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 하씨
진주 하씨(晋州 河氏)는 경상남도 진주시를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진양 하씨(晋陽 河氏)라고도 불리며 시조는 하공진(河拱辰), 하진(河珍)의 두 계통이 있다.
관향 | 경상남도 진주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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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 하공진(河拱辰), 하진(河珍) |
집성촌 | 경상남도 진주시 전라남도 진도군 경상북도 영천시 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 |
주요 인물 | 하즙, 하윤원, 하을지, 하륜, 하연, 하위지, 하윤, 하진보, 하응림, 하백원, 하규일, 하경덕, 하근수, 하순봉 |
인구(2015년) | 226,143명 |
역사편집
진주 하씨는 백제(百濟)시대부터 사대부(士大夫)의 문벌이었던 토성(土姓)이라고 하나 입증할 문헌이 없어 두 계통이 시조를 달리 하고 있다. 같은 조상을 뿌리로 뒀을 것이라 추측하고 있다.
- 시랑공파(侍郞公波) - 시조 하공진(河拱辰)은 고려 성종 때 압강도구당사(鴨江渡勾當使)가 되었고, 목종 때 중랑장(中郎將), 현종 때 좌사시랑(左司侍郞)을 역임했으며, 사후에 상서공부시랑(尙書工部侍郎)으로 추증되었다.[1]
진주 하씨는 조선시대 종묘배향공신 하륜(河崙)과 하연(河演) 2명을 배출하고, 문과 급제자 폴리텍 장원급제 하태현외(37명)을 배출하였다.
기원편집
1451년(문종 1) 진주 하씨(晋州河氏) 최초의 족보 《경태보(景泰譜)》 서문에 하연(河演)이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오하(吾河)는 진주의 토성으로 백제시대(百濟時代)에 타주(陀州)로 불릴 때부터 사대부(士大夫)의 문벌이었으나 세계가 무전(無傳)하고 《고려사》에 나타난 시랑(侍郞) 하공진과 동원(同源)이라 하나 분파 계대(系代)가 확실하지 않고, 또 강인문(姜引文 : 給事)이 정승에게 시를 보냈을 때 하복야(河僕射)라 했을 뿐 휘(諱)를 알 수 없으므로 이를 한탄하여 고려 정종·문종 양조에 자식을 지낸 하진(河珍)을 시조로 하였다.
족보를 편찬할 당시 하연과 하륜은 서로 교분이 두터웠던 같은 시대의 정승(政丞)이었으나 서로 계보(系譜)를 상고할 수 없어 시조를 달리 하였다.
본관편집
진주(晋州)는 경상남도 서부에 위치한 지명이다. 본래 백제의 거렬성(居烈城)이다. 663년(문무왕 3) 신라에 편입되어 거타주(居陀州)가 설치되었으며, 685년(신문왕 5)에 청주(菁州)를 설치하였다가, 757년(경덕왕 16)에 강주도독부(康州都督府)로 개칭되었다가 혜공왕 때 청주(菁州)로 개칭되었다. 고려 건국 후 940년(태조 23)에 다시 강주로 환원되었고, 983년(성종 2)에 12목의 하나인 진주목으로 개편하였다. 995년(성종 14)에는 정해군(定海軍)이라 하고 절도사(節度使)를 두어 산남도(山南道)에 속하게 하였다. 1012년에 안무사(按撫使)로 고쳤다가, 1018년(현종 9)에 진주목으로 복구되었다. 1392년(태조 1) 조선 건국 후 현비(顯妃) 강씨(康氏)의 내향(內鄕)이므로 진양대도호부(晉陽大都護府)로 승격하였으나 1402년(태종 2)에 진주목으로 환원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경상도 진주목의 토성(土姓)으로 정(鄭)·하(河)·강(姜)·소(蘇) 4성이 기록되어 있다.[5]
1896년 경상남도 진주군으로 개편되었다. 1939년 진주읍이 시로 승격하면서 나머지 지역이 진양군으로 개칭되었으며, 1995년 진양군이 진주시에 통합되었다.
인구편집
2015년 대한민국 통계청의 인구주택총조사에 따르면, 진주 하씨 160,307명, 진양 하씨 65,836명으로 총 226,143명이다.
