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흔(王訢, ? ~ 기원전 76년 음력 12월)은 전한 중기의 관료로, 제남군 사람이다.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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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군현의 관리였었는데, 승진하여 피양령(被陽令)이 되었다.

무제 말기에 각지에서 도적이 들끓으니, 수의어사(繡衣御史) 포승지가 무제의 명을 받들어 각지를 순방하며 도적 소탕에 소홀한 지방관들을 주살하였다. 이때 왕흔 또한 주살될 위기에 처하였는데, 죽기 직전에 포승지에게 말하였다.

사람을 살리고 죽일 권한으로 전국에 이름을 떨치시는 사군께서, 저 같은 사람을 죽이신다한들 위신이 커지지는 않습니다. 차라리 너그러이 용서하시고 은혜를 베푸셔서, 저로 하여금 최선을 다하게끔 하시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포승지는 왕흔의 말을 옳게 여겨 왕흔과 친분을 맺었다. 이후 포승지는 조정에 돌아가 왕흔을 천거하였고, 왕흔은 우보도위(右輔都尉)에 취임하여 우부풍의 직무를 잠시 맡아보게 되었다. 무제가 우부풍의 관할을 지나갈 때, 길과 숙박시설의 정비가 잘 되어있었기 때문에 무제는 왕흔을 정식으로 우부풍에 임명하였다.

원봉 원년(기원전 80년), 실각한 상홍양의 뒤를 이어 어사대부가 되었다.

원봉 4년(기원전 77년), 전천추의 뒤를 이어 승상이 되고 의춘(宜春侯)에 봉해졌다. 이듬해에 누군가의 고발을 받아 자살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는데, 결국 그 해에 죽었다.[1] 시호를 (敬)이라 하였고, 아들 왕담이 작위를 이었다.

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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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마천, 《사기
    • 권20 건원이래후자연표
  • 반고, 《한서
    • 권18 외척은택후표
    • 권66 공손유전왕양채진정전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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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자살 시도는 사기에서만 확인되고, 한서에서는 단순히 죽었다고만 기록되어 있다. 한편 사기에서도 '不殊',즉 '실패하였다'라고 기록하여, 자살한 것은 아님을 명시하였다.
전임
감선
전한우부풍
기원전 89년 ~ 기원전 80년 9월 경오일
후임
주덕
전임
상홍양
전한어사대부
기원전 80년 9월 경오일 ~ 기원전 77년 2월 을축일
후임
양창
전임
전천추
전한승상
기원전 77년 2월 을축일 ~ 기원전 76년 12월 경술일
후임
양창
선대
(39년 전) 위항
전한의 의춘후
기원전 77년 ~ 기원전 76년 12월 경술일
후대
아들 의춘강후 왕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