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5일 (월)
- 20:562024년 4월 15일 (월) 20:56 차이 역사 +30 원종 (고려) 재위시작일 '1260년 3월 21일' → '1260년 4월 21일' / 즉위식을 거행한 날은 4월 21일(음력). 근거 고려사 최신 태그: 출생일수정 시각 편집
2024년 4월 10일 (수)
- 00:482024년 4월 10일 (수) 00:48 차이 역사 +22 최우 최우의 사망일을 '음력' → '양력'으로 오타수정하였다. 최신 태그: 출생일수정 시각 편집
- 00:402024년 4월 10일 (수) 00:40 차이 역사 −74 몽케 칸 '음력 7월 20일' → '음력 7월 21일' 태그: 출생일수정 시각 편집
- 00:272024년 4월 10일 (수) 00:27 차이 역사 +3 오굴 카미시 카툰 귀위크 칸 사망년도 오타수정 '1249년 3월' → '1248년 4월' 최신 태그: 시각 편집
2024년 2월 27일 (화)
- 19:352024년 2월 27일 (화) 19:35 차이 역사 0 북송 흠종 즉위식 날짜도 올바르게 변경함. 최신 태그: 시각 편집
- 19:302024년 2월 27일 (화) 19:30 차이 역사 +47 북송 흠종 즉위일 '1월 18일' → '1월 19일' 수정함. 근거는 송사 및 나무위키 '북송 흠종' 태그: 출생일수정 시각 편집
2024년 2월 26일 (월)
- 18:012024년 2월 26일 (월) 18:01 차이 역사 0 척준경 →제3차 여진족 토벌: 여진촌락 '129개' → '135개' / 근거는 고려사 및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윤관' 페이지 태그: 시각 편집
2024년 2월 19일 (월)
- 23:452024년 2월 19일 (월) 23:45 차이 역사 −41 오연총 →여진 정벌: '함락시킬 위기에 처했다.' → '함락될 위기에 처했다.', 길주가 점령되었다는 오류삭제. 각주에 등록된 고려사 출처 내용도 圍 '에워쌀 위, 포위할 위'를 사용하여 길주가 포위되었다는 뜻이지 점령되었다는 뜻이 아님. 최신 태그: 시각 편집
- 21:452024년 2월 19일 (월) 21:45 차이 역사 −5 윤관 →공신호 삭탈과 생애 말년: '1109년 10월 여진족이 갑자기 쳐들어와 길주성을 함락시키자' → '1109년 5월 길주성이 여진족에게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변경사유 : 길주성은 전쟁기간에 점령된 적이 없고, 전쟁은 이미 7월에 끝나 동북 9성을 반환했으므로 10월은 시기적으로 맞지 않음. 사료에도 1109년 10월에 전쟁했다는 기록이 없음. 고려사, 고려사절요에서는 길주성전투는 5월이라고 기록되어 있음. 태그: 시각 편집
- 19:192024년 2월 19일 (월) 19:19 차이 역사 0 윤관 →별무반 조직과 3차 여진족 토벌전쟁: 여진촌락 '129개' → '135개' 근거는 고려사 및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윤관' 페이지 태그: 시각 편집
2024년 2월 16일 (금)
- 19:462024년 2월 16일 (금) 19:46 차이 역사 +219 숙종 (고려) →생애: '1104년 동여진의 추장 영가(盈歌)가 사신을 보내어 내조하였으나 추장이 되면서 고려에 침입하였다. 같은해 2월에 임간(林幹)이 정주에서 패하였고,' → '1102년과 1103년에는 동여진의 태사 영가(盈歌)가 사신을 보내어 내조하였으나 영가가 죽고 오아속(烏雅束)이 태사가 된다. 오아속이 태사가 되고 1104년 1월, 동여진의 내분을 진압하기 위해 오아속의 기병이 정주 관문 앞까지 진군해왔다. 같은해 2월에 임간(林幹)이 관문 밖으로 나가 여진군을 공격했다가 패하였고,' 수정사유 : 동여진 영가가 통치하던 시절에 침입한 것이 아니라 오아속이 통치할 때임. 태그: 시각 편집
2024년 1월 31일 (수)
- 22:222024년 1월 31일 (수) 22:22 차이 역사 0 덕종 (고려) 즉위일 '1031년 5월 23일' → '1031년 5월 25일' 수정. 근거 : 고려사 태그: 시각 편집
2024년 1월 28일 (일)
- 15:332024년 1월 28일 (일) 15:33 차이 역사 +34 귀주 대첩 →경과: '거란군을 추격하여 거란군을 전멸 시켰다.' → '거란군을 추격, 격퇴하여 살아돌아간 거란군은 수천 명에 불과했다.' 태그: 시각 편집
