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한사군

마지막 의견: 5년 전 (Tol6560님) - 주제: 불필요한 내용이 너무 많습니다.
 이 문서는 다음 위키프로젝트의 범위 안에 있습니다.

중립적 시각 문제 편집

지도와 문장에서 기존 학계에 대해 감정적 서술이 난무합니다. 감정과 이성은 구분해야 합니다. 여기 적혀 있는 내용도 아직 논란이 많은 내용이며 확실하게 입증된 내용이 아닙니다. 자기 개인홈페이지가 아닌 이상 저런 식의 표현은 안됩니다.--WaffenSS 2006년 5월 24일 (수) 09:17 (KST)답변

한사군이 한반도에 없었다는것은여러 사서를 통해 알수 있습니다 홈페이지 어쩌고 하는데 그전에역사공부부터 하세요 모르면 그냥 닥치고 있는게 좋을듯합니다. 잘못된 지식은온국민이 습득하게 할수는없습니다. 년 5월 24일 (수) 08:10 (KST)

한반도에 있었던 없었던 듯, 두 주장이 공존하며 서로 이기고자 싸우고 있을대, 백과사전은 양 주장을 공평하게 싣는 것이지, 한쪽만 싣는게 백과사전이 아닙니다. 역사 공부는 당신보다는 많이 했고, 모르지 않고 알고 있으며, 역사 공부하라고 하기 전에 예의범절부터 익히세요. ----WaffenSS 2006년 5월 24일 (수) 09:17 (KST)답변

본문 내용 모순 관련 편집

고구려기원전 37년에 건국되었는데, '고구려를 비롯한 토착세력'이 기원전 75년에 현토군을 축출했다는 이야기가 성립될 수 있는 것인가요. 이는 모순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유지하려면 분명한 근거를 제시해 주시기 바랍니다. jtm71 2006년 9월 24일 (일) 12:14 (KST)답변

동음이의어 외부고리 편집

'생성 및 소멸, 의의'항목 세째 문단에 ''는 '(濊)'로 바꿔야 할 것 같습니다. 218.237.242.39 2006년 10월 14일 (토) 13:18 (KST)답변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길라잡이를 참고하시면서 직접 고치셔도 됩니다. :) --[[토끼군]] 토론/기여 2006년 10월 14일 (토) 13:21 (KST)답변

한사군에 대한 현재 대한민국 사학계의 시각 편집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발행된 한국사의 방향도 그러하지만, 국사편찬위원회 홈페이지의 문답란에는 이런 답변이 있었습니다. (내용은 요약하였습니다. 원문은 http://kuksa.nhcc.go.kr/front/addservice/addFrameSet.jsp?pUrl=/front/addservice/qna/listQnaBoard.jsp 에서 '한사군'으로 검색하면 찾을 수 있습니다.)

  • 현재의 고등학교 국사교과서에는 '한사군'이란 표현은 사용하고 있지 않습니다. 관련된 부분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이에 불안을 느낀 한의 무제는 수륙 양면으로 대규모 침략을 감행하였다. 고조선은 1차의 접전(패수)에서 대승을 거두었고, 이후 약 1년에 걸쳐 한의 군대에 맞서 완강하게 대항하였다. 그러나 장기간의 전쟁으로 지배층의 내분이 일어나 왕검성이 함락되어 멸망하였다(B.C.108).
  • 고조선이 멸망하자 한은 고조선의 일부 지역에 군현을 설치하여 지배하고자 하였으나 토착민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혔다. 그리하여 그 세력은 점차 약화되었고 결국 고구려의 공격을 받아 소멸되었다."(고등학교 교과서 36쪽)
  • 위에서 볼 수 있듯이 현재 교과서에서는 '한사군'이라는 용어 대신 '한의 군현'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 둘 사이에는 매우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와 같은 용어의 변경이 곧 우리 학계의 연구의 진전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 학계의 연구가 진전되면서 이들 네 개의 군현이 실제로 함께 존속한 시기는 불과 25년에 불과하며, 낙랑군 하나만이 비교적 오랜 기간동안 유지되었지만, 그것도 식민통치기구로 보기는 곤란하다는 점 등이 밝혀지게 되었습니다. 말하자면 학계의 연구가 진전되면서 한의 군현이 본래적인 의미로서의 기능은 담당하지 못했다는 점이 밝혀지게 된 것입니다. 교과서에서 한사군이라는 명칭이 사라지게 된 것은 그에 따른 자연스러운 결과입니다.

