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산 신씨

영산 신씨(靈山 辛氏)는 경상남도 창녕군 영산면을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영산 신씨 (靈山 辛氏)
영월 신씨 (寧越 辛氏)
관향경상남도 창녕군 영산면
강원도 영월군
시조신경 (辛鏡)
집성촌경상남도 창녕군 도천면
경상남도 거제시 하청면
경기도 양평군 강상면 송학리
경기도 여주군 대신면 후포리
함경남도 이원군 차호읍 포항리
충청북도 증평군 증평읍 남차리
충청남도 금산군 제원면 수당리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동중리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모서리
경상북도 김천시 아포면
주요 인물신천, 신돈, 신예, 신부, 신빈 신씨, 신유정, 신인손, 신윤, 신석조, 신영희, 신응시, 신경행, 신경진, 신초, 신계영, 소원 신씨, 신석정, 신격호, 신상우, 신춘호, 신준호, 신동주, 신동빈, 신재기, 신건, 신학용, 신기남, 신경민, 신경림, 신정훈 ,
인구(2020년)187,731명

역사편집

영산 신씨(靈山 辛氏) 시조 신경(辛鏡)은 중국 8학사의 한 사람으로 고려에 동래했다고 전해지며 1138년(인종 16년) 문과에 급제하고 금자광록대부(金紫光錄大夫)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이르렀으며, 정의(貞懿)라는 시호(諡號)를 받았다고 한다. 지금의 경상남도 창녕군 영산면에 있는 영취산(靈鷲山)에 살았다고 전해진다. 역사학자들은 다산 정약용이 언급한 것처럼 영산 신씨((靈山 辛氏)도 다른 많은 한반도 성씨들과 같이 한반도 토착민이 모화사상(模華思想)으로 중국 성씨를 빌려 쓴 것으로 보고 있다.

본관편집

영산(靈山)은 경상남도 창녕군 영산면이다. 본래 신라의 서화현(西火縣)인데 경덕왕이 상약(尙藥)으로 고쳤고 고려 때 영산으로 개칭하였으며 1913년에 창녕군에 병합하여 영산면이 되었다.

분파편집

신경의 8대손에서 덕재공파(德齋公派)·초당공파(草堂公派)·상장군파(上將軍派)·부원군파(府院君派)·판서공파(判書公派)의 5파로 갈리는데, 앞의 3파는 영산신씨, 나머지 2파는 영월신씨이다. 영산신씨는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를 지낸 신천(辛蕆: 신지화(辛至和)의 장자)을 파조로 하는 덕재공파(德齋公派)와 좌찬성(左贊成)을 지내고 영산부원군(靈山府院君)에 봉해진 신혁(辛革: 신지화의 차자)을 파조로 하는 초당공파(草堂公派), 중정대부(中正大夫) 신성렬(辛成烈: 신공근(辛恭近)의 아들)을 파조로 하는 상장군공파(上將軍公派)로 갈라졌고, 영월부원군(寧越府院君)에 봉해진 신온(辛蘊: 신지화의 3자)을 파조로 하는 부원군파(府院君派)와 이부판서(吏部判書)를 지낸 신한(辛{革+漢-氵}: 신지화의 4자)을 파조로 하는 판서공파(判書公派)의 후손들은 영월로 분관하여 세계를 이어왔다.

