남도 금산군 남일면 덕천1,2,3리
  •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동중리
  • 경상북도 의성군 단북면 성암1리
  • 경상북도 월성군 강동면 모서리
  • 경상북도 김천시 아포읍 국사동
  • 경상북도 영천시 고경면 가수리
  • 함경남도 이원군 차호읍 포항리
  • 황해도 평산군 적암면
  • 전라남도 나주시 왕곡면 장산리
  • 전라남도 영암군 덕진면 운암리
  • 경상북도 예천군 개포면 이사리

항렬자편집

  • 영산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