제 생각으로는, 과거의 학설보다는 현재 사학계의 입장을 반영하는 것이 더욱 일반적일 듯합니다. 본문 내용의 주 설명와 부연설명을 바꿀 필요가 있습니다. jtm71 2006년 12월 24일 (일) 10:53 (KST)답변

소주제 문헌 부분의 내용 편집

해당 부분의 내용은 소주제 자체가 관련된 '문헌'을 소개하는 부분임에도 불구하고 특정한 방향에 편중되어 서술되어 있습니다. 문헌에 대한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문헌의 내용에 대하여 평가를 내리고 있으며, 그 평가가 특정한 방향에 편중되어 있는 점은 문제가 있습니다. 단순한 문헌 내용 기술로 바꾸어야 한다고 봅니다.Xakyntos (토론) 2008년 6월 19일 (목) 17:04 (KST)답변

불필요한 내용이 너무 많습니다. 편집

한사군의 역사를 서술하는 부분에서, 설치 항목의 경우 한사군의 설치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는 위만조선의 역사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고조선-전한 사이에 벌어진 전쟁 역시 한사군의 설치와 관련되었다고 보기에는 지나치게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백과사전은 역사서나 역사소설이 아니므로 주제 자체와 관련이 적은 내용이 지나치게 많은 것은 오히려 객관성이나 가독성을 해친다고 생각합니다. 고조선-전한 전쟁의 원인, 과정, 결과만 간략하게 서술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이에 대해서 의견을 구합니다.--Xakyntos (토론) 2009년 1월 2일 (금) 18:07 (KST)답변

삭제하기도 좀 그러네요. 내용 자체는 괜찮은데, 단지 한사군이라는 항목에 알맞지 않을 뿐이거든요. --Knight2000 (토론) 2009년 1월 2일 (금) 20:37 (KST)답변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저 내용은 차라리 위만조선 항목에 더 맞는 내용이거든요. 위만조선 항목으로 옮기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Xakyntos (토론) 2009년 1월 2일 (금) 20:55 (KST)답변
올바른 지적입니다. 내용을 옮기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jtm71 (토론) 2009년 1월 7일 (수) 15:52 (KST)답변

--Tol6560 (토론) 2019년 3월 14일 (목) 05:34 (KST)답변

한사군 낙랑 위치 위키 표현을 보면 중국 낙양으로부터 5,000리=1,963Km 구글 어스로 거리 측정해보면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보다 위쪽이고, 한사군 지도 표현된 위치보면 정말 어이가 없는 것은, 한국사에서 기자조선을 부정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제가 위키와 사기 번역문 성씨 문중 상계 연표 유전자 분포 여러 내용을 보면서, 느낀 것은 기자 조선은 실존했던 단군 조선을 뿌리로 한 혈통입니다. 단군조선 영역은 북방 유목 부족들로, 북경 북쪽과 동쪽을 싸고있는 산맥이 중국 만리장성 중원을 형성하고 있는, 외곽 지역 부족들로, 일부가 남하 황하 하나라를 치고 중국을 통치했습니다.

상나라 출발 지역은 여러 유물을 고려하면 랴오닝성 요하 지역으로, 단군조선 환인(위키 관련 검색 결과를 종합하면, 지도자를 표현하는 문자 '환(桓)은 밝은 빛으로 그 모양을 본떴다' 지명에 남은 것입니다)현, 졸본 부여 오녀산성도 선양시 외곽지역 200Km 거리입니다. 만물이 그로부터 생겨났다는 인因, 어질 인仁은 지도자를 표현하는 같은 뜻입니다. (桓 한자 윈도우 한자 검색 푯말 환 표시, 본 뜻 아님)

단군조선朝鮮 혈통 상商나라가 중원을 주周족 주周나라에 뺏기면서, 북경 연나라 옆 요하지역=평양=양평=(평평 할 평平 부드러운 흙 양壤, 넓고 평평한 농사짓기 좋은 땅), 요하 일대를 수도로 조선을 자子 성姓을 쓰는 상商왕족 기箕자子(자子성姓기箕씨氏) 서여가 이엇고, 천년이 넘게 국가를 형성하면서, 기자箕子조선朝鮮 영역은 한반도 북쪽과 동북 3성 지역에 존재했습니다.

