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빈
오빈(吳䎙, 1602년 ~ 1685년)은 조선의 문신이다.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빈우(賓羽), 호는 농재(聾齋)이다. 벼슬은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시호는 숙헌(肅憲)이다.
생애
편집1632년(인조 10)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도원찰방(桃源察訪), 원수종사관(元帥從事官), 평안도사(平安都事), 호조정랑(戶曹正郞), 공조 정랑(工曹正郞)이 되었으며, 병조(兵曹)로 들어가서는 춘추 기주관(春秋記注官)을 겸임하였다. 이어 지평(持平), 장령(掌令), 문학(文學)이 되었다. 1644년 서장관(書狀官)으로 연경(燕京)에 다녀온 후 진주목사(晉州牧使)로 나갔고,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진하였다.
1650년(효종 1) 강계부사(江界府使)가 되었을 때 인조의 유모(乳媼) 아들인 이신우(李信友)가 인평대군(麟坪大君)의 문서를 가지고 와서 강계부 삼화(蔘貨)의 이권을 빼앗으려 하자 그 문서를 불태우고 이신우를 축출한 일이 화가 되어 유배되었다가 이듬해에 석방되었다.
1662년(현종 3) 오위장(五衛將)을 지내고,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와 공조참의(工曹參議)에 제수되었으며 1681년(숙종 7)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 승진하여 총관(摠管)을 겸하였다. 1684년에 장렬왕후(莊烈王后)의 회갑 때 가의대부(嘉義大夫)로 승진하였다. 1685년(숙종 11)에는 추은(推恩)되어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겸 총관(摠管)으로 승진하고, 관례를 따라서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1] 그해 9월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졸하니 향년 84세였다.[2] 경기도 양성(陽城)의 선영에 묻혔다. 시호는 숙헌(肅憲)이다.
저서
편집- 『농재집(聾齋集)』
가족
편집각주
편집- ↑ 국조인물고 권16 경재(卿宰)
- ↑ 숙종실록 16권, 숙종 11년 9월 23일 경진 3번째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