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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년도편집

영문판은 1342년 출생이라고 적혀 있네요. 어느 쪽이 맞는 걸까요? --정안영민 2006년 3월 14일 (화) 13:18 (KST)

찾아보니 1337년설과 1342년 설이 있네요. 참조 출생년을 정확히 모르니 ?가 적당할 것 같군요.--makriji 2006년 3월 14일 (화) 13:51 (KST)

출생지편집

한국민족문화대백과[1]에서는 단양 출생이라고 하고, 두산백과[2]는 영주 출생이라고 하는데, 어느 것이 맞는 것인가요? 여러 설이 분분한것 같네요.--Jyusin (토론) 2010년 1월 27일 (수) 20:35 (KST)

요동정벌론 비판편집

문서에 삽입된 의견을 토론문서로 옮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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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의 요동정벌도 비판을 받을 부분이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문집인 삼봉집에서 우왕과 최영의 요동정벌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명나라에 대한 사대주의를 그대로 드러냈습니다. 이것을 알고 정도전의 요동정벌을 긍정적으로 평가를 하십니까? 정도전의 삼봉집 제 2권의 악장에 있는 정동방곡의 내용을 그대로 올립니다.


정동방곡(靖東方曲)


무진년(1388) 봄에 우(禑)가 군사를 크게 일으켜 요동을 공격하자 우리 태조는 우군장(右軍將)으로 여러 장수를 효유하여 의(義)로써 회군(回軍)하였음.



우리 동방은 동떨어진 바다 나라 / 繄東方阻海陲

저 교동이 천기를 도둑질하다니 / 彼狡童竊天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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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왕 되시어 덕이 거룩하시리이다 / 爲東王德盛多里利

미친 꾀를 부리어 큰 군사를 일으키니 / 肆狂謀興戎師

극에 달한 이 화를 막을 이 누구신고 / 禍之極靖者誰

동왕 되시어 덕이 거룩하시리이다 / 爲東王德盛多里利

하늘은 덕을 숭상, 의기를 돌리셨네 / 天尙德回義旗

죄 지은 놈 내쫓고 역적놈 멸족했네 / 罪其黜逆其夷

동왕 되시어 덕이 거룩하시리이다 / 爲東王德盛多里利

황제님 기뻐하여 큰 은혜를 베푸셔서 / 皇乃懌覃天施

군대로써 나라 세워 우리 님께 맡기었네 / 軍以國俾我知

동왕 되시어 덕이 거룩하시리이다 / 爲東王德盛多里利

아름답다, 민과 사직 돌아갈 곳 있으니 / 於民社有攸歸

천세 만세를 한없이 전해가리 / 千萬歲傳無期

동왕 되시어 덕이 거룩하시리이다 / 爲東王德盛多里利


[주D-001]교동(狡童) : 《시경(詩經)》 정풍(鄭風)의 편명. 음란함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우왕을 가리킴.


이상입니다. 이것은 한국고전번역원에 번역한 삼봉집의 제 2권 악장편에서 정동방곡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우왕과 최영의 요동정벌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명나라에 대한 맹목적인 사대주의를 시에서 표방한 정도전이

무슨 바람이 불어서 조선건국이후 요동정벌을 추진했는지 모르겠네요.

정도전을 무조건 위대한 영웅으로 칭송만 하는 소위 정도전 매니아 학자들은 삼봉집의 이런 이야기는 제대로 알고서

정도전의 요동정벌을 긍정적으로 보는지 모르겠네요.

위키백과에서 정몽주가 정말로 고려의 충신이라면 왜 우왕과 창왕을 폐위하고 죽이는데 앞장서고 그래서 그 댓가로

공신의 지위까지 받았는지 의문점을 제기했는데, 정몽주가 우왕과 창왕을 폐위하고 죽이는데 앞장서고 그래서 그 댓가로

공신의 지위까지 받았다는 것은 철저하게 조선의 입장에서 쓰여진 고려사,고려사절요,조선왕조실록 태조총서등의 조선의 관찬사서들에서만

나오는 내용이 아닙니까?