스키타이족(동호족=선비족)은 BC 600년 경부터 기마 민족으로서 중앙아시아와 동부 유럽에서 건너와서, 지금의 중앙아시아지역과 유럽스탭(steppe)지역 그리고 현재의 러시아연방의 영토에 있는 지역을 걸져서 고대에 국가를 건설했고, 기자조선~고구려까지 교류와 전쟁을 했고, 랴오닝성 지역에 영향을 줬고, 선비 흉노 혈통은 경상도 지역에 많은 분포하고 있습니다.

BC500년 지도에서 연나라는 갈석산 지역까지 표시됐고, 요하지역은 중원 통제 밖에 있었던 기자조선 영역입니다.

BC300년, 연나라 장군 진개(유목민에 인질 경험)에 연나라 북경으로부터 서쪽 2천리를 뺐겼을 때, 요하 북서쪽 벌판엔 유목민 동호족까지 정벌했고, 2천리는 랴오닝성 전체와 남쪽으론 평안북도 박천강 위쪽을 경계로 했다는 것을 보면, 기자 조선은 이때 요하 평양에서 현재 평양으로 수도를 이전한 것으로 보입니다.

BC500년경 지도엔 없던 이 지역 표기가, BC206년~202년 항우가 세운 서초 18국과 별도로 요하지역과 박천강 유역까지 요동으로 표시됩니다.

연나라 진개 공격에 기자조선은 서쪽 지역은 잃었지만, 수도를 현재 평양으로 옮기고 남은 지역을 다스리다가, 연나라 주족 주문왕 아들 위卫=衛강康숙 봉封 후손인 희姬성 위衛씨 위만 1000여명 공격에 기자조선이 망했을 땐 현재 평양 성이 점령 당한 것으로, 기자 조선이 망하면서 사회 지도층인 왕족과 대신들은 해로를 따라 남하 청주에서 마한을 세웠지만, 기존 백성들이 모두 남하한 것은 아닌, 위만 조선이 평양을 차지했을 BC194년 즈음, 동북쪽엔 기자조선=상(은)나라 달력을 쓰는 부여가 생성됐습니다.

낙랑 지역은 연나라 진개 BC300년~낙랑 AD37년 고구려에 수복될 때까지 337년, 랴오닝성 지역은 전연에 뺏길 때까지 619년 정도 주족 계통 왕족이나 주족 영향을 받는 토착 호족이 일시 점령했던 것이고, 랴오닝성 지역은 북쪽 유목 부족인 선비족 전연이 AD 319년 점령했고, AD 407년 후연이 고구려에 망할 때 만리장성 갈석산까지 조선朝鮮민족이 완전 수복 했습니다.

따라서 랴오닝성 요하 지역이 중국 영향을 받은 것은 619년, 원래 우리 단군 조선과 상나라가 시작된 지역 역사에서 짧은 기간입니다. 한반도와 동북 3성 지역은 4,352년 동안 조선朝鮮민족이 가장 오랫동안 점유했던 지역으로, 중국은 조선朝鮮민족을 이은 우리 남북한 조선朝鮮민족에게 동북3성 평화적 이양 해야 합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 쓰고 있던 단기 4,352년 역법까지 남아있는 판국에, 단군 조선을 소설로 치부하는 것은, 여러 유물 발견, 유전자 지역 분포, 갑골문자부터 시작된 성씨 혈통과 연관 있는 나라와 지역 이름, 언어, 부정하는 것은 논센스로 생각됩니다.

명칭 따위가 무엇이든 한4군현을 수복한 것은, 고구려, 고구려는 주족 위만 조선 후예가 아닌, 조선=상=기자조선 계통인 3부여-고구려 조선족에 의해서 수복 된 것입니다.

