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시다 쇼인

일본의 사무라이, 사상가, 교육자

요시다 쇼인(일본어: 吉田 松陰, 1830년 8월 4일 ~ 1859년 10월 27일)은 막말병학자, 교육자, 사상가, 존왕파로 메이지유신의 정신적 지도자이자 혁명이론가, 일본 우익사상의 창시자다.[1] 본명은 노리카타(矩方). 쇼인은 호(號)이며 통칭은 도라지로(寅次郎)다.

요시다 쇼인
吉田松陰
요시다 쇼인 상(야마구치현 문서관 소장)
요시다 쇼인 상(야마구치현 문서관 소장)
시대 막말
출생 분세이 13년 음력 8월 4일(1830년 9월 20일)
나가토국 하기촌
사망 안세이 6년 음력 10월 27일 (1859년 11월 21일)
에도 덴마 정
별명 휘 : 노리카타(矩方)
통칭 : 도라지로(寅次郎)
막부 에도 막부
조슈번
주군 모리 다카치카
관위 정4위
씨족 스기씨(杉氏) → 요시다씨(吉田氏)
부모 친부: 스기 유리노스케(杉百合之助), 숙부(양부) : 다마키 분노신
형제자매 스기 민지(杉民治), 가토리 미와코(楫取美和子)
묘소 사쿠라산 신사(桜山神社), 쇼인 신사(松陰神社), 야스쿠니 신사(靖国神社)

어려서는 병학에 매진하였고 20세때부터는 서양학문을 배웠으며, 영국이 중국을 간단히 굴복시킨 아편 전쟁의 소식을 들으면서 청소년기를 보냈다. 그가 속한 조슈 번은 중앙의 막부 정치에 활발하게 참여한 번이었기에 요시다 쇼인의 정치적 감각을 자극했다.[2] 해외유학을 위한 밀항에 실패하여 구속되었는데 석방된후로는 후진양성에 힘썼다.

저서 《유수록》을 통하여 일군만민론(一君萬民論), 정한론(征韓論), 대동아공영론(大東亞共榮論)을 주창하여 일본의 제국주의 팽창에 큰 영향을 끼쳤다.[3][4] 쇼카손주쿠 학당을 통해 그가 배출한 제자들이 훗날 메이지 유신과 근대화의 주도세력이 되었기에 유신의 정신적 지도자로 여겨진다.[3] 그의 제자로는 초대총독 이토 히로부미, 2대 총독 소네 아라스케, 데라우치 마사다케, 가쓰라 다로, 미우라 고로 등이 있다.

요시다 쇼인(よしだ しょういん)은 근현대 일본 우익사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핵심이자, 현대 일본의 정치경제계를 장악하고 있는 조슈벌(長州閥)의 사상적 아버지로도 간주된다. 그는 존왕과 막부타도를 외치다가 30세 나이에 처형 당했으나 짧은 생애에도 불구하고 메이지유신의 사상적 기초를 마련하는 등 그가 남긴 유산은 실로 엄청나다는 평가가 있다.[4]

생애 편집

출생 편집

요시다는 분세이 13년 음력 8월 4일 조슈번 하급무사 스기 유리노스케의 3남 4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5] 어렸을 때의 이름은 도라노스케(虎之助)였다. 요시다(吉田) 가문의 양자가 된 뒤에 다이지로(大次郎)로 개명하였으나 보통 도라지로(寅次郞)라고 불렸다. 본명은 노리가타(矩方)이며, 자(字)는 기케이(義卿), 호(號)는 쇼인(松陰)이다.

1834년, 5살때 야마가류(山鹿流) 병학사범(兵學師範)인 숙부 요시다 다이스케(吉田大助)의 양자가 되었는데, 다음해에 양부(養父)가 죽자 6살의 어린 나이에 병학사범이라는 가직을 승계하면서 요시다(よしだ) 가문을 계승하게 되었다. 이후에는 또 다른 숙부 다마키 분노신(玉木文之進)이 세운 쇼카손주쿠(松下村塾)에서 공부하였다. 11살 때에 번주(藩主)에게 〈무교전서 武敎全書〉를 강의하여 재능을 인정받는 일이 있었다.[1]

