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 2세

잉글랜드와 아일랜드의 국왕이자 스코틀랜드의 국왕

찰스 2세(Charles II, 1630년 5월 29일 ~ 1685년 2월 6일)는 1649년 1월 30일 (법률상) 혹은 1660년 5월 29일 (사실상)부터 자신의 사망까지 잉글랜드아일랜드국왕이자 스코틀랜드국왕이다. 잉글랜드 내전에 이어 그의 부친 찰스 1세는 처형되었고, 그러고나서 왕정이 폐지되었고 비록 군사 점령과 사실상 계엄령 아래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와 더불어 호국경 올리버 크롬웰 아래 잉글랜드, 그리고 그후에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는 연합 공화국이 되었다. 크롬웰이 사망한지 짧은 후 1660년 왕정이 찰스 2세 아래 복원되었다. 그는 자신의 왕실의 활기와 쾌락주의에 참고로 "즐거운 왕정"으로 인기있게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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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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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위
잉글랜드의 군주
스코트인의 왕
재위 1660년 ~ 1685년
전임 찰스 1세
후임 제임스 2세
신상정보
가문 스튜어트가
부친 찰스 1세
모친 앙리에트 마리 드 프랑스
배우자 브라간사의 캐서린
종교 잉글랜드 성공회로마 가톨릭

당시 불확실한 정치적 상황의 이유로 찰스가 국왕이 되었던 정확한 날짜는 분명하지 않다. 부친이 1649년 1월 30일에 처형되어 그 순간부터 찰스 2세를 이론으로 만들었다. 그는 즉시 2월 5일 스코틀랜드에서, 그리고 2월 16일 저지섬에서 왕으로 선포되었으나 또한 몇몇의 잉글랜드의 식민지들 (특히 버지니아 식민지)에서 인정을 받았다. 스코틀랜드에서 찰스는 칭호에서만 한동안 왕이었다. 1651년 1월 1일 스쿤에서 결국 스코트인의 왕으로 왕관이 주어지기 전에 장로교도들과 협상의 2년을 끌었다. 하지만 올리버 크롬웰에 의하여 지도된 공화주의 군대에 의하여 곧 쫓겨나면서 거기서 그의 군림은 짧았다. 잉글랜드에서 그의 대관식은 1660년 5월 크롬웰의 사망과 왕정복고 후까지 있지 않았으며 찰스는 중간 시간의 대부분을 프랑스 왕국으로 망명으로 보냈다.

자신의 부친과 닮은 찰스 2세는 둘 사이의 긴장이 적대의 같은 수준들에 전혀 도달하지 않았어도 자신의 의회와 관계들에서 자신의 일생의 대부분 동안 분투하였다. 그는 의회와 함께 분배하고 홀로 다스리면서 자신의 군림의 말기를 향한 진실한 성공을 유일하게 달성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아무 새로운 세금들의 과세를 피하면서 프랑스의 국왕 루이 14세와 그의 가까운 관계의 결과로서 그가 받은 돈 덕분에 자신의 부친의 정책과 달리 이 정책은 넓게 퍼진 대중의 반대로 이끌지 않았다. 그의 군림의 주요 갈등은 당시 유럽 전역에서 성난 개신교가톨릭 교도들 사이에 갈등으로 대부분 관련된 국내와 외교 정책에서 서로 연결된 여러 문제를 주위로 공전했다. 이것의 결과로서 찰스의 군림은 정치적 파벌과 음모에 의하여 괴롭혀졌고 휘그당토리당이 처음으로 발전시킨 이때였다.

찰스 2세는 유명하게 자신이 14명으로 인정한 수많은 사생아를 낳았으나 살았던 적법한 자녀가 없었다. 찰스는 또한 예술의 후원자이기도 했으며 그와 그의 궁정은 일찍이 보호국 아래 그들의 가상 금지 후에 복고 문학으로 알려진 공공적 드라마와 음악의 부흥을 위하여 크게 책임이 있었다. 모리스 애슐리 같은 어떤 역사가들은 안토니아 프레이저 같은 다른이들이 불동의하면서 찰스가 그의 동생 제임스처럼 그의 일생의 거의를 위하여 비밀적으로 가톨릭교도였다는 것을 믿는다. 확실히 알려진 모든 것은 그가 자신의 사망까지 가톨릭으로 개종했던 것이다.