위만조선= 기자조선을 전부 점령하지 못한 수도만 점령한 일제치하와 동일한 개념, 한국사에서 삭제해야 하고, 조선의 일부가 세운 상나라 혈통인 기자 조선이 위만에 망한 것은 사회지도층 일부로, 대다수 혈통은 부여=고구려 생성과 함께 기자조선에서 이어졌습니다. 위만조선은 주족 중국의 역사로 한국사가 아닙니다. 발해 신라 남북국 시대처럼, 단군조선-상나라-기자조선-마한韓 부여-삼국시대로 한국사는 재정립 돼야 합니다.

이것은 제가 독자적으로 만들어 낸 소설이 아닌, 위키에서 검색되는 고대사, 사기, 왕족 중심으로 번성할 수 밖에 없는 주요 유전자 분포도, 홍산문화 요하문명 지역, 5천년 동안 아시아 지역은 주周족 주周나라 후손과 조선朝鮮족 상商나라 후손 사회 지도층 패권 경쟁이 본질입니다. 모든 관점을 국가주의에 맞춰서 분류하려니까, 실제 증거가 있는 문중 혈통은 유전자 검사를 통해 검증 할 수 있슴에도 하지 않으면서 무시합니다. 아시아 역사는 국가의 역사 보단 갑골문자=한자, 상형문자 발생과 함께 시작된, 지역 혈血족族을 표시하는 성姓씨氏 혈통 가문의 역사가 더 오래 됐고, 아시아 가문 혈통을 거슬러 올라가고 내려오면, 섞여서 살고 있기 때문에, 세계에서 가장 가까운 혈통이 한중일입니다. 왕족 혈통 중심 역사인 봉건 국가들 중심으로 역사를 정리하니까, 국가주의 주관이 개입되고, 같은 사실에 대해서 다른 해석 하는 것입니다.

제가 본 역사적 증거 '사실'들에서 옛날 봉건 왕조 누가 이 지역을 다스렸느냐는 대결 구도만 형성하는 것으로, 역사는 그런 것을 위해서 정리하는 것은 아니라 생각합니다. 사람은 X와 Y 로 구성돼있고, 사람의 역사는 남자 부계혈통 Y왕족 역사는 반쪽 짜리 역사로, X 혈통 역사를 유전적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 국가와 가문의 경계는 사라집니다. 남자의 역사가 아닌, 사람의 역사를 정리해야 하고, 그것엔 개인, 봉건 요소 강한 국가 주관이 개입되면, 아무리 많은 유물 출토 해도, 주관적 해석 왜곡이 발생 소설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한사군은 요하지역에 있던 현실적 '사실'이고, 유물 출토 역시 처음부터 다시 해석 역사를 정리해야 합니다.

금석병용기 관련 편집

브리태니커백과의 내용을 참조하면, 금석병용기에 대해 언급한 내용은 꽤 오래 전의 것인 듯합니다. 《글로벌세계대백과》에서 인용된 내용인 듯한데, 맞게 고칠 필요가 있을 듯합니다. jtm71 (토론) 2009년 1월 7일 (수) 15:50 (KST)답변

이건 아닌데요..... 편집

이 내용과 지도는 한국사신론이라는 식민사관에 물들어진 책에 너무 입각해있네요. 식민사학의 잔재를 재빨리 제거합시다! xakyntos씨는 여기에 태클걸지 마십시오. World historia (토론) 2012년 7월 12일 (목) 19:43 (KST)답변

해당 내용이 식민사관이 맞음을 증명하시고 해당 내용을 대체하는 주장이 학계의 공론임을 입증하신다면 얼마든지 제거 가능하십니다. 이걸 하시지 못하신다면 아무리 여기서 제멋대로 편집을 해도 모조리 다 되돌려질 뿐입니다. 자중하시지요. 참고로 제 토론페이지에 자꾸 하시는 반달행위는 차단의 사유가 될수도 있습니다. 주의하십시오.--Xakyntos (토론) 2012년 7월 13일 (금) 00:20 (KST)답변