정몽주가 정말로 그랬다면 목은 이색의 목은집이나 도은 이숭인의 도은집이나 기타 여러 고려충신들의 문집에도 이런 내용이 있어야 하는데

이런 내용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또 만약에 있다고 쳐도 그렇습니다. 동각잡기와 연려실기술의 기록을 보면 태종 말년에 조선왕조에 불리한 예언서적들을 모두 불태워버리게 하고,

또 목은 이색의 목은집 15째권도 수거했다고 나옵니다.

연려실기술의 그 기록을 그대로 올립니다.


○ 17년 임금이 이르기를, “도참(圖讖)에서 나온 말은 의논하는 사람이 모두 취하지 않는다. 그러나 한 나라 광무제(光武帝) 같은 밝음으로도 오히려 도참에 혹한 것은 광무제가 도에 순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만일 참서를 불사르지 않아 후세에까지 내려간다면 이치를 분명하게 보지 못하는 사람이 반드시 깊이 혹할 것이다. 종묘 사직의 화복과 장단을 어찌 이것으로 알겠느냐.” 하고,

좌의정 박은(朴?),지신사 조말생(趙末生)에게 서운관(書雲觀)에 가서 요망하고 허탄하며 떳떳하지 않은 음양에 관한 서적을 모두 불사르도록 명하고, 인하여 서울이나 지방에 요망하고 허탄한 서적을

사사로이 감춘 것은 기일을 정하여 자수하고 관청에 바쳐 불사르게 하였는데, 어기는 자는 고발하게 하고 요망한 글을 지은 자의 법률에 의하여 죄를 주게 하였다. 이색(李穡)의 문집 15째 권도 기일을 정하여

찾아 바치게 하였다. 《동각잡기》 《국조보감》


이상입니다. 또 정몽주의 포은집의 경우도 포은집의 편찬에 조선왕조가 공식적으로 개입을 했다는 내용이 서애 유성룡의 서애집에 내용이 나옵니다.

그대로 올립니다.


서애선생문집 제 18권

《포은집(圃隱集)》 발(跋) 을유년(1585, 선조18)


만력 갑신년(1584, 선조17)의 가을에 주상 전하께서 교서관에 선생의 문집을 간행하도록 명하면서, 우선 신에게 잘못된 내용을 교정하고

그 뒤에 발문을 쓰도록 명하였다. 신은 삼가 명을 받들어 조심스럽게 여러 본(本)을 모아 반복하여 비교하여 바로잡았다.

구본은 원래 시문이 303편으로 선생의 아들 종성(宗誠)이 편찬한 것이었다. 근년 개성본(開城本)에는 그 이외에

‘이공봉운(李供奉韻)으로 지은 2수’와 ‘송 정랑을 경상도 안렴사로

보냄[送宋正郞按廉慶尙道]’ 1수가 실려 있다. 관본(館本)에는 또 김해산성기(金海山城記), 김득배(金得培)에게 한 제문, 원 나라의 사신을 맞이하지 말기를 청한 상소문이 더 실려 있다.

지금 신이 또 ‘이태상의 시를 차운하여 이둔촌의 아들 지직이 급제한 것을 축하한 시[次李太常韻賀李遁村子之直登第]’ 3수와 ‘원주 목사 하윤원의 시권으로 운자를

나눠 지은 시[原州牧使河允源詩卷分韻賦詩]’ 1편과 ‘원등국사 어록 발문에 씀[題圓燈國師語錄跋]’ 1편을 입수하였다. 그리고 둔촌에게 보낸 4편의 글은 비록 여러 조각이 나서 완전치는

않더라도 살펴보면 선생에게서 나온 것이 틀림없다. 그러므로 함께 모으니

모두 시가 308편, 찬(讚)ㆍ명(銘)ㆍ문(文)ㆍ사(辭)가 13편이다. 관본은 오언시와 칠언시를 나누어서 편집하였으나, 종성(宗誠)이 이미,

“선후를 따라 순서를 정한 것이니 후인이 갑자기 원본을 고치는 것은 옳지 못하다.”