영산 신씨편집

  • 덕재공파(德齋公派) - 신천
  • 초당공파(草堂公派) - 신혁
  • 상장군공파(上將軍公派) - 신성렬

영월 신씨편집

  • 부원군파(府院君派) - 신온
  • 판서공파(判書公派) - 신한

인물편집

고려시대편집

  • 신천(辛蕆, ? ~ 1339년) : 안향(安珦)의 문인으로서 문과에 급제하여 1314년(충숙왕 1) 선부직랑(選部直郎)이 되었고, 1339년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에 이르렀다. 시호는 응청(凝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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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예(辛裔, ? ~ 1355년) : 고려 충혜왕 때 문과에 급제한 후 좌정언(左正言)과 지신사(知申事)를 거쳐 첨의평리(僉議評理)가 되었다. 충목왕이 즉위하자 전 첨의참리(僉議參理)로서 서연(書筵)에서 시강(侍講)하였으며, 1345년(충목왕 1) 정방(政房)을 복치하였을 때에는 참리로 그 제조관(提調官)이 되었다. 충목왕 때 취성부원군(鷲城府院君)에 봉하여졌다.
  • 신돈(辛旽) : 공민왕의 사부(師傅)가 되어 국정을 자문했고, 1365년(공민왕 14) 진평후(眞平侯)에 봉해진 뒤 수정이순논도섭리보세공신(守正履順論道燮理保世功臣)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 영도첨의사사사(領都僉議使司事) 판중방감찰사사(判重房監察司事) 취산부원군(鷲山府院君) 제조승록사사(提調僧錄司事) 겸 판서운관사(判書雲觀事)에 이르렀다.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하여 권문세족으로부터 부당하게 땅을 빼앗긴 백성들에게 다시 땅을 되돌려주었다. 또 고려 광종 이후 페지된 노비안검법을 실시하여 억울하게 노비가 된 사람들을 해방시켜 주었다. 1371년 역모고변으로 처형당했고 조선 개국 후에는 요승으로 낙인 찍혔다.
  • 신부(辛富, ? ∼ 1360년) : 1355년(공민왕 4) 취산군(鷲山君)에 봉하여졌으며, 고려 공민왕 때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로 재임 중 홍건적의 난 때 함종전투에서 순절하였다.
  • 신유정(辛有定, 1347년 ~ 1426년) : 1386년(우왕 12)에 정용호군(精勇護軍)이 었고, 조선 개국 후 원종공신(原從功臣)이 되었다. 1397년(태조 6)에 이산진첨절제사(伊山鎭僉節制使)가 되었고, 1400년(정종 2)에 봉상시판관(奉常寺判官)이 되었다. 이어서 공조·예조·형조의 전서(典書)를 역임하였으며, 1403년(태종 3)에 판강릉대도호부사(判江陵大都護府事) 겸 좌군동지총제(左軍同知摠制)가 되었다. 1407년에 의주도병마사가 되었고, 1410년에 좌군도총제(左軍都摠制)를 지낸 뒤 충청도병마도절제사·평안도도안무사가 되었다. 시호는 무절(武節)이다.
  • 신예(辛裔, ? ~ 1355년) : 고려 충혜왕 때 문과에 급제한 후 좌정언(左正言)과 지신사(知申事)를 거쳐 첨의평리(僉議評理)가 되었다. 충목왕이 즉위하자 전 첨의참리(僉議參理)로서 서연(書筵)에서 시강(侍講)하였으며, 1345년(충목왕 1) 정방(政房)을 복치하였을 때에는 참리로 그 제조관(提調官)이 되었다. 충목왕 때 취성부원군(鷲城府院君)에 봉하여졌다
  • 신부(辛富, ? ∼ 1360년) : 1355년(공민왕 4) 취산군(鷲山君)에 봉하여졌으며, 고려 공민왕 때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로 재임 중 홍건적의 난 때 함종전투에서 순절하였다.
  • 신응시(辛應時) : 조선 선조 때 전라도관찰사·예조판서·대사간·부제학 등을 역임하였다.
  • 신계영 : 조선 현종 때 판중추부사를 역임한후 기로소에 들어갔다.
  • 신사천(辛斯蕆 ?~1382년) : (우왕 8). 고려 후기 충신‧의열인. 호는 곡강(曲江)이다. 조부는 중정대부(中正大夫) 신성열(辛成烈)이다.

고려 조에 벼슬이 봉익대부(奉翊大夫) 전공판서(典公判書)에 이르렀다. 만년에 벼슬을 버리고 낙동강 유역의 곡강(曲江)에서 퇴거생활을 하던 중 1382년(우왕 8) 왜적의 침입에 맞서 싸우다가 낙동강 멸포(蔑浦)에서 적에게 붙잡혔고, 항복을 거부하다가 끝내 순국하였다. 이때 16세의 딸 또한 절개를 지키다가 목숨을 잃었다. 1405년(태종 5) 이 일이 전법판서 조준(趙浚)에 의해 알려지면서 삼강정려비가 내려져 정려(旌閭)되었다. 또 1701년(숙종 27)에 도천서원(道泉書院)이 사액되었다. 슬하에 판안변부사(判安邊府事) 신열(辛悅) 등 6남 2녀를 두었다.

