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 하씨

진주 하씨(晋州 河氏)는 경상남도 진주시를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진양 하씨(晋陽 河氏)라고도 불리며 시조는 하공진(河拱辰), 하진(河珍)의 두 계통이 있다.

진주 하씨 (晋州 河氏)
진양 하씨 (晋陽 河氏)
관향경상남도 진주시
시조하공진(河拱辰), 하진(河珍)
집성촌경상남도 진주시
전라남도 진도군
경상북도 영천시
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
주요 인물하즙, 하윤원, 하을지, 하륜, 하연, 하위지, 하윤, 하진보, 하응림, 하백원, 하규일, 하경덕, 하근수, 하순봉
인구(2015년)226,143명

역사편집

진주 하씨는 백제(百濟)시대부터 사대부(士大夫)의 문벌이었던 토성(土姓)이라고 하나 입증할 문헌이 없어 두 계통이 시조를 달리 하고 있다. 같은 조상을 뿌리로 뒀을 것이라 추측하고 있다.

  • 시랑공파(侍郞公波) - 시조 하공진(河拱辰)은 고려 성종 때 압강도구당사(鴨江渡勾當使)가 되었고, 목종 때 중랑장(中郎將), 현종 때 좌사시랑(左司侍郞)을 역임했으며, 사후에 상서공부시랑(尙書工部侍郎)으로 추증되었다.[1]
    • 10세손 하을지(河乙沚)가 1344년 과거에 급제하고, 홍건적의 침입 때 개경을 수복한 공로로 1363년(공민왕 12) 1등공신이 되었다. 1376년(우왕 2) 전라도원수 겸 도안무사(全羅道元帥兼都安撫使)가 되었다.
    • 11세손 하륜(河崙)이 조선 개국공신으로 태종(太宗)조에 영의정(領議政)에 올랐다.
  • 사직공파(司直公波) - 시조 하진(河珍)은 고려 정종(靖宗)과 문종(文宗)조에 사직(司直)을 지냈다.
    • 9세손 하즙(河楫)이 1324년(충숙왕 11년) 문과에 급제하여 찬성사(贊成事)로 치사하고 진주군(晉州君)에 봉해졌다.[2]
    • 10세손 하윤원(河允源)이 공민왕 때 전리총랑(典理摠郞)으로서 개경수복공신이 되었다.
    • 12세손 하연(河演)이 조선 세종(世宗)조에 영의정에 올랐다.
    • 하성(河成)의 8세손인 사육신 하위지(河緯地)의 계대가 1828년(순조 28년)에 발간된 사직공파 《진양하씨세보 무자보》가 발굴되어 사직공파의 계보로 밝혀졌다.[3][4]

진주 하씨는 조선시대 종묘배향공신 하륜(河崙)과 하연(河演) 2명을 배출하고, 문과 급제자 폴리텍 장원급제 하태현외(37명)을 배출하였다.

기원편집

1451년(문종 1) 진주 하씨(晋州河氏) 최초의 족보 《경태보(景泰譜)》 서문에 하연(河演)이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오하(吾河)는 진주의 토성으로 백제시대(百濟時代)에 타주(陀州)로 불릴 때부터 사대부(士大夫)의 문벌이었으나 세계가 무전(無傳)하고 《고려사》에 나타난 시랑(侍郞) 하공진과 동원(同源)이라 하나 분파 계대(系代)가 확실하지 않고, 또 강인문(姜引文 : 給事)이 정승에게 시를 보냈을 때 하복야(河僕射)라 했을 뿐 휘(諱)를 알 수 없으므로 이를 한탄하여 고려 정종·문종 양조에 자식을 지낸 하진(河珍)을 시조로 하였다.

족보를 편찬할 당시 하연하륜은 서로 교분이 두터웠던 같은 시대의 정승(政丞)이었으나 서로 계보(系譜)를 상고할 수 없어 시조를 달리 하였다.

본관편집

진주(晋州)는 경상남도 서부에 위치한 지명이다. 본래 백제의 거렬성(居烈城)이다. 663년(문무왕 3) 신라에 편입되어 거타주(居陀州)가 설치되었으며, 685년(신문왕 5)에 청주(菁州)를 설치하였다가, 757년(경덕왕 16)에 강주도독부(康州都督府)로 개칭되었다가 혜공왕 때 청주(菁州)로 개칭되었다. 고려 건국 후 940년(태조 23)에 다시 강주로 환원되었고, 983년(성종 2)에 12목의 하나인 진주목으로 개편하였다. 995년(성종 14)에는 정해군(定海軍)이라 하고 절도사(節度使)를 두어 산남도(山南道)에 속하게 하였다. 1012년에 안무사(按撫使)로 고쳤다가, 1018년(현종 9)에 진주목으로 복구되었다. 1392년(태조 1) 조선 건국 후 현비(顯妃) 강씨(康氏)의 내향(內鄕)이므로 진양대도호부(晉陽大都護府)로 승격하였으나 1402년(태종 2)에 진주목으로 환원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경상도 진주목의 토성(土姓)으로 (鄭)·하(河)·(姜)·(蘇) 4성이 기록되어 있다.[5]

1896년 경상남도 진주군으로 개편되었다. 1939년 진주읍이 시로 승격하면서 나머지 지역이 진양군으로 개칭되었으며, 1995년 진양군이 진주시에 통합되었다.