말하였으므로 이번에도 모두 구본을 정본으로 삼았다. 다만 시문은 뒤섞이어 혼란하므로 화상찬(畵像讚) 이하 8편을 잡저(雜著)로 하여 별도로 편성하였으며,

새로 입수하여 3본에 실려 있지 않은 것은 따로 습유(拾遺)로 하여 뒤에 붙였다. 3본에는 목록이 없고 편서의 체제가 잘못되었으므로 지금은 목록을 만들어 그 머리에 붙였다.

관본에는 부록 1권이 있었으나 용잡함을 면치 못하였는데, 이번에는 사전(史傳)ㆍ행장 및 제현이 기증한 글과 후인의 서술과 제문을 각각 그 종류대로 편찬하였다. 그 외에 기록이 번잡하고

별로 발명한 것이 없으며, 전문(傳聞)에 나와서 허실을 분간하기 어려운 것은 간간이 삭제하였다.

이에 선생의 시종의 대업이 비로소 자세하고 명백하니, 볼만하다.


이상입니다. 이렇게 이색과 정몽주 같은 고려측 인물들의 개인 문집에도 손을 댄 조선왕조입니다.

그래서 설령 정몽주의 저서인 포은집이나 이색의 목은집,이숭인의 도은집,길재의 야은집이나 기타 다른 고려충신들의 문집에도 조선왕조가 손을 댔을 확률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래서 설령 이색이나 길재,이숭인과 기타 다른 고려충신들의 문집에도 정몽주가 우왕과 창왕을 폐위하고 죽이는데 앞장섰다고 나온다 하더라도 무조건 다 곧이곧대로 믿을 것은

못 된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1392년에 정몽주가 이성계가 부상한 틈을 타서 이색,이종학,이숭인,김진양 등과 연합해서 이성계를 죽일려고 했을때 정몽주의 지시를 받은 김진양이 정도전을 탄핵하는

상소에서 이렇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고려사 김진양 열전에서 말이죠.

그 내용을 그대로 올리면 이렇습니다.


우상시(右常侍) 이확(李擴)2), 우사의(右司議) 이래(李來)3), 좌헌납(左獻納) 이감(李敢)4), 우헌납(右獻納) 권홍(權弘)5), 정언(正言) 유기(柳沂) 등과 함께 삼사좌사(三司左使) 조준(趙浚),

전 정당문학(政堂文學) 정도전(鄭道傳), 전 밀직부사(密直副使) 남은(南誾), 전 판서(判書) 윤소종(尹紹宗), 전 판사(判事) 남재(南在)6), 청주목사(淸州牧使) 조박(趙璞) 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죄했다.

“정도전은 미천한 신분7)에서 시작해 외람되게 높은 벼슬에 오르게 되자 천한 출신을 감추기 위해 본래의 주인을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몄습니다.

혼자서 실행할 수가 없자 참언으로 죄를 만들어내어 많은 사람을 몰아넣었습니다. 조준은 한두 사람의 재상들이 서로 우연히 원한 관계를 맺자 정도전과 공모해 변란을 선동하고 권력을 농단하면서 여러 사람을

꾀고 협박하였습니다. 그 결과 이익을 잃을까봐 걱정하는 자들이 일을 일으키려는 일당들의 뜻에 따라 서로 작당하게 되었습니다.

그 가운데 남은과 남재 등은 그들을 도와 변란을 선동하는 심복 역할을 했고 윤소종과 조박 등은 그들을 대변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들이 서로 화답하며 일어나 마구잡이로 죄를 조작해 내어 형벌로 다스려서는

안 되는 사람에게 형벌을 가하고 본래 죄가 없는 데서 죄를 찾아내었습니다.


이상입니다. 연려실기술의 제 1권 태조조 고사본말편의 고려에 절개를 지킨 여러 신하들 편의 김진양 열전에서 연려실기술의 저자 이긍익은 고려사 김진양 열전의 이 상소 내용을 해석한

조선 인조때의 사람이고 영의정까지 지내고 청렴했던 사람인 상촌 신흠은 '상촌집.'의 내용을 언급을 하면서 김진양의 정도전을 탄핵한 상소를 해석을 했습니다.

연려실기술의 그 내용을 그대로 올리면 이렇습니다.