이후 혹독하고 엄격한 교육과정을 거쳐 19세에는 어엿한 병학사범으로 독립하면서 조슈 번의 하급무사로서 지배계층에 합류하게 되었다.[6]

수학 편집

1850년 병학연구를 위하여 번주의 허락하에 유학을 떠나 규슈 히라도번에서 하야마 사나이(1796-1864)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7] 해방론자로 유명한 하야마 사나이(葉山左内)는 그의 저서 《변비적안》을 통하여 아편전쟁에서 청나라가 패배한 원인은 아편과 기독교로 인해 중국이 혼란스워진것과 구미열강의 군사력이 우수한 것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서양병학 도입과 내치에 힘써야 한다고 주장했다.[7]

요시다는 하야마 사나이(葉山左内)로부터 <변비적안>과 <성무기부록>을 빌려 읽은후 큰 영향을 받았고[7], 아이자와 야스시(會澤安)의 저서 〈신론 新論〉을 읽고 아편전쟁에 대한 전말을 알게 되면서 국제정세의 흐름에 대해 눈을 뜨게 되었다.[1] 1851년 4월에는 에도(江戸, えど)로 가서 포학자 토시마 곤헤이, 아즈미 간사이, 야마가 소수, 후루카와 근이치로, 사쿠마 가미야마 등으로부터 서양병학을 배웠다. 다음해에는 히고번의 미야베 세이조와 야마가 소수, 사쿠마 쇼잔에게 서양 학문을 배웠다.[8][2]

동북부 여행 편집

1852년 말에 미야베 테이조(宮部鼎蔵) 등과 일본 동북부 지역으로 여행을 떠났다. 하지만 그는 조슈 정부로부터 구두 허가만 받았을뿐 서면 허가를 받지 않은채 출발하는 실수를 하고 말았다. 출발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한 행동이었지만 이는 탈번(脱藩)으로 당시 일본에서는 범죄행위에 해당했다. 아무튼 요시다는 여행기간 동안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많은 곳을 견학하며 견문을 높일 수 있었다.

미토에서 아이자와 마사시사이와 만났고, 아이즈에서 닛신관(日新館)과 토호쿠의 광산 등을 견학, 아키타에서는 소우마 대작 사건의 현장을 찾았다. 야마가류 고학자와의 교류를 위해 요네자와를 방문하는 등 많은 것들을 직접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는 유익한 시간을 보냈다. 1852년 초에 4개월간의 여행을 마치고 하기시로 돌아온후 탈번(脱藩)죄로 세록 몰수 처분과 사무라이 신분을 박탈 당했다.[9] 그러나 아버지 스기 유리노스케가 후견인이 된후 10년 동안 일본 각지에서 공부할 수 있는 허가 역시 받게 되었다.[10]

밀항실패와 수감생활 편집

1853년 초에 요시다 쇼인은 학업을 위해 에도(江戸)로 갔는데, 그해 6월에 미국의 페리 제독이 4척의 전함을 이끌고 우라가(浦賀)가 출현하여 고압적인 태도로 개항을 압박하는 일이 벌어졌다.[11] 그동안 보아온 배들은 나무로 건조한 작은 선박이 전부였는데 초대형 대포를 장착한 어마어마한 크기의 미국해군의 증기선을 보고 요시다 쇼인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12] 막번체제 아래에서는 선진화된 구미 열강을 따라잡지 못할 것임을 깨달은 쇼인은 국제정세와 선진문물을 배우기 위해서 해외유학을 결심하게 되었다. 그러나 카네코 지게노스케(金子重之輔)와 함께 나가사키(長崎)에서 러시아 군함에 밀항하여 해외 유학을 떠나려 했으나 실패했다. 1854년 3월에 미국의 페리 제독이 7척의 전함을 거느리고 다시 나타나서 개항을 압박하자 에도막부는 위력에 굴하여 미일화친조약을 맺고 말았다.[13]

이때 요시다 쇼인은 정박 중인 미 군함에 승선하여 밀항을 시도했다. 작은 배를 훔쳐 기함 포하탄호에 승선했으나 3월 27일 도항이 거부된채 체포되었다. 조슈(長州)로 이송된 뒤에 노야마(野山) 감옥에서 수감생활을 하였는데, 그곳에서 토미나가 유린(富永有隣), 다카스 히사코 등과 알게 되었고, 그들을 포함하여 여러명의 수형자들에게 <논어> <맹자>를 가르쳤다.[14]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강맹차기(講孟箚記)》를 저술하였다.