- 15:312024년 1월 28일 (일) 15:31 차이 역사 +4 귀주 대첩 →경과: '마탄에서도 조원이 보낸 군사에 대패하면서 많은 군사를 잃게 된다.' → '마탄에서도 시랑 조원에게 대패하면서 1만 명의 군사를 잃게 된다.', '고려본진과 거란군을 완전포위 하고' → '고려본진과 함께 거란군을 완전포위하고' 태그: 시각 편집
- 15:302024년 1월 28일 (일) 15:30 차이 역사 −3 귀주 대첩 →경과: '기병1만4000천명' → '기병 1만 4천명' (2곳 수정) 태그: 시각 편집
2024년 1월 26일 (금)
- 18:512024년 1월 26일 (금) 18:51 차이 역사 −1 제3차 고려-거란 전쟁 요나라의 생존병력 '2천여 명' → '수천 명' 수정. 수정근거는 <고려사> 및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강감찬' 항목 등. 2천여 명이 살아서 돌아갔다는 근거는 <요사> 및 다른 백과사전에서도 찾을 수 없음. 근거가 있을 시 다시 2천여 명으로 수정요망. 태그: 시각 편집
2024년 1월 24일 (수)
- 03:192024년 1월 24일 (수) 03:19 차이 역사 +3 견훤 →고창 전투에서 운주성 전투까지: '왕건은 ~ 일모산성을 정벌하였고, 11월에도 ~ 점령하였다.' → '왕건은 ~ 일모산성을 공격하였고, 그 해가 가기 전 고려군은 다시 일모산성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국사편찬위원회 확인결과 왕건이 7월에 일모산성을 점령하지 못한 것으로 추론되며, 점령된 때가 11월이라는 것은 근거가 없음. 태그: 시각 편집
2024년 1월 19일 (금)
- 23:112024년 1월 19일 (금) 23:11 차이 역사 +236 목종 (고려) →국방: 1001년에 영풍진(永豐鎭), 1005년에 진명현(鎭溟縣), 금양현(金壤縣), 곽주(郭州), 1008년에 등주(登州)에도 성을 쌓았다는 내용추가. 그리고 뒤죽박죽 섞여있던 내용 년도별로 정렬하여 수정. 근거는 고려사 및 두산백과. 철저하게 비교검증함. 태그: 시각 편집
2024년 1월 16일 (화)
- 16:582024년 1월 16일 (화) 16:58 차이 역사 0 경종 (고려) 경종 즉위일 '5월 13일' → '5월 23일' 수정함. 근거는 고려사 태그: 시각 편집
- 16:402024년 1월 16일 (화) 16:40 차이 역사 −6 태조 (고려) →후삼국 통일: '9월 나주를 통해 고려에 귀부하게 된다.'라는 내용 중 '9월'을 삭제함. 견훤이 고려에 투항의사를 전달한 때가 6월이었고, 귀부한 때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음. '9월'에 대한 근거가 있을 시 재등록 요청드립니다. 태그: 시각 편집
2024년 1월 1일 (월)
- 23:132024년 1월 1일 (월) 23:13 차이 역사 0 이순신 전라좌도수군절도사 임기마지막날을 '3월 14일' → '4월 12일' 원복함. 3월 14일은 삼도수군통제사의 마지막날이지만, 3월 15일부터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해임되어 경상도를 제외한 전라도와 충청도의 통제사 지위를 갖게 되므로(국사편찬위원회의 확인을 받음), 전라좌도수군절도사의 재임기간은 원복하는 것이 맞음. 태그: 시각 편집
2023년 12월 31일 (일)
- 17:582023년 12월 31일 (일) 17:58 차이 역사 +5 이순신 이순신 장군의 생가 현 주소지 신주소 도로명 기준으로 최신화함 태그: 시각 편집
- 17:552023년 12월 31일 (일) 17:55 차이 역사 +54 이순신 이순신 장군의 생가 현 주소지 추가기입함. 태그: 시각 편집
2023년 12월 27일 (수)
- 12:362023년 12월 27일 (수) 12:36 차이 역사 +1 태조 (고려) →발해 흡수와 후백제와의 전쟁: '음력 9월 공산 전투에' 내용 중 '9월' → '11월'로 변경함. 네이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공산전투' 페이지와, 나무위키 '공산 전투' 페이지에서는 11월로 되어 있음. 그 이유는 삼국사기에서 견훤군이 진격을 시작한 때가 9월이며 경주시를 공격한 때가 11월이기 때문임. 따라서 사료에 일괄기술이 되어 있어 9월로 오해할 수 있으나 공산전투는 11월에 발생함. 태그: 시각 편집