한사군의 위치에 대하여 편집

한사군의 위치에 관해서 많이 편집하였습니다. 다시 원래대로 바꾸기 위해서는 저를 포함한 위키 편집자들과의 토론을 거쳐 어느 정도 동의가 되었다 싶을때 문서를 수정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222.101.9.93 (토론) 2012년 9월 20일 (목) 19:47 (KST)답변

귀하야 말로 귀하의 주장을 올리기 위해서는 토론을 거쳐 주시기 바랍니다. 물론 상세한 출처를 제시해야 함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귀하의 편집은 명백한 중립성 위반으로 위키에서 허용되지 않는 행위입니다.--Xakyntos (토론) 2012년 9월 20일 (목) 21:26 (KST)답변

한사군 --> 한군현 편집

이 문서의 제목을 기존 한사군에서 새로 한군현으로 변경합니다. 표제어 변경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1. 한나라 무제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그 자리에 세운 4군이 모두 실효적으로 존재했던 기간은 겨우 25년으로 짧고, 대부분의 기간 동안 낙랑군만 존속했습니다.
  2.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그 지역에 설치한 한나라의 군은 4개가 아니라 모두 5개입니다. 서로 존재했던 기간이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역사상 존재했던 한나라의 군(郡)은 낙랑군, 현도군, 진번군, 임둔군, 대방군으로 모두 다섯 개입니다. 한사군(漢四郡) 대신 한오군(漢五郡)이라고 할 수는 없으니, 한군현이라고 해야 합니다.
  3. 교육부 산하 한국교육학술정보원이 제공하는 RISS 검색 결과, 예전 논문에는 '한사군'이라는 용어가 많았으나 최근 논문에는 '한군현'이라는 용어가 더 많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참고로 송호정 교수의 논문에도 '한군현'이라고 되어 있습니다.(송호정, "한군현(漢郡縣) 지배의 역사적 성격", 역사와 현실, 한국역사연구회, 2010년)
  4. 대한민국 국사 교과서에는 한사군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그 대신 한나라가 군현을 설치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고조선이 멸망하자 한은 고조선의 일부 지역에 군현을 설치하여 지배하고자 하였으나 토착민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혔다. 그리하여 그 세력은 점차 약화되었고 결국 고구려의 공격을 받아 소멸되었다." - 고등학교 교과서 36쪽) (사용자:jtm71 님의 의견을 재인용)

이상의 내용을 근거로 '한사군'(漢四郡) 대신 '한군현'(漢郡縣)으로 용어를 변경합니다. -- 아사달(Asadal) (토론) 2015년 3월 22일 (일) 16:36 (KST)답변

개악입니다. 한군현은 한나라의 군현이라는 뜻으로 오히려 한사군보다도 범위가 넓습니다. 물론 한사군이라고 해서 단 4군만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최초 설치가 4군이었던 덕분에 그것으로 통용되고 있습니다. 2015년 현재도 한군현보다는 한사군이 더욱 통용되고 있습니다. 관련 근거 ① riss 검색 결과 한사군한군현보다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2015년 최근까지도 말입니다. ② ‘국사편찬위원회’가 편찬한 통사에서도 한사군이라 합니다. ③ 네이버 트랜드 검색 역시 한사군이 한군현보다 많습니다. ④ 위키백과 내에서도 한사군이 표제어로 통용됩니다. 즉 한사군이나 한군현이나 ‘국내 한정’으로 비슷한 뜻으로 쓰일 뿐 한사군은 한군현보다 좁은 의미이며 국제적으로는 고유명사와 비슷하게 쓰이고 있습니다. 물론 국내에서도 한사군이 더 잘 쓰입니다. 이상에 근거하여 한사군으로 다시 돌려주시기 바랍니다. 일단술먹고합시다 (토론) 2015년 3월 23일 (월) 22:46 (KST)답변
사실 최근 학계의 트랜드(?)는 한사군이나 한군현 같은 부정확한 명칭이 아니라 동방변군(東方邊郡)이라는 명칭입니다. 한사군이던 한군현이던 간에 한나라 멸망 이후의 시점에서 모두 맞지 않는 명칭이 되니까요. 하지만 학계의 명칭은 일반 상식 수준인 백과사전에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고, 그렇다면 여러모로 널리 알려진 명칭인 한사군이 더 표제어에 적합하겠지요. 어쨌거나 전근대 시대부터 쭉 이어져온 유서 깊은 명칭이니까요.--Xakyntos (토론) 2015년 3월 24일 (화) 11:22 (KST)답변
여전히 통보만 있을 뿐, 명칭을 변경하자는 토론은 전혀 없었군요. 그런 태도 고치라고 했는데도 여전합니다. -- S.H.Yoon · 기여 · F.A. 2015년 3월 24일 (화) 11:27 (KST)답변
그리고 한군현은 전한과 후한의 행정 제도인 군현제와도 상충됩니다. 이 한군현의 당시 만주 일대에 설치된 군현들을 대표할 수도 없으니까요. 차라리 한사군으로 환원하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어차피 고대사는 큰 관심도 없고 많은 것을 알지 못하니 이쯤에서 얘기하고 빠지렵니다. -- S.H.Yoon · 기여 · F.A. 2015년 3월 24일 (화) 11:29 (KST)답변

