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화 (고려)

이세화(李世華, ?~1238년 9월 25일(음력 8월 16일[1]))는 고려문신이다. 자(字)는 거실(居實)이고 본관은 정주(貞州: 현 개성특별시 개풍군)이다.

생애편집

아버지는 이름을 알 수 없고 검교대장군(檢校大將軍)을 지냈다는 기록만 있으며, 어머니는 해양군부인(海陽郡夫人) 김씨(金氏)이다.[1]

1198년(신종 원년)에 국자감시에 응시해 합격했다.[1]

1202년(신종 5년)에 병과(丙科)에 급제했다.[1]

희종 때 다방(茶房)에 있었고 얼마 뒤에 잠시 면직되었다가 다시 내시(內侍)에 있었다.[1]

강종이 사망하자 규례에 따라 잠시 면직되었다. 그 후 견주(見州: 현 경기도 양주시) 감목(監牧)에 제수 되었다.[1]

1216년(고종 3년)에 도병마녹사(都兵馬錄事)에 임명되었고, 1217년(고종 4년)에 정융분도(定戎分道)가 되었는데 이 때 조충의 막하에 있었다. 조충은 이후 표(表)를 올려 막하에 머물게 한 다음 그를 중요하게 썼으며, 조충은 조정에 돌아와 이세화를 천거해 이세화는 대영서 승(大盈署丞)에 제수되었다.[1]

1220년(고종 7년)에 백령진(白翎鎭: 현 인천광역시 옹진군 백령면) 장(將)이 되었는데, 고을을 잘 다스렸고 그 지역에 향교를 처음으로 설치해 향리의 자제들을 모아 글을 가르쳤으며, 여기에서 공거(貢擧)에 응시한 사람들이 나왔다.[1]

그 후 신호위 녹사(神虎衛錄事), 도병마(都兵馬), 내원서령 비서랑(內園署令祕書郞) 등의 관직을 거쳤다.[1]

1224년(고종 11년) 여름에는 중서주서(中書注書)에 있었고, 겨울에는 우정언 지제고(右正言知制誥)에 있었으며 얼마 뒤에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로 임명되었고 비어대(緋魚袋)를 하사받았으며, 얼마 안 가 우사간 지제고(右司諫知制誥)로 임명되었다.[1]

1227년(고종 14년) 남원부(南原府: 현 전라북도 남원시)의 원이 되었고, 1228년(고종 15년)에는 동주(東州: 현 강원도 철원군)의 원으로 임명되었는데, 정치를 잘한다는 평가를 받았다.[1]

1230년(고종 17년)에는 시어사 금자(侍御史金紫)로 임명되었고, 1231년(고종 18년)에는 경상도 안찰사가 되었다.[1]

이 때 몽골이 고려를 침입해(제1차 고려-몽골 전쟁) 다섯 개의 도의 염안사(廉按使)가 모두 군사를 거느리고 구원하러 가게 되었는데, 이세화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빨리 도착했고 군대를 지휘하는 것이 마치 노련한 장수가 하는 것처럼 해서 이를 들은 사람들이 이세화를 위대하다고 여겼다.[1]

1232년(고종 19년) 예빈 소경 어사잡단(御史雜端)에 임명되었다. 여름에 몽골이 고려를 침략하자 조정은 수도를 강화도로 옮기려 했는데, 광주(廣州: 현 경기도 광주시)는 중요한 진(鎭)이라 조정의 논의를 거쳐 이세화를 광주를 방어하는 적임자로 보내 광주를 지키게 했다. 11월에 몽골이 수십 겹으로 포위하고 몇 달 동안을 온갖 수단으로 공격했는데, 이세화는 밤낮으로 수비를 튼튼히 하고 수시로 응변해 몽골이 예측할 수 없게 했으며 또한 사로잡히거나 죽은 몽골군이 많기 때문에 몽골군은 광주성 함락이 불가능한 일임을 알고 철수했다.[1]

1235년(고종 22년)에 조산대부(朝散大夫) 예부시랑 우간의대부 보문각직학사 지제고(禮部侍郞右諫議大夫寶文閣直學士知制誥)로 임명되었으며, 얼마 후에 이부 시랑(吏部侍郞)으로 관직을 옮겼다.[1]

1237년(고종 24년)에 청주산성(淸州山城)에서 몽골군을 격퇴했다.[1]

1238년(고종 25년)에 음력 8월 15일에 집에 있으면서 달구경을 하면서 조용히 즐기던 중 잔을 들다가 갑자기 쓰러져 다음날인 음력 8월 16일 새벽에 사망했다.[1]

전기 자료편집

  • 이규보, 《동국이상국집》, 〈후집〉12, 이세화 묘지명

각주편집

  1. 이규보, 《동국이상국집》, 〈후집〉12, 이세화 묘지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