초기 생애편집

 
어린 시절의 찰스 2세

찰스 1세앙리에트 마리 드 프랑스의 살아남은 장남으로서 런던세인트제임스 궁에서 태어났다. 태어났을 때 그는 자동적으로 (군주의 살아남은 장남으로서) 콘월의 공작과 로세이의 공작이 되었으며 태어난지 짧은 후에 그는 웨일스의 왕자로 왕관이 주어졌다. 잉글랜드 내전에 의하여 일으켜진 분열로 인하여 그는 공식적으로 웨일스의 공국의 명예를 부여받은 적이 없다.

1640년대 동안 웨일스의 왕자가 아직도 어렸을 때 그의 부친 찰스 1세는 잉글랜드 내전에서 의회와 청교도 군대와 싸웠다. 왕자는 에지힐 전투가 일어난 동안 자신의 부친을 동행하였고, 자신이 웨스트컨트리에서 잉글랜드 군대의 이름뿐인 사령관으로 만들어졌을 때 15세의 나이로 1645년의 캠페인들에 참가하였다. 1647년 자신의 안전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그는 잉글랜드를 떠나 처음에 실리 제도로, 그러고나서 저지섬으로 결국 자신의 모친이 이미 망명하여 살고 있었던 프랑스로 갔다. (그의 사촌 루이 14세는 프랑스의 왕좌에 앉았다) 1648년 제2차 내전이 일어난 동안 찰스는 그의 누이 메리와 의제 오라녜공이 여왕의 프랑스 관계들보다 왕당파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줄 가능성이 더 높았던 헤이그로 갔다. 하지만 찰스는 자신의 통제력 아래 왕당파의 함대를 이용할 수 없었고, 프레스턴 전투에서 패배하기 전에 해밀턴 공작의 왕당파 "교전" 군대와 합류할 시간에 스코틀랜드에 도달하지도 않았다.

헤이그에서 찰스 2세는 그가 비밀적으로 결혼했다고 일부가 주장한 루시 월터와 바람을 피웠다. 그들의 아들 제임스 크로프츠 (후에 몬모스와 버클루의 공작)는 잉글랜드의 정치 인생에서 찰스의 많은 사생아들 중의 가장 현저해질 것이었으며 유명하게 찰스의 사망에 반란을 이끌었고 확고한 개신교도로서 찰스의 가톨릭 동생 제임스 대신 자신을 왕좌에 앉히는 데 목표를 두었다.

1647년 찰스 1세는 사로잡혔다. 이듬해 그는 탈출하다가 다시 사로잡혔다. 그를 구하는 데 그의 아들의 노력들에 불구하고, 찰스 1세는 1649년에 처형을 당하고 잉글랜드는 공화정으로 선언되었다.

 
망명 중의 찰스 2세

하지만 동시에 스코틀랜드는 찰스를 그의 부친의 후임으로서 인정하였으며 스코틀랜드에서 가장 극단적인 장로교 단체인 언약도 (아가일의 후작 아치볼드 캠벨에 의하여 이끌어진) 마저 잉글랜드인들에게 그들의 군국주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것으로 판명하였다. 따라서 그해 2월 5일 찰스 2세는 에든버러에서 스코트인의 왕으로 선언되었다. 그는 엄숙동맹과 언약 (스코틀랜드 교회성공회의 빙향에 개조되어서는 안되나 스코틀랜드에서 대부분에 의하여 오히려 좋아했던 교회 정부의 형성인 장로교로 남아야 하고, 잉글랜드 성공회아일랜드 성공회가 나란히 같은 방향을 따라 개혁되어야 할 것에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사이의 동의서)를 자신이 서명하면서 그런 시간까디 자신의 칭호로부터 따라진 권력들을 즐기는 데 허용되지 않았다. 1650년 6월 23일 스코틀랜드에 자신의 도착에 그는 공식적으로 언약으로 동의하였고, 스코틀랜드에서 자신의 지지를 얻었어도 자신의 성공회 포기는 잉글랜드에서 그를 인기없게 놓았다. 찰스는 자신의 스코틀랜드 주인들을 아마도 그해 9월 던바 전투에서 언약도의 패배의 소식에 축하했다. 그럼에 불구하고 스코트인들은 찰스의 복고에 관한 최고의 희망을 유지하였고 그는 1651년 1월 1일 퍼스셔 스쿤에서 스코트인의 왕으로 즉위하였다. 스코틀랜드에서 올리버 크롬웰의 군대가 찰스의 직위를 위협하면서 공격이 잉글랜드에서 장착되어야 한다는 것이 결정되었다. 아가일 후작와 다른 지도적인 언약도를 포함한 많은 스코트인들이 참가하는 데 거부하고, 몇몇의 잉글랜드의 왕당파들이 잉글랜드로 들어가 남부로 이동하면서 군대에 가입하면서 침입은 찰스가 보스코벨 하우스에 있는 로열 오크 나무에 숨어있다는 것이 말해져 변장하여 즉시 프랑스로 탈출한 것으로 이어진 9월 3일 우스터 전투에서 패배로 끝났다. 좁은 탈출들의 6주를 통하여 찰스는 잉글랜드를 달아날 수 있었다.