부정확한 명칭 편집

위에서 Xakyntos 님이 잘 지적하신대로 한사군이나 한군현이나 모두 부정확한 명칭인 것은 맞습니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한나라는 서기 220년에 망했지만, 낙랑군은 서기 313년까지 지속되었고, 대방군은 314년에 고구려에게 멸망될 때까지 존속하였습니다. 따라서 서기 220년 한나라가 망한 이후에도 거의 100년 정도 더 오래 존재했던 낙랑군이나 대방군에 대해서 한사군 또는 한군현이라고 부르는 것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멸망하여 존재하지도 않는 나라의 지방 군현이라는 게 모순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을 고려하여 대체로 학계에서도 낙랑군 등에 대하여 중국 본토의 한나라와는 상당히 독립성을 가진 별도의 정치체제로 보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또한 낙랑의 지배층은 한족이었으나 대다수를 이루는 피지배층은 고조선 사람이었고, 낙랑군의 문화 역시 중국 본토의 한나라 문화와 토착 고조선 문화가 융합된 독특한 별개의 문화를 유지했다고 보는 것 같습니다.(어쩌면 오늘날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비슷했을 수도 있겠습니다. 아니면 몽골의 후계를 자처한 사람들이 건국한 인도의 무굴제국과 비슷했을 수도 있겠죠.) 이런 점에서 낙랑군, 대방군 등을 단순히 한사군 또는 한군현이라고만 부를 경우, 한나라의 다른 여러 지방 군현들과 비슷한 지방 정치체제로 잘못 판단할 수 있으므로, 사실은 둘 다 부정확한 용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 아사달(Asadal) (토론) 2015년 3월 25일 (수) 04:18 (KST)답변

유서 깊은 명칭 ? 편집

위에서 Xakyntos님의 글 중에서 "전근대 시대부터 쭉 이어져온 유서 깊은 명칭"이라는 부분에 대해서는 약간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몇 년 전 '동이' 논쟁 기억하시죠? 전근대 시대부터 수천년간 상나라에 대해 동이족이 세운 나라라고 서술해 왔으나, 지금은 어떤가요? 현대 사학의 연구 성과에 따라, 전근대에 이어져온 유서 깊은 명칭이 사실상 무의미해지지 않았나요? 이건 제 말이 아니라 수년전 Xakyntos 님이 저에게 가르쳐준 내용입니다. 지금도 그 때의 가르침에 대해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이제 와서 스승(?)이 그 가르침을 어기고, 전근대부터 쭉 이어져온 유서 깊은 명칭(즉, 한사군)을 선호한다고 하시면, 학생(!)이 머리가 혼란스러워집니다. ^_^ 전근대의 자료와 출처를 아무리 많이 제시하더라도 현대의 최신 연구성과에 의해 깡그리 부정될 수 있다고 저에게 가르친 사람이 바로 Xakyntos 님이었으니까요. 따라서 한사군으로 명칭을 되돌려야 하는 다른 설득력 있는 근거를 제시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 아사달(Asadal) (토론) 2015년 3월 25일 (수) 04:26 (KST)답변