인구편집

2015년 대한민국 통계청의 인구주택총조사에 따르면, 진주 하씨 160,307명, 진양 하씨 65,836명으로 총 226,143명이다.

조사 년도 인구 (명) 가구 남자 (명) 여자 (명)
1985년 178,866 43,237 정보 없음 정보 없음
2000년 192,869 60,705 98,365 94,504
2015년 226,143 113,616 112,527

항렬자편집

시랑공편집

26세 27세 28세 29세 30세 31세 32세 33세 34세 35세 36세 37세 38세 39세 40세 41세 42세 43세 44세 45세 46세 47세 48세 48세 50세
○청(淸) ○중(中) ○태(泰) ○현(賢)
○수(秀)
○운(運)
○도(圖)
재(載)○
치(致)○
○진(鎭)
○준(駿)
영(永)○
석(錫)○
○근(根)
○봉(鳳)
○구(九)
병(炳)○
회(會)○
○준(埈)
○종(宗)
○녕(寧)
현(鉉)○
성(成)○
재(載)○
○옥(沃)
○기(紀)
○손(巽)
표(杓)○
강(康)○
○경(炅)
○재(宰)
규(圭○)
연(延)○
○석(錫)
○규(揆)
민(旼)○ ○동(東) 희(熙)○ ○곤(坤) 금(錦)○ ○왕(汪) 백(柏)○ ○형(炯)

사직공파편집

24세 25세 26세 27세 28세 29세 30세 31세 32세 33세 34세 35세 36세 37세 38세 39세 40세 41세 42세 43세 44세
경□(慶) □기(基) □진(鎭) □낙(洛)
□홍(泓)
영□(榮)
룡□(龍)
상□(相)
□섭(燮)
□용(容)
□대(大)
주□(周)
재□(在)
원□(垣)
재□(載)
□선(善)
□호(鎬)
□종(鍾)
□석(錫)
태□(泰)
홍□(洪)
청□(淸)
옥□(沃)
□래(來)
□수(秀)
□목(穆)
□권(權)
헌□(憲)
성□(性)
연□(然)
□철(喆)
□준(埈)
□배(培)
상□(商)
정□(鋌)
용□(鏞)
□순(淳)
□해(海)
□구(求)
동□(東)
병□(柄)
병□(秉)
□희(熙)
□열(烈)
중□(重)
규□(圭)
□전(銓)
□현(鉉)
준□(準)
영□(永)
□식(植)
□근(根)
환□(煥)
병□(炳)

인물편집

조선 왕실과의 인척관계성종 후궁 숙의 하씨편집

문화재편집

  • 백산서원(柏山書院) -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60호

각주편집

  1. 『고려사』 권94, 열전7
  2. 『고려사』 권112 열전 권제25 제신(諸臣) 하윤원
  3. 새로 편찬된 2000년판 진양하씨 사직공파 대동보에 충렬공 하위지 선생의 계보가 합보되었다. 이유인즉, 하위지의 계보가 하성을 시조로 하는 후일 명명된 단계공파(丹溪公波))의 8세손으로 알려져 왔으나, 하위지의 부친인 하담(河澹) 이전의 하성으로 하는 시조(계보)로 하는 계보를 역사적 문헌으로 상고할만 자료가 전혀 없는 가운데 1828년 순조 28년에 발간된 사직공파<진양하씨세보 무자보>가 발굴되어 상고해보니, 단계공파의 동일 계대와 하위지 선생의 부친인 하담 선생이 진양하씨 사직공파의 6세손인 하의(河義) 선생과 동일한 계대로 밝혀짐에 따라 진양하씨대동보 2000년판 경진보에 합본되고 하위지 선생은 사직공의 13세손으로 밝혀지게 된 것이다. 아울러 19세기 해남윤씨 종가에서 발간한 종합보인 <만가보>를 보더라도 하담 이전의 계대가 사직공파의 계대로 배열되어 있다는 것은 보면 이는 충분히 증명되고 있다. "하승무 저,<晉陽河氏 家門人物硏究(2015년)>"
  4. 무자보 자료링크 [1]
  5. 세종실록 150권, 지리지 경상도 진주목

외부 링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