유수록 저술 편집

수감생활중에 밀항(密航)의 동기와 사상적 배경 등을 담은 《유수록 幽囚錄》을 썼다. 이 책에서 그는 “무력 준비를 서둘러 군함과 포대를 갖추고 즉시 홋카이도(蝦夷)를 개척하여 제후(諸侯)를 봉건(封建)하여 캄차카와 오호츠크를 빼앗고, 오카나와(琉球)와 조선(朝鮮)을 정벌하여 북으로는 만주(満州)를 점령하고, 남으로는 대만과 필리핀 루손 일대의 섬들을 노획하여 옛날의 영화를 되찾기 위한 진취적인 기세를 드러내야 한다”고 밝혔다. 이러한 그의 사상은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의 배경이 되는 정한론(征韓論)과 대동아공영론(大東亞共榮論) 등의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3]

후학양성 편집

1855년에 석방되었으나 가택연금 처분을 받았고 이듬해부터 자택에 마쓰시타 촌숙(松下村塾)을 열어 《무교전서》 강의를 시작했다.[15] 1856년에 숙부 다마키 분노신이 설립한 쇼카손주쿠를 인수하여 1857년에 학장으로 취임하였고, 하급 사무라이들을 교육하여 약 80여명의 제자를 배출했다.[2] 이때 그의 제자였던 다카스기 신사쿠, 구사카 겐즈이, 이노우에 가오루, 기도 다카요시, 야마가타 아리토모, 이토 히로부미존왕양이 지도자들을 배출하여 이후 메이지 유신의 주역이 되었다.

사망 편집

1858년 미일수호통상조약(美日修好通商条約)이 조정(朝廷)의 허락도 없이 체결되자 각지에서 반 막부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위해 마나베 아키카츠(間部詮勝)을 암살하려 했으나 제자인 구사카 겐즈이(久坂玄瑞) 등이 동조하지 않아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그러다 막부에서 반막부 세력을 대대적으로 탄압한 ‘안세이(安政)의 대옥’이 시작되자 구속되었고 암살계획이 발각되었다.

1859년 11월 21일(安政 6년 10월 27일) 에도에서 처형되어 29년 3개월이라는 짧은 생애를 마감했다. 그의 시신은 벌거벗겨져 나무통에 넣어진 채로 아무렇게나 매장되었으나, 후에 제자들이 예를 갖추어 이장했다.[16]

사세구는

설령 몸은 무사시의 들판에 썩을지라도 남겨두고 싶구나 야마토다마시
(身はたとひ 武蔵の野辺に 朽ちぬとも 留めおかまし 大和魂)

사상 편집

 
요시다 쇼인의 동상

일군만민론 편집

'천하는 천황이 지배하고, 그 아래 만민은 평등하다'는 즉 천황 아래에서 만인이 평등하다는 '일군만민론'(一君萬民論)을 주창하였다.[16][4] 이는 존왕양이 운동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12]

정한론 편집

《유수록(幽囚錄)》이라는 저서를 통해 정한론(征韓論)을 주창하였다. 요시다 사후인 1870년대에 일본의 부국강병론적 군국주의자들에게서 등장하여 일본의 제국주의 팽창에 큰 영향을 끼쳤다.

대동아공영론 편집

교육관 편집

요시다는 기존의 교육자들과 달리 교육의 대상에 신분이나 남녀의 구별을 두지 않았다. 또한 쇼군이나 번주와 같은 일본의 기존 통치자들이 외국의 위협에 무능하여 권위를 상실했다고 주장하며, 오직 천황만 믿고 존경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일본의 구원은 부나 관직에 의해 더럽혀지지 않은 깨끗한 자들이 봉기하는 데 있다고 했다. 그리고 이 봉기는 결연한 의지를 가진 소수의 사무라이가 지도하고 천황에 대한 충성심으로 통합함으로써 가능하다고 보았다. 국가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시킬 수 있을 정도의 완전한 헌신을 사무라이에게 요구한 것이다. 사무라이의 결연한 의지를 아주 순수한 형태로 강조하며 제자들을 양성했다.[2]

사후 편집

 
요시다 쇼인

유신삼걸 중 하나인 기도 다카요시(이때 가쓰라 고고로), 과격파 유신지사의 대표격이자 기병대의 수장인 다카스기 신사쿠, 이토 히로부미, 그와 함께 권세를 누린 이노우에 가오루 등 유신의 주요인사들이 쇼인의 죽음으로 분기했다.