동이처럼 아예 틀린 사실이라면 전근대의 상식이나 자료는 아무리 많아도 쓸모가 없습니다. 하지만 한사군은 아예 틀린 것도 아니고 단지 일부 이견이 있을 뿐인 명칭입니다. 게다가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한나라 멸망 이후의 한사군도 얼마든지 납득 가능한 명칭이 됩니다. 예를 들어 한나라가 설치했던 4군이라고 해석한다면, 한나라가 망한 뒤라도 아무 상관이 없어집니다. 설치한 주체가 한나라라는 의미가 있을 뿐, 한나라가 없어지면 사군의 존재도 모호해지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렇게 보면 겨우 20여년 존재했을 뿐인 4개 군도 별 문제가 안됩니다. 어쨌든 한나라가 설치한 4개 군의 후예로 낙랑군, 현도군이 계속 이어져 내려온 것이니까요. 한국 한정으로만 가리키는 객체가 유의미한 한군현과 달리 한사군은 명칭이 가리키고자 하는 객체가 명백합니다. 물론 한국 한정이긴 해도 한군현이라는 명칭이 학계에서도 어느 정도 인지도가 있는 만큼 이명으로 병기되거나 설명될 필요는 있을 것입니다.--Xakyntos (토론) 2015년 3월 25일 (수) 10:05 (KST)답변
말씀대로 엄밀히 따진다면 둘 다 부정확한 표현이 맞겠습니다만 님께서는 그것을 굳이 한군현으로 바꾸시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현재 ‘한사군’은 단순히 한나라의 (불특정) 네 개의 군이 아니라 한반도에 설치되었었던 그 4군으로 거의 고유명사격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전세계에서도 말입니다. 또한 한사군은 전근대에도 그랬고 현재에도 곳곳에서 선호하는 명칭인데요........... 그렇다면 굳이 네티즌들을 접근하기 어렵게 만들 필요는 없겠지요. 한사군의 네이버 지식백과 검색 결과로도 고유명사로 쓰이고 있습니다. 일단술먹고합시다 (토론) 2015년 3월 25일 (수) 17:22 (KST)답변

위 좋은 말씀에 감사드립니다. 다만, 제가 한사군한군현으로 변경한 이유는 저만의 개인적 판단이 아니라, 대한민국 국사 교과서에 한군현으로 표기되고 있다는 사용자:Jtm71 님의 의견을 읽고 공감을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지금이라도 @Jtm71: 님을 이 토론에 초청하여, 의견을 들어본 후에 결정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 아사달(Asadal) (토론) 2015년 3월 27일 (금) 22:20 (KST)답변

대학급 교재가 아닌 고교 교과서에서의 한사군에 대한 서술은 대략 5차 교육과정을 기준으로 갈립니다.(1차는 서술이 너무 상세해서 생략했습니다;;; 궁금하면 여기)

동방 진출의 야심을 펴게 된 한 무제는 기원전 108년, 반도 북부와 남만주 일대에 낙랑, 현도, 임둔, 진번의 이른바 사군을 설치하여 군사적인 지배를 실시하였다. 한은 군을 다시 현으로 세분하고, 군과 현에는 한의 본국에서 태수와 속관을 파견하여 식민지적인 직할 정치를 폈다. 사군에 대한 경제적인 착취는 상당하여, 소금, 철, 목재, 농산물, 해산물을 비롯하여 노동력 등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한의 침략과 착취는 도리어 우리 민족의 줄기찬 반항 운동을 일으키게 하였다. 따라서, 우리 민족은 이민족과의 투쟁 과정에서 그 단결이 촉진되었고, 집권력의 강화를 보게 되어, 토착 사회의 새로운 역사가 전개되었다. 한의 군현을 설치한 후 26년 만에 우리 민족의 줄기찬 반항으로 진번, 임둔의 두 군을 철폐하게 되었으며(B.C. 82), 현도군도 만주로 후퇴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B.C. 75). 후한 말에는 낙랑군 남쪽에 대방군을 설치하여 한족 군현 세력의 회복을 꾀하였으나, 고구려와 백제의 줄기찬 공격으로 313년에 반도 안에서 완전히 구축당하였다. - 2차 교육과정