○ 공은 고려조의 충신이다. 그가 정도전을 탄핵한 소에 말하기를, “형벌할 수 없는 사람에게 형벌하고 본래 죄 없는 사람에게 죄를 씌운다.” 하였으니,

여기에서 형벌할 수 없는 사람에게 형벌한다는 것은 우왕과 창왕 부자를 말한 것이고, 본래 죄 없는 사람에게 죄를 씌운다는 것은 이색 등 여러 대부를 말한다.

만일 공의 말대로 정도전에게 죄를 주어 죽였더라면 고려의 멸망이 그렇게 빠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소가 들어감에 이것을 그냥 두었다가 복합(伏閤)을 한 뒤에 겨우 조정에 내 놓았다가 다시 들여 갔으니, 오늘날 우리로 하여금 이 대목을 볼 때에

기가 막히게 한다. 《상촌집》


이상입니다. 정말로 정몽주가 우왕과 창왕을 폐위하고 죽이는데 앞장서고 그래서 그 댓가로 공신의 지위까지 받았다면 어떻게 김진양을 시켜서 이런 상소를

올릴 수 있으며, 또 어떻게 처음부터 우왕을 옹호했던 이색,이숭인,이종학등과 그렇게 신속하게 연합해서 이성계 일파를 죽일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정몽주가 이색과 이숭인,이종학등을 평소부터 보호할려고 했어도 말이죠.

정모주가 이성계를 제거하자고 이들에게 이야기를 한다면 이들은 우왕과 창왕을 폐위하고 죽이는데 앞장서고 그래서 그 댓가로 공신의 지위까지 받은 그대가

어떻게 고려왕조를 위해서 이성계 일파를 제거할려고 하냐고 의문을 표할 것이고, 의견충돌이 있을 것이 아닙니까?

설령 나중에는 서로 의견합의가 되어서 이성계 일파를 제거하는데 한 마음으로 뭉친다고 해도 초반에는 반드시 의견충돌이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정말로 정몽주가 우왕과 창왕을 폐위하고 죽이는데 앞장을 서고 그래서 그 댓가로 공신의 지위까지 받았다면 말이죠.

하지만 고려사,고려사절요,조선왕조실록 태조총서등의 철저하게 조선에 의해서 쓰여진 조선의 관찬사서들에서도 그 어디에도 정몽주가 이성계 일파를 제거할려고

할때 사전에 정몽주와 이색,이숭인,이종학 등이 초반에 의견충돌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런 것들을 보면 정몽주가 우왕과 창왕을 폐위하고 죽이는데 앞장서고 그래서 그 댓가로 공신의 지위까지 받았다는 이야기는 당대 신진 사대부들과 백성들의 인망을

얻고 있는 정몽주를 이성계 일파가 제멋대로 이용해서 우왕과 창왕을 폐위하고 죽이는데 이용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당시 조정과 백성들의 인망을 얻고 있는 정몽주가 우왕과 창왕을 폐위하고 죽이는데 찬성했다고 하면 이성계 일파가 우왕과 창왕을 폐위하고 죽이는 것이 훨씬

수월해질테니 말이죠.

이것은 마치 조선의 세조가 김종서,황보인,정분을 죽이고 정권을 잡은 계유정난때 민심을 얻기 위해서 당시 조정과 선비들과 백성들의 인망을 얻고 있는 성삼문,

박팽년,이개,하위지,유성원등의 사육신에게 억지로 계유정난의 공신으로 책봉한 것과 같은 것일 것입니다.

실제로 성삼문등의 사육신이 세조의 계유정난을 지지한 적은 없었고 오히려 이것을 부정적으로 보았고 성삼문은 세조에게 억지로 공신의 지위를 받은 것을

수치스럽게 여겨서 밥맛까지 잃었고, 당시의 재상들이 번갈아가면서 계유정난을 축하하는 연회를 열었어도 혼자 이를 거부했다라는 이야기가 연려실기술에

나오고 유성원의 경우는 당시 집혀전에 있다가 세조측이 계유정난을 설명하는 문서를 작성할려고 시켰을때 다른 집현전의 학사들은 이를 거부하고 모두 달아났지만,

유성원 혼자 남아있다가 협박에 못 이겨서 세조의 계유정난을 설명하는 문서를 작성하고 집에 돌아와서 대성통곡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지 않습니까?