가난하게 하는 차스는 크롬웰 정부에 심각한 도전을 위한 충분한 지원을 얻을 수 없었다. 앙리에트 마리와 오라녜공을 통하여 스튜어트 왕가의 연결들에 불구하고 프랑스와 네덜란드 공화국은 자신들을 크롬웰 정부와 제휴하여 도움을 위하여 찰스를 강제로 스페인으로 돌렸다. 그는 군대를 일으키려고 했으나 자신의 재정적 결점으로 실패하였다.

왕정복고편집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열린 대관식에서

1658년 올리버 크롬웰의 사망 후, 왕위를 다시 얻는 찰스의 기회들은 희박해 보였다. 크롬웰은 자신의 아들 리처드 크롬웰에 의하여 호국경으로서 계승되었다. 하지만 의회 혹은 신식 군대에서 아무 권력적 기지가 없으면서 새로운 호국경은 1659년 퇴위하는 데 강요되었다. 이어진 시민 및 군사 불안이 있던 동안 스코틀랜드의 총독 제1대 앨버말 공작 조지 멍크는 국가가 무정부 상태에 빠질 것에 근심이 갔다. 잉글랜드의 보호국이 폐지되었고, 잉글랜드 연방이 재설립되었다. 멍크와 그의 군대는 런던으로 들어가는 행렬을 하여 장기적 의회가 그 자신을 해산하는 데 강요하였다. 거의 20년의 세월에 처음으로 의원들이 총선을 향했다.

주로 왕당파의 하원이 선출되었다. 1660년 4월 25일 모여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대회 의회는 찰스가 많은 부친의 적들을 용서하기 위하여 다른 것들과 더불어 동의했던 브레다 선언 (1660년 5월 8일)의 소식을 받았다. 그것은 또한 1649년 찰스 1세의 처형 이래 찰스 2세가 합법적인 군주로 지내온 것을 선언하였다.

찰스는 잉글랜드로 떠나 5월 23일 도버에 도착하여 왕정복고의 날짜로 숙고되었고 찰스의 30세 생일이었던 5월 29일 런던에 도달하였다. 찰스가 망각의 법에서 크롬웰의 지지자들에게 사면을 주었어도 이 일은 의회제정법을 통하여 사람들이 배제되기 위하여 특정 조항을 만들었다. 말기에 13명이 처형을 당하였으며 그들은 매달리고, 끌리고 사지가 찢어졌으며 다른이들은 종신형이 주어지거나 단순하게 평생 공직에서 제외되었다. 올리버 크롬웰, 헨리 아이어턴과 존 브래드쇼의 시신들은 사후 처형의 모욕을 당하였다.

기사 의회편집

대회 의회는 1660년 12월에 해산되었다. 1661년 4월 23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찰스의 대관식이 있던 짧은 후에 군림의 두번째 의회인 기사 의회가 열렸다. 기사 의회가 압도적으로 왕당파였으면서 찰스는 그것을 해산하고 17년 동안 또다른 총선을 강요하는 데 이유를 보지 않았다.

기사 의회는 찰스의 수석 고문 제1대 클래런던 백작 에드워드 하이드의 의제에 근심을 가졌다. 클래런던 백작은 잉글랜드 성공회에 비국교도를 낙담하려고 노력하였으며 그의 선동으로 기사 의회는 "클래런던 법전"의 일부가 된 몇몇의 결의서들을 통과시켰다. 비밀집회 금지법 (1664년)은 잉글랜드 성공회의 후원 아래를 제외하고 5명 이상의 종교적 회의들을 금지하였다. 5마일령 (1665년)은 성직자들이 쫓겨난 교구로부터 5 마일 안에 오는 것으로부터 그들을 금지하였다. 비밀집회 금지법과 5마일령은 찰스의 군림의 나머지를 위하여 사실상으로 남아있었다. 클래런던 법전의 다른 일부들은 기관법 (1661년)과 기도 방식 통일령 (1662년)을 포함하였다.