- 12:222023년 12월 27일 (수) 12:22 차이 역사 +11 태조 (고려) →궁예의 휘하 부장: 왕건 가문이 궁예의 휘하로 들어간 년도 '895년' → '896년' 수정. 근거는 고려사, 네이버캐스트 왕건 페이지, 나무위키 태조(고려) 태그: 시각 편집
- 12:092023년 12월 27일 (수) 12:09 차이 역사 −9 고구려 부흥운동 →해서지방의 부흥운동: '670년 8월 안승이 검모잠을 살해하면서' 내용 중 '8월' 삭제. 정확한 사망시기를 알 수 없으나,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각주 및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검모잠 페이지에서는 7월 말로 추측하는 견해. 다른 백과사전들은 그 시기에 대해 기술하지 않음. 8월 사망에 대한 근거가 있으면 다시 등록부탁드립니다. 최신 태그: 시각 편집
- 11:092023년 12월 27일 (수) 11:09 차이 역사 0 장수왕 →생애: '489년' → '481년' 오타수정. 한국사데이터베이스와 두산백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모두 481년으로 기술되어 있는 것을 철저히 확인하였음. 태그: 시각 편집
- 11:072023년 12월 27일 (수) 11:07 차이 역사 0 고구려 →서진 및 남진정책과 평양천도 (413년-531년): '489년' → '481년' 오타수정. 한국사데이터베이스와 두산백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모두 481년으로 기술되어 있는 것을 철저히 확인하였음. 태그: 시각 편집
- 10:332023년 12월 27일 (수) 10:33 차이 역사 −4 고구려 →조위와의 전쟁 (13년-270년): 대방현 태수 → 대방현령 태그: 시각 편집
2023년 12월 17일 (일)
- 21:342023년 12월 17일 (일) 21:34 차이 역사 +10 문주왕 477년 4월에 문주왕이 사망하였다고 기술되어 있었으나, 삼국사기에 의거하여 '4월' → '9월' 변경함. 문주왕은 사냥 중 자객에게 공격당해 결국 사망하였는데, 4월에 피습을 당했거나 사망하였다는 어떠한 근거도 찾지 못함. 두산백과에서는 가을에 죽었다고 하고, 나무위키에서는 9월로 표기하고 있음. 후임자 삼근왕도 9월에 즉위하게 되어 9월이 확실함. 태그: 출생일수정 시각 편집
- 03:122023년 12월 17일 (일) 03:12 차이 역사 +3 태종무열왕 →백제 부흥군 진압: '왕흥사잠성(王興寺岑城)을 공격해 7일에 함락시키고' 부분에서 '7일에 함락' → '7일째에 함락' 오타수정, 근거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삼국사기이며 추가적으로 모든 역사 뉴스기사에서도 7일째에 함락했다고 기술되어 있어 위키백과만의 오타로 보임 태그: 시각 편집
2023년 12월 11일 (월)
- 20:462023년 12월 11일 (월) 20:46 차이 역사 0 고구려 →고구려의 한사군 정복과 전연 공략 (270년-371년): ‘314년에는 낙랑군을’ → ‘313년에는 낙랑군을’ 태그: 시각 편집
- 20:282023년 12월 11일 (월) 20:28 차이 역사 0 고구려 →고구려의 한사군 정복과 전연 공략 (270년-371년): ‘302년에는 현도군을 공격하여 ~ 311년에는 고구려군은 서안평(西安平)을 정복하여' → '302년에는 고구려군이 현도군을 공격하여 ~ 311년에는 서안평을 정복하여'라고 변경하여 주어를 앞으로 이동 및 어색한 문장 개선. 태그: 시각 편집
- 20:232023년 12월 11일 (월) 20:23 차이 역사 −185 고구려 ‘한반도인들에 의해 대방군은 이미 몇백년 이전에 멸망하였기 때문에 311년에는 고구려군은 서안평(西安平)을 정복하여.’ 라는 부분에서 ‘한반도인들에 의해 대방군은 이미 몇백년 이전에 멸망하였기 때문에’ 부분을 삭제함. 대방군은 313년에 고구려의 공격을 받은 것이 사료에 분명히 등장하며 학계에서도 313년 멸망이라고 보고 있음. 다른 모든 백과사전들에서도 313년 멸망설 지지 / ‘이에 따라 313년에는 낙랑군의 군벌 장통(張統)이 요동으로 퇴각하였으나 장통은 사로잡혀 죽었고 미천왕은 314년에는 낙랑군을 정복하여’ 라는 부분에서 ‘낙랑군의 군벌 장통(張統)이 요동으로 퇴각하였으나 장통은 사로잡혀 죽었고’라는 부분 삭제. 장통은 원래 요동군벌임이 분명하며 다른 사전들에서도 요동출신이라고 기술되어 있음. 장통은 319년에도 사료에 등장하여 사로잡혀 죽었다는 것은 근거가 없음. / ‘313년에는 대방을,’이라는 내용추가 기입함. 태그: 시각 편집