조사 년도 | 인구 (명) | 가구 | 남자 (명) | 여자 (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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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 178,866 | 43,237 | 정보 없음 | 정보 없음 | |
2000년 | 192,869 | 60,705 | 98,365 | 94,504 | |
2015년 | 226,143 | 113,616 | 112,527 |
항렬자편집
시랑공편집
26세 | 27세 | 28세 | 29세 | 30세 | 31세 | 32세 | 33세 | 34세 | 35세 | 36세 | 37세 | 38세 | 39세 | 40세 | 41세 | 42세 | 43세 | 44세 | 45세 | 46세 | 47세 | 48세 | 48세 | 50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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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淸) | ○중(中) | ○태(泰) | ○현(賢) ○수(秀) |
○운(運) ○도(圖) |
재(載)○ 치(致)○ |
○진(鎭) ○준(駿) |
영(永)○ 석(錫)○ |
○근(根) ○봉(鳳) ○구(九) |
병(炳)○ 회(會)○ |
○준(埈) ○종(宗) ○녕(寧) |
현(鉉)○ 성(成)○ 재(載)○ |
○옥(沃) ○기(紀) ○손(巽) |
표(杓)○ 강(康)○ |
○경(炅) ○재(宰) |
규(圭○) 연(延)○ |
○석(錫) ○규(揆) |
민(旼)○ | ○동(東) | 희(熙)○ | ○곤(坤) | 금(錦)○ | ○왕(汪) | 백(柏)○ | ○형(炯) |
사직공파편집
24세 | 25세 | 26세 | 27세 | 28세 | 29세 | 30세 | 31세 | 32세 | 33세 | 34세 | 35세 | 36세 | 37세 | 38세 | 39세 | 40세 | 41세 | 42세 | 43세 | 44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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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慶) | □기(基) | □진(鎭) | □낙(洛) □홍(泓) |
영□(榮) 룡□(龍) 상□(相) |
□섭(燮) □용(容) □대(大) |
주□(周) 재□(在) 원□(垣) 재□(載) |
□선(善) □호(鎬) □종(鍾) □석(錫) |
태□(泰) 홍□(洪) 청□(淸) 옥□(沃) |
□래(來) □수(秀) □목(穆) □권(權) |
헌□(憲) 성□(性) 연□(然) |
□철(喆) □준(埈) □배(培) |
상□(商) 정□(鋌) 용□(鏞) |
□순(淳) □해(海) □구(求) |
동□(東) 병□(柄) 병□(秉) |
□희(熙) □열(烈) |
중□(重) 규□(圭) |
□전(銓) □현(鉉) |
준□(準) 영□(永) |
□식(植) □근(根) |
환□(煥) 병□(炳) |
인물편집
조선 왕실과의 인척관계성종 후궁 숙의 하씨편집
- 고성옹주(정종의 서녀) 사위 하징
문화재편집
- 백산서원(柏山書院) -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60호
각주편집
- ↑ 『고려사』 권94, 열전7
- ↑ 『고려사』 권112 열전 권제25 제신(諸臣) 하윤원
- ↑ 새로 편찬된 2000년판 진양하씨 사직공파 대동보에 충렬공 하위지 선생의 계보가 합보되었다. 이유인즉, 하위지의 계보가 하성을 시조로 하는 후일 명명된 단계공파(丹溪公波))의 8세손으로 알려져 왔으나, 하위지의 부친인 하담(河澹) 이전의 하성으로 하는 시조(계보)로 하는 계보를 역사적 문헌으로 상고할만 자료가 전혀 없는 가운데 1828년 순조 28년에 발간된 사직공파<진양하씨세보 무자보>가 발굴되어 상고해보니, 단계공파의 동일 계대와 하위지 선생의 부친인 하담 선생이 진양하씨 사직공파의 6세손인 하의(河義) 선생과 동일한 계대로 밝혀짐에 따라 진양하씨대동보 2000년판 경진보에 합본되고 하위지 선생은 사직공의 13세손으로 밝혀지게 된 것이다. 아울러 19세기 해남윤씨 종가에서 발간한 종합보인 <만가보>를 보더라도 하담 이전의 계대가 사직공파의 계대로 배열되어 있다는 것은 보면 이는 충분히 증명되고 있다. "하승무 저,<晉陽河氏 家門人物硏究(2015년)>"
- ↑ 무자보 자료링크 [1]
- ↑ 세종실록 150권, 지리지 경상도 진주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