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위
생애
편집1360년(공민왕 9) 문과에 동진사(同進士)로 급제하였다.[1]
1390년(공양왕 2) 공양왕(恭讓王)이 처음으로 경연(經筵)을 열었을 때 이행(李行)·성석용(成石瑢)·민개(閔開)와 함께 참찬관이 되었으며[2], 같은 해 좌부대언(左副代言)으로서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 이성계(李成桂)와 함께, 이성계를 비판한 예조판서(禮曹判書) 윤소종(尹紹宗)에게 죄주는 일을 반대했으나, 왕은 끝내 이를 듣지 않고 윤소종을 금주(錦州)로 추방했다.
역시 같은 해 밀직사부사(密直司副使)로 승진했다가, 이듬해 서해도도관찰사(西海道都觀察使)로 나갔다.[2]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1396년(태조 5) 도성감역관(都城監役官) 박리(朴理)가 궁궐 축조를 위해 군인들을 시켜 큰 돌을 운반하다가, 길이 좁아 이사위의 집 울타리를 철거한 일이 있었다.
이 때 이사위는 그를 구타하고 모욕을 주었기 때문에 형조(刑曹)가 왕에게 상소했고, 순군옥(巡軍獄)에 갇혔다가 10일 후 석방되었다.[3]
이후 관직이 유후(留後)에 이르렀다.[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