조선시대편집

  • 신유정(辛有定, 1347년 ~ 1426년) : 1386년(우왕 12)에 정용호군(精勇護軍)이 었고, 조선 개국 후 원종공신(原從功臣)이 되었다. 1397년(태조 6)에 이산진첨절제사(伊山鎭僉節制使)가 되었고, 1400년(정종 2)에 봉상시판관(奉常寺判官)이 되었다. 이어서 공조·예조·형조의 전서(典書)를 역임하였으며, 1403년(태종 3)에 판강릉대도호부사(判江陵大都護府事) 겸 좌군동지총제(左軍同知摠制)가 되었다. 1407년에 의주도병마사가 되었고, 1410년에 좌군도총제(左軍都摠制)를 지낸 뒤 충청도병마도절제사·평안도도안무사가 되었다. 시호는 무절(武節)이다.
  • 신인손(辛引孫) 1384년(우왕 10) ∼ 1445년(세종 27) 신유정의 아들, 1402년(태종 2) 식년시에 생원으로 급제하고 1408년 식년문과에 동진사(同進士)로 급제하여 병조판서·대제학에까지 올랐다. 처음 사관(史官)에 보임되고, 1413년에 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에 전임되어 항상 여러 대군(大君)과 함께 경전(經典)과 사기(史記)를 강론하였다.

세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신인손을 각별히 대접하여 난죽(蘭竹) 병풍을 친히 그려주었다. 이어 예조정랑에 오르고 1420년(세종 2)에 사인(舍人), 1428년에 집의(執義), 1430년에 종부시판사 겸 형조지사, 1432년에 좌사간대부(左司諫大夫)가 되고, 곧 형조우참의, 다시 경상도관찰사가 되었다. 1434년에 병조좌참의가 되고 이내 승정원우승지를 거쳐 도승지에 승진하였다. 1438년에 병조참판이 되었다. 1444년 주문사(奏聞使)가 되어 제주도를 약탈한 왜구를 압송하여 명나라에 바치고 돌아와, 그 공으로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로 승진되었다가 형조판서에 전임되었다. 1445년에 예문관대제학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취임하지 못하였고, 모친상을 당하여 슬퍼한 나머지 몸이 쇠약해지고 병도 깊어 62세로 죽었다. 성질이 강직하고 아첨하지 못하며, 남의 과실을 보면 참지 못하고 기탄없는 말로 내치었다. 글씨에도 뛰어났다. 시호는 공숙(恭肅)이다.

 

  • 신균(辛昀, 1395년(태조4년) ~ 1473년(성종4년)

1418년(태종 18) 문음으로 동부녹사(東部錄事)에 임명된 뒤 지안성군사(知安城郡事)·순흥도호부사 등의 외직을 거쳐, 지통례문사(知通禮門事)·예빈시윤(禮賓寺尹)·판제용감사(判濟用監事) 등을 역임하였다. 이어서 노인직으로 검교한성부윤(檢校漢城府尹)·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검교호조참판(檢校戶曹參判) 등을 역임하였다. 1470년에 세조 및 성종을 보호하면서 길렀던 명빈(明嬪)의 청으로 지중추부사가 되었으나 곧 대간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뒤에 호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사가(史家)에 따르면 신균이 특별한 재능이 없이 중앙과 지방의 좋은 관직을 역임할 수 있었던 것은 호부(豪富)주 01)에 힘입은 바가 많았다고 한다. 시호는 호이(胡夷)이다.

 

  • 신응시(辛應時)(영월) 1532년(중종 27)~1585년(선조 18)

1552년(명종 7) 진사가 되고 1559년(명종 14)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세자시강원설서(世子侍講院說書)·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을 지낸 뒤 사가독서(賜暇讀書)주 01)를 하였다. 1566년(명종 21) 문과중시에 병과로 급제, 예조·병조의 좌랑, 교리(校理) 등을 거쳐 선조 즉위 초에 경연관(經筵官)이 되었다. 그 뒤 어머니상을 입고 있을 때 『주자대전(朱子大全)』 중에서 예에 관한 부분을 발췌하여 『주문문례(朱門問禮)』를 간행하였다. 전라도관찰사·연안부사·예조참의·병조참지를 거쳐, 대사간·홍문관부제학에 이르렀다. 경연에 임할 때면 고금의 사례들을 적절히 인용하여 막힘이 없었으며, 지방수령으로 재직시에는 풍속을 바로잡고 교육을 진흥시켰으며, 사사로운 일에는 청렴하여 집안에 가재도구가 거의 없었다. 성혼(成渾)·이이(李珥)와 특히 교분이 두터웠다. 저서로는 『백록유고(白麓遺稿)』가 남아 있으며, 배천의 문회서원(文會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장(文莊)이다.