찰스는 자신의 부친에 의하여 소생된 낡은 봉건 회비를 포기하는 데 동의하였으며 답례로 그는 의회에 의하여 120만 파운드의 연간 수입을 받았다. 하지만 보조금은 찰스의 군림의 대부분 동안 거의 쓸모없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상기 금액은 국왕이 각해에 재무성으로부터 국왕이 인출할 수 있었던 최대 표시이었을 뿐이었으며 대부분의 경우 실제로 금고에서 금액은 너무 더욱 낮았다. 더욱 나가서의 재정적 문제드를 피하는 데 찰스는 재무성과 세금 징수의 관리를 개혁하는 데 다우닝가의 건설자 조지 다우닝을 임명하였다.

외교 정책편집

1662년 찰스는 지참금으로 봄베이탕헤르의 영토들을 자신에게 가져온 포르투갈의 공주 브라간사의 캐서린에게 결혼하였다. 하지만 동년 동안 훨씬 더 가치있는 전략적 전초 기지인 됭케르크를 자신의 첫 사촌 프랑스의 루이 14세에게 4만 파운드에 팔았다.

왕좌를 차지하면서 그에게 주어진 도움에 감사한 찰스는 1663년 자신의 부친의 이름을 딴 당시 캐롤라이나로 알려진 북아메리카의 대지들을 영주들로 알려진 8명의 귀족들에게 수여하였다.

네덜란드의 무역을 해치고 제1차 영국-네덜란드 전쟁을 시작했던 항해법 (1650년)은 또한 제2차 영국-네덜란드 전쟁의 시작을 위하여 책임이 있었다. 뉴암스테르담 (이후 훗날의 잉글랜드의 제임스 2세/스코틀랜드의 제임스 7세인 찰스의 동생 요크 공작 제임스의 영예에 뉴욕으로 이름을 다시 지음)의 점령과 함께 갈등은 잉글랜드인들에게 잘 시작되었으나 1667년 네덜란드인들은 자신들이 잉글랜드의 함대의 더 좋은 일부가 정박해던 곳으로 탬즈 강을 항해했을 때 잉글랜드에 기습 공격을 가했다. 상으로서 네덜란드로 다시 데려가진 기함 "로얄 찰스 호"를 제외하고 거의 전체의 함대들이 가라앉았다. 전함의 명판은 오늘날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다. 제2차 영국-네덜란드 전쟁은 브레다 조약의 조인과 함께 끝났다.

제2차 영국-네덜란드 전쟁의 결과로서 찰스는 자신이 전쟁을 위하여 희생자로 이용했던 자신의 고문 클래런던 백작을 해고하였다. 클래런던은 사형을 선고했던 대역죄로 하원에 의하여 탄핵되었을 때 프랑스로 달아났다. 권력은 음모자로 알려진 정치인 5명의 단체 - 토머스 클리퍼드 (제1대 처들리 남작 클리퍼드), 헨리 베넷 (제1대 알링턴 백작), 조지 빌리어스 (제2대 버킹엄 공작), 앤서니 애슐리 쿠퍼 (제1대 애슐리 남작, 후에 샤프츠버리 공작)과 존 메이틀랜드 (제1대 로더데일 공작)에게 넘겨졌다.

1668년 상속 전쟁에서 루이 14세를 반대하는 목적에 잉글랜드는 자신을 스웨덴과 자신들의 예전의 적국 네덜란드와 제휴하였다. 루이는 삼국 동맹과 평화를 만드는 데 강요되었으나 그는 자신의 공격적인 의도를 지속적으로 유지하였다. 1670년 자신의 재정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찰스는 각해에 루이 14세가 자신에게 20만 파운드를 지불할 것 아래 도버 조약으로 동의하였다. 교환에서 찰스는 루이에게 군대를 공급하고 "그의 영역의 복지를 허용하자마자" 자신을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데 동의하였다. 루이는 개종을 반대한 자들을 억제하는 데 6천명의 군대와 함께 그를 마련하는 것이었다. 찰스는 특히 개종 조항인 조약이 비밀로 남아있던 것을 보장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것은 만약 찰스가 개종 조항을 통하여 따르는 데 진지하게 의도했다면 명확하지 않게 남아있다.