2023년 12월 9일 (토)
- 15:192023년 12월 9일 (토) 15:19 차이 역사 0 고구려 →서진 및 남진정책과 평양천도 (413년-531년): '북연의 수도 용성(龍城)에 있던 모용씨 황제 일가족과 풍흥 그리고 용성 주민들을 전부 고구려 국내성으로 끌고 갔다.'라는 내용 중, '풍흥' → '풍홍' 오타수정함. 태그: 시각 편집
2023년 12월 7일 (목)
- 05:012023년 12월 7일 (목) 05:01 차이 역사 +8 고구려 →연씨집권과 고당전쟁의 발발 (618년-668년): '내지로 천사됐고 당왕조는' → '내륙으로 이동되었고 당나라는', '살게하고' → '살게 하고', '주고받는등' → '주고받는 등' 태그: 시각 편집
- 04:542023년 12월 7일 (목) 04:54 차이 역사 +9 고구려 →연씨집권과 고당전쟁의 발발 (618년-668년): ‘645년 당 태종은 옛 한군현을 되찾고 난신적자 연개소문을 치겠다며 11월,’ → ‘644년 11월, 당 태종은’~, ‘시작했다.이때’ → ‘시작했다. 이때’, ‘수만명이’ → ‘수만 명이’, ‘2~3천의’ → ‘2~3천 명의’, ‘2500이라’ → ‘2500명이라’ 태그: 시각 편집
- 04:412023년 12월 7일 (목) 04:41 차이 역사 +5 고구려 →고수전쟁과 살수대첩 (531년-618년): '회수와 장강 연결해서' → '회수와 장강을 연결해서', '2천600여만명' → '2천600여 만 명' 태그: 시각 편집
- 03:512023년 12월 7일 (목) 03:51 차이 역사 −4 고구려 '30만 명' → '수만 명', '쳐들어 가서' → '쳐들어가서', '왕백구 토벌하여 붙잡아 인질로 잡았다.' → '왕백구를 토벌하여 인질로 붙잡았다.' / 갈로맹광이 거느렸다는 군사 30만 명 → 수만 명으로 수정한 근거는 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이고, 두산백과와 한국민족대백과사전 '갈로맹광' 페이지에서도 동일하게 수만 명으로 표기된 것을 철저하게 확인 후 진행하였다. 태그: 시각 편집
2023년 12월 6일 (수)
- 04:132023년 12월 6일 (수) 04:13 차이 역사 0 유금필 →의의와 평가: '몸받쳐 싸운게' → '몸바쳐 싸운게'
- 04:122023년 12월 6일 (수) 04:12 차이 역사 +1 유금필 →일리천 전투와 후백제의 멸망: 띄어쓰기 실시
- 04:122023년 12월 6일 (수) 04:12 차이 역사 +3 유금필 →일리천 전투와 후백제의 멸망: 짐작케 해준다. → 짐작하게 해준다.
- 04:112023년 12월 6일 (수) 04:11 차이 역사 −13 유금필 →일리천 전투와 후백제의 멸망: '일선군(一善郡: 지금의 경상북도 선산군)' → '일선군(一善郡: 구미시 선산읍)'
- 04:092023년 12월 6일 (수) 04:09 차이 역사 0 유금필 →일리천 전투와 후백제의 멸망: '견휜' 부분에서 '휜' → '훤' 오타수정
- 04:082023년 12월 6일 (수) 04:08 차이 역사 +20 유금필 →일리천 전투와 후백제의 멸망: '936년(태조 19)에 ~ 고려(高麗)와 후백제(後百濟) 사이에 있었던 대규모 전투이다.'라는 부분에서 주어가 없으므로 앞에 '일리천 전투는' 단어추가
- 04:062023년 12월 6일 (수) 04:06 차이 역사 +1 유금필 →운주 전투: '30여성이' → '30여 성이'
- 04:052023년 12월 6일 (수) 04:05 차이 역사 +14 유금필 →운주 전투: '3,000여명을' → '3,000여 명을', '살획하였고' → '죽이거나 사로잡았고'
- 04:042023년 12월 6일 (수) 04:04 차이 역사 +16 유금필 →신라 구원: '살획한' → '죽이거나 사로잡은'
- 04:032023년 12월 6일 (수) 04:03 차이 역사 +13 유금필 →청주 전투: '살획하였다.' →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 04:002023년 12월 6일 (수) 04:00 차이 역사 −2 유금필 →신라 구원: '서울을' → '수도를', '돌아 가지 ' → '돌아가지', '살획한' → '죽이거나 사로잡은', '이 같이' → '이같이', '내려 가서' → '내려가서', '새겨 두었으니' → '새겨두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