 

  • 신계영(辛啓榮) 1577년(선조 10)~ 1669년(현종 10)

1601년(선조 34)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었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예산으로 낙향하였다. 몇 년 뒤 부모상을 당했으며, 광해군의 난정에 혐오를 느껴 과거를 보지 않다가 1619년(광해군 11) 알성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같은 해 검열을 거쳐, 병조좌랑·예조좌랑 등을 역임하였다.

1624년(인조 2) 통신사 정립(鄭笠)의 종사관이 되어 일본에 건너가 도쿠가와[德川家光]의 사립(嗣立)을 축하하고 이듬해 귀국하였다. 이 때 임진왜란 때 포로가 되어 잡혀간 조선인 146인을 데리고 돌아왔다. 당시 일본에서 겪은 감회를 읊은 기행시가 신계영의 시문집인 『선석유고(仙石遺稿)』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1634년 동부승지가 되었고, 1637년에는 병자호란 때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을 대가를 지불하고 귀환시키는 속환사(贖還使)가 되어 심양에 다녀왔는데, 이 때 속환인 600여 인을 데리고 왔다.

그 뒤 나주목사·강화유수 등을 거쳐 전주부윤을 역임하였다. 1639년에는 볼모로 잡혀간 소현세자(昭顯世子)를 맞으러 부빈객(副賓客)으로 심양에 갔었고, 다시 1652년(효종 3)에 사은사(謝恩使)의 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655년에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와 여생을 한운야학(閑雲野鶴)과 더불어 보냈다. 1665년(현종 6) 지중추부사가 되어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고, 1667년에는 판중추부사에 특제되었다. 시호는 정헌(靖憲)이다.

 

창녕군 계성면,영산지역 인물

  • 신식 (辛息) 무과급제 조선태종대 무신 수군 만호(水軍萬戶)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역임. 아버지는 고려조 봉익대부(奉翊大夫) 전공판서(典公判書) 신사천(辛斯蕆 ?~1382년)의 장남 증조부는 중정대부(中正大夫) 신성열(辛成烈)이다.

 

  • 신열(辛悅) 미상∼1418년(세종 1). 증조부는 중정대부(中正大夫) 신성열(辛成烈)이고, 부친은 곡강(曲江) 신사천(辛斯蕆)이다. 6남 2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태종조(太宗朝)에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대신과 더불어 군사를

1415년 우군동지총제(右軍同知摠制)로 삭주도병마절제사(朔州道兵馬節制使)와 판삭주도호부사(判朔州都護府事)를 겸하였다. 1416년 상주진주도병마도절제사(尙州晉州道兵馬都節制使)를 고쳐서 우도병마도절제사(右道兵馬都節制使)로 하였다. 1417년 명년 정삭(正朔)을 하례하기 위하여 도총제(都摠制) 김만수(金萬壽)와 함께 중국 경사(京師)에 갔다.

1418년 병마도절제사가 되었다가 다시 안변대도호부사(安邊大都護府使)가 되었다.

1418년 11월 14일 임지(任地)인 안변(安邊)에서 사망하였는데 세종(世宗)께서 제사(祭祀)를 지내도록 제수를 하사(下賜)하셨다.

 

  • 신자녕(辛子寧) 무과급제, 군수(郡守) 아버지는 수군절도사 신식 (辛息)

 

  • 신숙청(辛俶晴) 생졸년 미상.신사천(辛斯蕆)의 손자이다.무과에 등과하여 1447년(세종 29) 6월 이흥문(李興門)의 후임으로 제주목사에 부임하였다. 1448년(세종 30) 7월 관덕정을 창건하여 병사의 훈련 장소로 사용하였다. 받았다. 1450년(세종 32)에 경상도병마절도사가 되었다. (문종1년) 경상 우도 병마 절제사(慶尙右道兵馬節制使), 청백리(淸白吏)로 기록되었다.