그 동안 1670년 쯤에 5개의 법령들의 일련에 의하여 찰스는 인도에서 을 주조하고, 요새와 군대를 명령하고, 동맹을 형성하고, 전쟁과 평화를 만들고 획득한 지역들에 민사와 형사 둘다의 관활권을 행사하는 데 영국 동인도 회사에게 자발적인 영토 취득에 권리를 부여하였다. 1668년 초순에 그는 에 10 파운드의 적은 금액으로 봄베이의 섬들을 임대하였다.

흑사병과 대화재편집

 
1666년에 일어난 런던 대화재

1665년 찰스 2세는 큰 건강 위기와 직면하였는 데 흔히 흑사병으로 하는 런던에서 서혜 임파선종의 역병의 발생이었다. 암스테르담으로부터 면화를 나른 네덜란드의 선적 선박에 의하여 소개된 것으로 믿어진 역병은 벼룩과 함께 옮겨지고 한 지점에 사망자수는 한주에 7,000명으로 도달하였다. 그해 7월 찰스, 그의 가족과 궁정은 런던을 떠나 옥스퍼드로 달아났다. 런던 공중 보건 공무원들에 의하여 질병을 억제하는 다양한 시도들은 모두 허사였고 질병은 지속적으로 빠르게 확산되었다.

1666년 9월 2일 런던에 불행을 더한 것은 후에 런던 대화재로 유명하게 알려진 것이었다. 전염병을 옮기는 쥐와 벼룩의 연소로 인하여 흑사병의 퍼짐을 효과적으로 끝냈어도 화재는 대략 13,200척의 주택과 세인트폴 대성당을 포함한 87개의 교회들을 소멸시켰다. 찰스 2세는 화제를 싸우는 데 소방수들에게 가입한 것으로 유명하게 기억된다.

당시 혜성이 밤하늘에 보였다. 하루의 가정은 그것이 하느님의 전갈이었고 위의 외침들은 하느님의 분노의 결과였다는 것을 주장하였다. 찰스와 그의 궁정에 책임이 돌렸으나 후에 국민들은 그들의 책임을 자신들이 미워했던 가톨릭 교도들에게 전가하였다. 상황은 1667년 찰스의 동생 제임스 2세의 가톨릭으로 개종에 의하여 도움을 받지 않았다.

의회와 갈등편집

이전에 왕좌에 유리했어도 기사 의회는 1670년대 동안 국왕의 전쟁과 종교 정책들에 의하여 소외되었다. 1672년 찰스는 자신이 가톨릭 교도와 다른 종교적 반대자들을 처벌하는 전체의 법률을 정지한다고 주장한 것에 왕실 면죄부 선언을 발표하였다. 동년에 그는 공개적으로 가톨릭 프랑스를 지원하고 제3차 영국-네덜란드 전쟁을 시작하였다.

기사 의회는 헌법에 근거하여 면죄부 선언을 반대하여 국왕이 정치적인 것보다 법을 임의로 중단할 권리가 없다는 것을 주장하였다. 찰스 2세는 선언을 철회하였고, 또한 잉글랜드 성공회에 의하여 설명된 형식에 따라 성찬을 받는 데 공무원에게 요구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들을 가톨릭 교회의 특정 가르침을 미신적이고 우상 숭배적인 것으로 비난하는 데 강요한 심사율로 동의하기도 했다. 기사 의회는 또한 잉글랜드가 패하고 있었던 영국-네덜란드 전쟁에 더 많은 자금을 조달하는 데 거부하여 1674년 평화를 만드는 데 찰스를 강요하였다.

찰스의 부인 캐서린 여왕은 상속인을 낳을 수 없어 그의 임신들은 대신 유산과 사산으로 끝냈다. 그러므로 찰스의 상속인 추정은 그의 인기없는 가톨릭 동생 요크 공작 제임스였다. 1678년 전직 성공회 성직자 타이터스 오츠는 국왕을 보조하고 요크 공작과 그를 대체하는 데 "가톨릭의 음모"에 관하여 잘못 경고하였다. 찰스는 혐의를 믿지 않았으나 자신의 수석 장관 제1대 리즈 공작 토머스 오즈번을 조사하는 데 명령하였다. 리즈 공작은 오츠의 계시에 회의적이었으나 문제를 의회에 보고하였다. 국민들은 반가톨릭 광란에 사로잡혀 있었으며 전국의 재판관과 배심원들은 공모자들을 비난했으며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처형되었다.

