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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룡(丁鎭龍, 1915년-1947년 4월 19일)은 미 군정 시기 공산주의계열 정치깡패이다.

정진룡
丁鎭龍
출생 1915년
일제 강점기 일제 강점기
사망 1947년 4월 19일 (32세)
미국 미 군정 조선 서울특별자유시 중구
국적 미국 미 군정 조선
직업 공산주의운동가
배우자 김해숙
자녀 1남 1녀

알려진 바에 의하면 일제 강점기 시절 김두한과 함께 활동하였던 주먹이었다고 하며, 해방 후 좌익계열 어용단체인 조선민주청년동맹(조선청년전위대)에서 정치깡패로 활동하였다.

1947년 좌익단체가 주최한 '청춘의 봄'이라는 연극의 경호를 담당하고 있던 중에 대한민청 감찰부장 김두한과 그 부대원에게 기습당하였고 대한민청본부로 끌려가 피살되었다(시공관 사건).[1]

아래는 용의자로 구속된 김두한을 조사한 미군정의 수사 기록이다.

정진룡과 그의 무리들은 이승만을 사기꾼이고 자기중심적인 정치인이라고 비방하는 팜프렛을 배포하기 위해서 동원되었다. 4월 20일, 김두한은 이 시점이 그의 오랜 친구를 다시 자기에게로 돌아오게 할 좋은 기회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그는 부하들을 보내서 반 이승만 유인물을 배포하는 사람들을 잡아오게 했다. 김의 부하는 극장과 서울의 시장거리를 배회하면서 정과 그의 부하를 잡아들였다. 김과 그의 부하들은 그들이 그들의 과거의 잘못을 인식하기를 희망하면서 이들을 폭행하기 시작했다. 폭행은 길고 단단한 일본 단풍나무로 만든 몽둥이로 행해졌다. 정은 박헌영 부재 시 남로당의 대표였던 허헌에게서 명령을 받았다고 했고 그는 공산주의 지도자들의 모든 명령에 복종한다고 말했다. 그는 심지어 이승만을 역적이라고 말했다. 이 순간에 김이 이성을 잃고 정의 가슴을 찼다. 그는 그의 오랜 친구에게 철회를 요구했지만 정은 거절했다. 김은 또 한방을 더 때렸고 그것으로 인해 정은 체내 출혈이 시작되었고 곧바로 죽었다.
 
— 미군정 수사문서 : US Army lnteligence Center, History of the Counter Intelligence Corps, XXX: CIC During the Occupation in Korea(March 1959), p.92-94

나는 바보

대중매체에서의 묘사편집

정진영은 김두한의 오랜 죽마고우 친구였고 어린 시절부터 청계천 아래에서 모친과 함께 거지로 살았다. 또한 어렸을적의 거지시절 김두한과 함께 형제처럼 살아왔다. 일제 밀정이었던 아버지가 죽은 후 집안이 몰락하였고 그 과정에서 공산주의 사상에 심취했으며, 시험에 통과하기 위해 법학을 공부하다가 김두한이 우미관을 중심으로 주먹왕으로 군림했을 때 그의 부하로 들어가게 된다. 김두한은 정진영의 쇠락한 집안을 경제적으로 많이 지원해 주었으며 정진영의 결혼도 김두한이 직접 도와주었다.[2] 이후 그는 고보 출신이었던 김영태와 함께 조직의 브레인을 맡았고, 일본어에도 능숙하였기 때문에 일본 야쿠자와의 결투 과정에서 특사 파견 업무를 맡기도 하였다.

해방 후 정진영은 만담가 신불출과 교류하면서 본격적으로 공산주의 노선을 걸었고, 김두한은 정진영의 부탁으로 조선공산당의 산하인 조선청년전위대에 김두한과 함께 가입하여 좌익 정치깡패로 활동하였다.