 

  • 신진보(辛晉保) 생졸년 미상. 무과에 급제하였다. 아버지는 군수 신자녕(辛子寧)

1437(세종 19) 야인 3천여 기(騎)가 벽동(碧潼)에 침입하여 벽단 목책(碧團木柵)을 불태웠을 때 지벽동군사(知碧潼郡事)로서 벽단부만호(碧團副萬戶) 허유강(許惟剛)과 함께 그들을 추적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적에게 포위당하여 지창성군사(知昌城郡事) 김자옹(金自雍)과 창주도부만호(昌州道副萬戶) 이효정(李效精)의 도움을 받아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결국 지략이 부족하여 전투에서 패배했다고 여겨져 처벌을 받았다. 이후 경상도우도처치사(慶尙道右道處置使)에 제수되었으나 임지에서 탐오(貪汚)를 일삼고 비행(非行)을 저지른 죄로 파직되었다. 이후 1455년(세조 1)에 이르러 직첩(職帖)을 다시 돌려받았다. 슬하에 아들로 신주(辛柱)‧신량(辛樑)이 있다.

 

  • 신주(辛柱) 생졸년 미상. 호는 종모당(終慕堂).부친은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 신진보(辛晉保)이다.

세종 조(世宗朝) 무과(武科)에 등제한 후 벼슬은 고성군수(固城郡守)에 이어 남병사(南兵使)에 이르렀다. 세조(世祖) 정사(靖社) 때에 이미 황보인(皇甫仁)‧김종서(金宗瑞) 등을 살해하고 몰래 박호문(朴好問)을 보내 함경절도사(咸鏡節度使) 이징옥(李澄玉)을 소환하려 하자 신주(辛柱)가 먼저 중도에서 기다려 베어버리고 아뢰니, 세조가 가상히 여겨 계성(桂城)의 이징옥 전장(창녕군 계성면 지동 )을 하사하였다.묘와 제실도 계성 지동에 있다.

 

  • 신필주(辛弼周) 조부는 청백리 절제사 신숙청(辛俶晴)이고, 부친은 조산대부(朝散大夫) 황주판관(黃州判官) 신수무(辛秀武)이다.

19세이던 1496년(연산군 2) 병진(丙辰) 증광시(增廣試) 진사(進士) 2등 23위로 합격하였다. 30세 때인 1507년(중종 2) 정묘(丁卯) 증광시(增廣試) 병과(丙科) 5위로 급제한 후 벼슬은 지평(持平)‧예조참의(禮曹參議)‧통례랑(通禮郞)을 역임하였다. 아들 광주목사(光州牧使) 신륜(辛崙)이 문과 급제한 뒤 이름을 높였다.

 

  • 신륜(辛崙) 1504년(연산군 10) ~ 1565년(명종 20) 절도사 신숙청(辛俶晴)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황주판관(黃州判官) 신수무(辛秀武)이고, 아버지는 참의 신필주(辛弼周)이며, 어머니는 창원황씨(昌原黃氏)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조식(曺植)과 교유하였다.

1546년(명종 1) 증광 문과에 을과로 급제, 성균관학정(成均館學正)·박사를 거쳐 전적(典籍)에 오르고 다시 형조좌랑에 임용되었다. 1550년에는 경상도도사(慶尙道都事)·춘추관기주관(春秋館記注官)을 역임하고, 1552년에는 함경도도사로 임명되었으나 노모를 봉양하기 위하여 부임하지 않았다.뒤에 예조·공조·형조의 정랑을 지내고 1563년 광주목사(光州牧使)가 되었으나 어머니의 봉양을 위하여 관직을 포기하고 돌아와 효도를 다하였다.

 

  • 신세경(辛世卿) 무과, 사직(司直) 종모당 신주의 장남 도천파,계성파

 

  • 신희수 (辛希壽) 무과, 판관,현감 사직 신세경의 장남

 

  • 신초(辛礎) 1549년(명종 4) ~ 1618년(광해군 10) : 통훈대부(通訓大夫) 천성만호, 현풍현감, 보성군수 등을 역임한 무신.의병장. 아버지는 현감 신희수(辛希壽)이다.

1583년(선조 16)이탕개(尼湯介)의 반란을 평정할 때 공을 세우고, 무과에 급제하여 1591년 천성만호(天城萬戶)가 되었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천성도(天城島)가 고도(孤島)이므로 김해성(金海城)으로 들어갔다가 성이 함락되자 적의 포위망을 돌파하였다. 합천군수 이숙(李潚), 박진영(朴震英) 등과 더불어 의병을 모집하고, 곽재우군(郭再祐軍)과 합류하여 활약하기도 하였다.