1678년 후순에 리즈 공작은 반역죄로 하원에 의하여 탄핵되었다. 국가의 거의가 가톨릭 프랑스와 전쟁을 추구했어도 찰스 2세는 비밀적으로 루이 14세와 협상하여 잉글랜드가 돈의 대가로 중립으로 남아있을 아래 동의서에 도달하는 데 노력하였다. 리즈 공작은 프랑스에 적대적이었으나 찰스의 소망들에 의하여 준수하기로 유보하였다. 그를 위해 불행하게도 하원은 스캔들에서 그를 꺼리는 참가자로 보는 데 실패하였고 대신 그가 정책 작성자였다는 것을 믿었다. 하원에서 탄핵 재판으로부터 리즈 공작을 구하는 데 찰스는 1679년 1월 기사 의회를 해산하였다.

동년 3월에 모여진 새로운 의회는 국왕에게 상당히 적대적이었다. 리즈 공작은 국가 재정 위원회의 직위를 사임하는 데 강요되었으나 국왕으로부터 사면을 받았다. 국왕의 뜻에 반하여 의회는 해산이 탄핵 절차를 중단하지 않았다는 것을 선언하였다. 하원이 그들이 너무 순하다고 생각했던 유배 처벌을 내리는 데 준비된 것으로 보였을 때 탄핵은 버려졌고 달성 계산서가 소개되었다. 자신의 군림 동안 그는 그렇게 여러번 해야 했기 때문에 찰스 2세는 자신의 상대들의 소망들에 절하여 리즈 공작을 런던탑으로 맡겼다. 리즈 공작은 또다른 5년 동안 보석금 없이 구금될 것이었다.

이후의 세월편집

찰스를 향했던 또다른 정치적 폭풍은 왕위 계승의 것이었다. 1679년의 의회는 격렬하게 가톨릭 군주의 전망에 반대되었다. 제1대 샤프츠버리 백작 앤소니 애슐리 쿠퍼는 승계선으로부터 듀크 공작을 제외하는 데 추구한 제외 법안을 소개하였다. 어떤이들은 찰스의 사생아의 장남 개신교도 먼머스 공작에게 왕관을 수여하는 것마저 추구하였다. 제외 법안을 지지한 "권리 청원자"들이 휘그당이 되었던 동안 제외 법안을 반대한 "국회 소집 반대자"는 토리당으로 개발될 것이었다.

제외 법안이 통과될 것을 두려워했던 찰스는 그해 12월 의회를 해산하였다. 2개의 추가 의회는 찰스의 통치에 부름을 받았으나 (하나는 1680년, 다른 것은 1681년) 그들이 제외 법안을 통과시키는 데 추구했기 때문에 둘다 해산되었다. 하지만 1680년대 동안 제외 법안의 대중적 지지는 해산되기 시작하였고 찰스는 의회가 너무 독단적이었던 것을 느낀 그의 많은 주제로 전국적인 충성의 급증을 경험하였다. 그의 통지의 나머지 동안 찰스는 절대 왕정으로서 다스렸다.

제외 법안으로 찰스의 반대는 어떤 개신교도들을 화나게 했다. 개신교 공모자들은 국왕과 요크 공작이 뉴마켓에서 열린 경마로부터 런던으로 돌아오면서 그들을 살해할 계획인 라이 하우스 음모를 공식화했다. 하지만 대화재는 뉴마켓의 거의를 파괴하였고 경마의 취소를 일으켜 그러므로 계획된 공격은 할 수 없었다. 소식이 유출하기 전에 주요 음모자들은 달아났다. 알제넌 시드니와 윌리엄 러셀 경 같이 개신교 정치인들은 음모에 연루되어 아주 허술한 증거에도 불구하고 반역죄로 처형되었다.