하지만 얼마 안가 김두한은 아버지 김좌진 장군의 죽음을 알게 되자 전위대를 탈퇴하였고 우익으로 돌아섰다. 정진영은 박헌영의 납치시도 소식을 듣고, 김두한과 단둘이서 대화하자며 김두한의 아버지 죽음의 진실을 듣게 된다. 김두한은 정진영에게 전위대를 탈퇴하라고 했지만 거절했고 정진영은 전위대에 돌아와 달라고 부탁했지만, 김두한 역시 거절을 할 수 밖에 없었고 형제나 다름없던 친구가 서로 적이 되어 싸우게 된 비극이 되었다.

그 후 정진영은 자신을 따르는 세력을 모아 김두한으로부터 독립하여 박헌영으로부터 조선청년전위대 대장으로 임명되었다. 신불출은 김두한이 전위대를 탈퇴하고 조선인민군 육군소장으로 임명을 못하게 되자 정진영을 조선인민군 육군소장으로 추천했다. 그 이후로 김두한과 극심하게 대립하였으며, 수많은 파업을 진행하였고 공산주의를 선동하는 등 열심히 활동하였으나 김두한과 우미관의 대한민청 간부와 부하들에게 매번 당하고 실패하였다.

1947년 4월 18일 대한민청 본부에서 김두한의 간부들과 부하들이 김일성 별장습격과 이승만의 귀국호위 일로 부재중이었을 때 김두한의 부하들이 부재중인 정보를 들은 정진영은 전위대 간부들과 전위대원 20여명을 이끌고 대한민청 본부를 습격하였다. 그러나 김두한의 부하들이 일찍 돌아왔고, 정진영은 김두한의 암살에 실패하여 도주하였다. 1947년 4월 19일 정진영은 조선공산당의 지시로 극장에서 청춘의 봄이라는 연극을 경호하고 있었다. 김두한의 대한민청대원들이 극장을 습격을 했다. 정진영은 부관인 김천호와 함께 도주를 했지만 김두한의 간부들과 부하들은 예상되는 도주로를 차단했고, 결국 정진영과 간부들, 대원들은 포위당해 생포되어 대한민청본부로 끌려갔다.

지독한 고문이 계속되었고 전향을 권유받았지만 모두 거부하였고, 김천호와 전위대 간부들과 전위대원들은 고문을 받고 피살당하여 시체는 암매장되었다. 김두한은 정진영에게 예전처럼 함께 살자며 수없이 기회를줬지만 정진영은 서로의 이념으로 인해 계속 거절했고 결국은 김두한에게 피살되었다. 하지만 전향서를 쓰고 살아남은 전위대 간부의 신고로 사건 진압을 위해 출동한 미군들에 의해 대한민청 본부에 살해당한 시체들이 발견되었다. 이 때 김두한의 대한민청 간부였던 신영균은, 신고를 하여 증인을 한 전위대 간부를 미군들 눈앞에서 권총으로 살해했고, 김두한과 대한민청 간부와 부대원들은 모두 현행범으로 검거되었다. 이 사건은 대한민청 테러 사건이라고도 불린다.

정진영의 시신은 화장되었고 한강에 뿌려졌다. 정진영은 아들과 딸을 하나두었고 아내 김해숙은 큰술집에서 근무하던 직원이였고 공산주의에 심취했던 여자였다. 신불출의 소개로 만났었다. 그둘은 결혼하였고 김해숙은 정진영을 따라 공산주의 활동을 했었다. 정진영의 아내인 김해숙은 파업현장에서 사살되었다. 정진영이 죽기 2달전 김해숙의 오빠는 부모와 조카들을 데리고 월북을 하였다.

정진영이 등장하는 작품편집

각주편집

  1. “수도경찰청, 정진용 테러 사건 수도청발표”. 동아일보. 1947년 4월 25일. 
  2. “노변야화 정진영에 대한 내용”. 동아방송. 1969년 11월 10일 방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