한은 고조선을 넘어뜨린 후 낙랑, 진번, 임둔, 현도의 4군을 두어 식민지로 만들었다. 그러나, 임둔군과 진번군은 한의 군현을 축출하려는 토착 세력에 견디지 못하여 곧 없어지고, 통구(퉁코우)의 현도군도 요동 방면으로 쫓겨갔다. 다만, 낙랑군과 후한 말기에 옛 진번군 지역에 설치되었던 대방군만이 오래 계속되다가, 고구려와 백제에게 망하였다. - 3차 교육과정

한은 고조선의 일부 지역에 낙랑, 진번, 임둔, 현도의 4군을 두었다. 그러나, 우리 민족은 이에 대항하여 이들을 축출하면서 계속 발전하였다. - 4차 교육과정

고조선이 멸망하자, 한은 고조선의 일부 지역에 군현을 설치하여 지배하려 하였으나, 지역 토착민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혔다. 그리하여 그 세력은 점차 약화되었고, 드디어 고구려의 공격을 받아 소멸되었다.(313) - 5차 교육과정

고조선이 멸망하자 한은 고조선의 일부 지역에 군현을 설치하여 지배하고자 하였으나, 토착민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혔다. 그리하여 그 세력은 점차 약화되었고, 결국 고구려의 공격을 받아 소멸되었다. - 7차 교육과정

고교 교과서에서는 시간이 지날수록 한사군에 대한 비중을 줄여서 한사군, 낙랑군 등의 단어를 볼드모트화하는 바람에 단순히 한나라의 군현이라고만 퉁치다보니 비롯된 일입니다. 학계에서는 2015년 현재까지도 한사군이란 말이 여전히 널리 쓰인다는 것을 보여드렸고, 참고로 송호정의 ‘2011년’ 논문에도 제목이 한사군입니다. 또 2015년 현재 한사군은 거의 고유명사로 쓰이고 있다는 것까지 보여드렸습니다. 덧붙여 동방변군은 몇 번 보기는 했지만 표제가 될 정도의 트렌드까지는 안되지 않을까 합니다. 물론 의견은 많이 받을수록 좋으니 기다려드리겠습니다. 일단술먹고합시다 (토론) 2015년 3월 28일 (토) 10:36 (KST)답변

아직까지 Jtm71 님이 의견이 없으시네요. 제가 방금 사토:Jtm71에 의견을 남기고, 이 토론이 있다고 알려드렸습니다. -- 아사달(Asadal) (토론) 2015년 4월 1일 (수) 04:52 (KST)답변

발단이 된 2006년의 의견은 현재 그 내용을 확인할 수는 없지만 국사편찬위원회의 문답란의 내용을 요약한 것으로 생각됩니다.('*'로 시작되는 부분) 당시의 '역사'를 보면 그 내용을 남기면서 이러한 내용을 편집했고, 표제어나 용어를 바꾸지는 않았습니다. 이번 표제어 변경에 대해 앞서 토론란의 내용을 보고 별다른 의미 없는 답변을 남겼으나, 토론이 길어지기에 의견을 정리합니다. 현재로서의 개인적인 의견은, '한사군'이 왜곡된 용어이고 일부에서는 존재를 부정한다 하더라도 그러한 용어로 오랜 동안 사용되어 왔다면 언급할 만한 이유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기자조선도 마찬가지이겠지요. jtm71 (토론) 2015년 4월 1일 (수) 05:18 (KST)답변
@Asadal:님... 한사군으로의 복귀에 명확한 반대나 그에 대한 더이상의 뚜렷한 근거가 없으시다면 표제어를 한사군으로 돌리는 게 맞지 않을런지요.... 일단술먹고합시다 (토론) 2015년 4월 6일 (월) 17:40 (KST)답변
예, 저는 모아진 의견에 따르겠습니다. -- 아사달(Asadal) (토론) 2015년 4월 8일 (수) 03:31 (KST)답변
총의에 따라 한사군으로 옮겼습니다.--Xakyntos (토론) 2015년 4월 8일 (수) 11:44 (KST)답변
"한사군" 문서로 돌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