찰스는 과격한 적응을 겪어 1685년 2월 6일 오전 11시 45분 화이트홀궁에서 54세의 나이에 요독증으로 사망하였다. 그는 자신의 임종에 자신의 동생 요크 공작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 "가난한 넬리를 굶어 죽게하지 마라." 그리고 자신의 조신들에게는 "시간이 지날수록 죄송합니다, 여러분"이라고 말했다. 그는 "어떤 화려함도 없이"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장되었고 잉글랜드와 아일랜드의 제임스 2세와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7세가 된 자신의 동생에 의하여 계승되었다.

후세와 유산편집

 
첼시 왕립 병원 앞에 세워진 찰스 2세의 동상

찰스 2세는 합법적인 자녀를 남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많은이들이 귀족의 부인들이었던 여러 여주인들에 의하여 몇몇의 자녀를 가졌다. 많은 그의 여주인과 사생아들은 공작과 백작의 지위들을 받았다. 그는 7명의 여주인에 의하여 14명의 자녀를 공개적으로 인정하였으며 이 자녀들 중 6명은 독신 여성이자 유명한 캐슬메인 백작 부인 바버라 빌리어스에 의하여 태어났다. 그의 다른 좋아했던 여주인들은 닐 그윈, 루이즈 르네 드 페낭코에 드 케루아유, 포츠머스 공작 부인이었다. 찰스는 또한 루시 월터, 자작 부인 섀넌 엘리자베스 킬그루와 레이디 그린 케서린 페기에 의하여 자녀를 인정하였다. 오늘의 버클루 공작과 리치먼드 공작 퀸스베리와 그래프턴 공작 고든과 세인트앨번스 공작은 전부 직계 남성 혈통으로 찰스에게서 내려왔다. 그의 시간의 정치는 물론 찰스의 연인 관계들은 BBC에 의하여 2003년에 제작된 역사적 드라마 《찰스 2세:투지와 용기》에서 묘사되었다.

웨일스 공작부인 다이애나는 찰스의 사생아 그래프턴 공작과 리치먼드 공작 (웨일스 공 찰스의 두번째 부인 콘월 공작부인 커밀라의 직접 조상이기도 함)으로부터 내려왔다. 그러므로 왕위 계승 서열 2위에 있는 다이애나의 아들 케임브리지 공작 윌리엄앤 여왕 이래 찰스 1세로부터 내려온 첫 군주일 것이다.

찰스 2세의 맏아들 먼머스 공작은 제임스 2세에 대항하는 반란을 지도하였으나 1685년 7월 6일 세지무어 전투에서 패배하여 사로 잡히고 처형되었다. 하지만 제임스 2세는 1688년 명예혁명의 과정에서 결국적으로 폐위되었다. 제임스는 잉글랜드를 다스리는 데 마지막 가톨릭 군주였다.

예술과 과학의 후원자였던 찰스는 로버트 후크, 로버트 보일아이작 뉴턴 경을 포함한 초기 회원들의 과학적 단체 왕립학회를 창립하는 도움을 주었다. 찰스는 1666년 대화재 후에 런던을 재건하는 도움을 준 건축가 크리스토퍼 렌 경의 개인 후원자였다. 렌은 또한 1681년 찰스가 퇴역 군인들을 위한 집으로서 창립한 첼시 왕립 병원을 건설하기도 했다. 1692년 이래 고대 로마의 옷차림 (1676년 그린링 기븐스에 의하여 창조)에 찰시 2세의 동상이 왕립 병원에 서있다.

찰스의 생일이기도 한 그의 복원 기념일인 5월 29일은 올리버 크롬웰의 군대로부터 탈출하는 데 찰스가 숨었다고 말해진 로열 오크를 따서 영국에서 "오크 애플 데이"로 인정을 받았다. 전통 축제들은 오크 잎들의 옷차름을 연루했으나 이제 이들은 죽었다. 복원 기념일은 또한 공식적 옷깃의 날이다.

같이 보기편집

외부 링크편집

전임
찰스 1세
스코틀랜드의 왕
1649년 ~ 1651년
후임
군부 독재시대
(연방 치하 스코틀랜드)
전임
잉글랜드 공위시대(잉글랜드 연방)
잉글랜드아일랜드의 왕
1660년 ~ 1685년
후임
제임스 2세
전임
군부 독재시대
(연방 치하 스코틀랜드)
스코틀랜드의 왕
1660년 ~ 1685년
후임
제임스 7세
전임
찰스 1세
제11대 스튜어트 왕실 당주
1649년 ~ 1685년
후임
제임스 7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