한편 존왕양이를 주창한 요시다 쇼인의 제자들이 훗날 커다란 정치가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은 역설적으로 요시다 쇼인을 버렸기 때문이라는 견해도 있다[16].

2006년 9월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가 그를 가장 존경한다고 밝히기도 했다[16]. 일본의 우익단체 중에는 그의 이름과 그가 활약하던 학당인 '쇼(松)'라는 글자를 따서 그의 정신을 기리는 쇼콘주쿠(松魂塾)라는 학당이 있어 그의 학맥이 계승될 만큼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쇼카손주쿠 내에 쇼인을 모신 신사(神社)가 세워져 성역화되기도 하였다.

저서 편집

  • 《유수록(幽囚錄)》
  • 《유혼록(留魂錄)》
  • 《강맹차기(講孟箚記)》

등장 작품 편집

드라마 편집

NHK 대하드라마

각주 편집

  1. [[다음백과] 요시다 쇼인 Yoshida Shoin , 吉田松陰
  2. [네이버 지식백과] 스러진 시대정신의 소유자, 요시다 쇼인 - 에도시대의 지사(1830년 ~ 1858년) (일본사 다이제스트 100, 2011. 12. 30., 정혜선)
  3. [네이버 지식백과] 요시다 쇼인 [Yoshida Shōin, 吉田松陰(길전송음)]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4. 전계완 <일본, 다시 침략을 준비한다> 지혜나무 2014년 p161
  5. [네이버 지식백과] 요시다 쇼인 [吉田松陰] - 막번 체제가 낳은 광기의 사상가 (일본 학자, 이희복)
  6. [네이버 지식백과] 요시다 쇼인 [吉田松陰] - 막번 체제가 낳은 광기의 사상가 (일본 학자, 이희복)
  7. 栗田尚弥葉山佐内の思想に関する一考察―「思想家」吉田松陰誕生前史」法学新報第121巻 第9・10号,2015,中央大学法学部,p185-232.
  8. 「兵法者の生活」第六章.幕末兵法武道家の生涯 二.山鹿素水の業績(P217-220)
  9. [네이버 지식백과] 요시다 쇼인 [吉田松陰] - 막번 체제가 낳은 광기의 사상가 (일본 학자, 이희복)........탈번의 결과는 혹독했다. 번국 조치에 따라 쇼인은 5월 12일 하기에 돌아왔다. 그리고 12월 9일 근신 중이던 쇼인에게 하기 번정이 내린 결정은 요시다 가문의 폐절과 무사 신분의 박탈, 그리고 57석인 가록의 몰수라는 처벌이었다. 그토록 번주와 중추 가신들의 기대와 촉망을 한 몸에 받았던 쇼인이었지만 번정의 권력싸움에 휘말려 모든 특권을 상실하며 평민신분으로 전락하였던 것이다.
  10. Huber, T. (1981). Revolutionary Origins of Modern Japan. Stanford, Ca: Stanford University Press
  11. 강창일,하종문 <한 권으로 보는 일본사 101 장면> 가람기획 1998.11.20 p270
  12. 양은경 '''<일본사를 움직인 100인>''' 청아출판사, 메이지 일본의 건설자, 요시다 쇼인, 도라지로(寅次郞), 吉田松陰
  13. 강창일,하종문 <한 권으로 보는 일본사 101 장면> 가람기획 1998.11.20 p271
  14. 村上一郎 『草莽論』ちくま学芸文庫、2018年、P.209頁
  15. 吉田松陰全集1 岩波書店刊
  16. (특파원 칼럼) 요시다 쇼인과 아베 신조[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한국일보 2006년 9월 24일자 기사

외부 링크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