이런 것과 같은 이치일 것입니다.

실제로 이런 경우가 더 있는 것이 조선왕조실록에서 실제로는 고려의 충신인데, 조선왕조건국의 정당화를 위해서(왜냐하면 조선왕조건국에 참여한 사람들의

숫자가 너무 적으니 천명과 민심의 바램의 의해서 조선왕조가 건국이 되었다는 이성계측의 논리에 큰 문제가 생겼기 때문에 말이죠.)

억지로 조선건국에 참여하고 동조햇다는 식으로 조작한 사람들의 경우가 많습니다.

정도전과 더불어 조선왕조건국의 일등공신인 조준의 동생 조견이 그렇고 화약을 발명한 최무선의 경우가 그 좋은 예입니다.

최무선의 경우 조선왕조태조실록의 내용과는 달리 최무선의 본관인 영천최씨 홈페이지에서는 그가 고려왕조에 대한 절의를 지켜서 이성계의 출사 요구를 거부했다라고

분명히 나옵니다.

믿기지 않으시면 영천최씨 오금문중 이라고 검색을 하셔서 그 홈페이지에 들어가셔서 그 홈페이지 위의 란들중에서 문중뿌리 알기 란에서 문헌보기란을 누르시면

그 내용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식으로 실제로는 고려의 충신인데, 조선왕조건국의 정당화를 위해서 조견이나 최무선의 경우처럼 조선건국에 참여하거나 혹은 동조했다라는 식으로 조작한

사례가 많습니다.

그래서 조선왕조정조실록에서도 정조도 이런 경우가 많을 것이라고 인정한 것입니다.

정조의 이 인정은 조선왕조실록 홈페이지에서


정조 31권, 14년(1790 경술 / 청 건륭(乾隆) 55년) 10월 14일(신유) 3번째기사


경기 유생들이 고려조 조견을 숭양 서원에서 제사지낼수 있도록 청하다 라는 기사를 검색해 보면 내용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정몽주의 경우도 조견,최무선,사육신들의 경우처럼 조선왕조에서 자신들의 잘못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사실과 다르게 조작이 된 경우일 가능성이 높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위키백과의 정몽주편에서는 정몽주는 우왕이 유배를 가 있는 곳에 이색이 가서 문안을 했다는 내용을 가지고 말하면서 상대적으로

정몽주를 비판을 했는데 논리적으로 따졌을때 이것은 말이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이성계 일파가 우왕을 유배를 보냈다면 분명히 우왕이 다시 왕으로 복권할려고 할 것이라고 생각해서 우왕의 유배지의 경계를 철통같이

했을텐데 무슨 수로 이색이나 기타 다른 우왕측 인사들이 몰래 우왕의 유배지에 가서 문안을 하고 또 우왕과 더불어 우왕의 복위를 같이

꾀할 수 있겠습니까?

이성계나 정도전,조준,남은,윤소종등의 조선건국세력이 죄다 바보멍청이겠습니까?

이런 점들을 잘 생각해 주십시오.

이에 비해서 정도전의 요동정벌은 그야말로 논리적으로 앞뒤가 안 맞는 억지가 아닙니까?

우왕과 최영의 요동정벌에 대해서 신랄하게 비판하고 명나라에 대한 맹목적인 사대주의를 표방한 정도전이 무슨 자격으로 조선왕조가 건국이 되자 요동정벌을 논한다는 말입니까?

정도전의 이 논리적으로 앞뒤가 안 맞는 행동은 분명히 비판을 받을 일입니다.

결코 칭송될 일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점들을 생각해 주시길 바랍니다.

이상으로 마칩니다. 그럼....................

-- 이 의견을 작성한 사용자는 122.35.110.230 (토론)이나, 서명을 남기지 않아 다른 사용자가 추가하였습니다.

위키백과:알찬 글 후보/정도전편집

정도전에 대한 토론입니다.
고려 말과 조선 초의 빼놓지 않은 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위키백과의 문서도 출충한 것 같습니다. 2014년 9월 10일(수) 05:57(KST)
고려 말과 조선 초의 빼놓지 않은 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위키백과의 문서도 출충한 것 같습니다. 2014년 9월 10일(수) 05:57(K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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