공위겸(孔撝謙)이 적에게 항복하여 영산에 웅거, 경상도관찰사를 자처하며 위세를 떨치자 단신으로 신초의 진영에 잠입하고, 계략을 써서 사로잡았다. 1592년 7월의 영산전투에서도 공을 세워 곽재우의 천거로 현풍현감이 되어 선정을 베풀고, 백성을 안집하여 목민관으로도 영남에 명성을 떨쳤다.

정유재란 때는 창녕의 화왕산성(火旺山城)에 주둔하고 있던 곽재우군에 합류하여 화왕산성전투에서 조전장(助戰將)으로 활약하였다. 난이 끝난 뒤 보성군수을 역임하였다.

죽은 뒤 병조판서로 추증되었고, 창녕계성면사리 문암정(聞巖亭), 영산의 도천서원(道泉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장자 - 신덕유

차자 - 신경유 [무과] 인조(仁祖) 8년(1630) 경오(庚午) 식년시(式年試) 갑과(甲科) 2[亞元]위(2/28)

삼자 - 신성유 [무과] 인조(仁祖) 22년(1644) 갑신(甲申) 정시(庭試) 병과(丙科) 69위(89/100) 주부(主簿)- 대구중군 의병장 신갑의 계자이며 창녕군 영산면의 영산신씨 고가의 영산신씨가 후손이된다.

사자 - 신원유 [무과] 인조(仁祖) 14년(1636) 병자(丙子) 별시(別試) 병과(丙科) 400위(425/504)

 

  • 신갑(辛𥑐) 의병장, 충장공 신초의 동생 통훈대부(通訓大夫) 행사천현감(行泗川縣監) 계자 신성유(생부 신초)
  • 신석림(辛碩林) 1766년(영조 42) ~ 1840년(헌종 6) 조선후기 예조정랑, 사간원정언, 사헌부지평 등을 역임한 문신. 충장공 신초(辛礎)의 6대손

1798년(정조 22)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804년(순조 4) 승문원정자가 되고, 1806년 조경묘령(肇慶廟令), 이어 예조정랑이 되었으며, 1809년 사간원정언, 1819년 사헌부지평을 거쳐 이조좌랑과 양산군수를 지냈다.

뒤에 통례원우통례(通禮院右通禮) 등이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792년에 유생으로 사도세자(思悼世子)에 관한 영남만인소(嶺南萬人疏)를 올린 일이 있는데, 1800년 소의 우두머리인 이우(李瑀)가 유배되자,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였다가 뒤에 재등용되었다.

[문과] 정조(正祖) 22년(1798) 무오(戊午)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18위(28/53)

  • 신지정(辛志鼎) 1800(정조24년) ~ 사간,승정원승지(承政院承旨) 1856[병진(丙辰) 3월] 충장공 신초의7대손, 신석림의 조카이며 영산의 신씨 고가의 주인들도 후손이된다.

[문과] 순조(純祖) 34년(1834) 갑오(甲午)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28위(38/49)

현대편집

집성촌편집

  • 경상남도 창녕군 영산면
  • 경상남도 창녕군 계성면
  • 경상남도 창녕군 도천면
  • 경상남도 함안군 칠북면 영동리
  • 경상남도 거제시 하청면 하청리
  • 경상남도 거제시 지세포 소동리
  • 울산광역시 울주군 삼동면 (일부는 댐 건설로 인해 수몰)
  • 경기도 양평군 강상면 송학리
  • 경기도 여주시 대신면 후포리
  • 충청북도 청주시 문의면 산덕리
  • 충청북도 괴산군 증평읍 남차리
  • 충청남도 금산군 제원면 수당리
  • 충청남도 금산군 남일면 초현리
  • 충청남도 금산군 남일면 덕천1,2,3리
  •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동중리
  • 경상북도 의성군 단북면 성암1리
  • 경상북도 월성군 강동면 모서리
  • 경상북도 김천시 아포읍 국사동
  • 경상북도 영천시 고경면 가수리
  • 함경남도 이원군 차호읍 포항리
  • 황해도 평산군 적암면
  • 전라남도 나주시 왕곡면 장산리
  • 전라남도 영암군 덕진면 운암리
  • 경상북도 예천군 개포면 이사리

항렬자편집

  • 영산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