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정희 (1944년)

대한민국의 영화배우

윤정희(한국 한자: 尹靜姬, 본명손미자, 한국 한자: 孫美子, 1944년 7월 30일 ~ 2023년 1월 19일)는 대한민국영화배우이다. 대종상 등 8개 신인상과 청룡영화제 인기상을 비롯해[1] 문희, 남정임과 함께 60,70년대 여자 배우 트로이카로 유명하였다.[2] 1968년 《장군의 수염》, 《절벽》, 1969년 《독 짓는 늙은이》, 《지하실의 7인》, 1971년 《분례기》, 1972년 《무녀도》, 《궁녀》, 1994년 《만무방》 등의 영화에 출연했다. 총 300여 편의 영화에 출연했다.[3]

윤정희
尹靜姬
윤정희, 2010년 《》 제작발표회.
본명손미자
孫美子
출생1944년 7월 30일(1944-07-30)
대한민국 부산직할시
(현 부산광역시)
사망2023년 1월 19일(2023-01-19)(78세)
프랑스 일드프랑스 파리
국적대한민국
직업영화배우
활동 기간1967년 ~ 2010년
종교천주교(세례명: 데레사)
학력 파리 제3대학교 대학원 예술학과 석사 (졸업)
배우자백건우
자녀백진희 (딸, 1977년생)
웹사이트윤정희 한국영화 데이터 베이스

후배 연기자 금보라(본명손미자)와는 본명이 동명이인인 그녀는 대한민국 여자 석사 배우 1호라 일컬어지고 있으며 이후에는 후배 영화배우 유지인이 사실상 대한민국 여자 석사 배우 2호의 맥을 이었다.

생애 편집

 
1966년의 윤정희

일제강점기인 1944년에 경상남도 부산에서 한 대학 교수의 딸로 태어났다.[4] 경상남도 밀양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내고, 전라남도 광주에서 성장했다. 유치원을 다닐 때부터 발레와 노래를 배웠다.[4][5]

배우 데뷔와 전성기 편집

1967년 1,200:1의 경쟁률을 뚫고 합동영화사 강대진 감독의 영화 《청춘극장》으로 데뷔하였다.[6] 합동영화사의 전속 배우로 계약하였는데, 김기덕 감독의 《네 멋대로 살아라》에 조연으로 출연해 달라는 요구에 자존심이 상해 전속 계약을 해지하였다.[5] 이후 여러 영화사의 영화에 출연할 수 있게 되어, 첫 해에 22편을 촬영하는 등 많은 영화를 촬영하였다. 데뷔때 함께한 신성일과 파트너로 99편의 영화에 함께 주인공으로 나란히 출연하였다.[7] 데뷔 후 7년 동안 280편에 출연했는데, 촬영이 많을 때는 하루에 3편을 동시에 찍기도 했고, 각기 다른 캐릭터를 소화하기 위해 차에서 머리를 바꾸고 차에서 잠을 자는 등 영화 외에 다른 사생활이 없었다고 말했다.[8] 그 결과 프랑스 유학 이전까지 청룡상, 대종상 등에서 여우주연상만 24번 수상하였다.[1] 전성기 시절엔 주연작품 5개를 동시에 상영하기도 했다.[8]

유학 편집

1년에 최소 40편, 일주일에 1편꼴로 영화를 찍었던 세월을 뒤로하고, 1973년 여우주연상 수상 소감에서 데뷔할 때부터 염두에 두고 있던 프랑스 유학을 발표한다. 1972년 뮌헨 문화올림픽과 윤이상의 오페라 《심청이》가 동시에 열려 효녀 심청으로 신상옥 감독과 참석했는데, 오페라 계단에서 피아니스트 백건우를 처음 보고 한국인임을 알아보고 자리가 어디인지 물어봐 친절하게 도움을 받았다.[9] 공연이 끝나고 윤이상 선생을 비롯한 관계자들이 참석한 자리에서 그 청년이 윤이상 선생 옆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고 그가 피아니스트 백건우라는 것을 알게 됐다. 백건우는 윤이상 선생과 잘 아는 사이이며, 독일 뮌헨에 연주 여행차 《심청이》 오페라도 보러 오게 된 것이었다. 이때 윤이상 선생의 소개로 둘이 알게 됐다. 회식에서 나이든 사람들은 제외하고 젊은 친구들만 모여서 따로 맥주를 마시러 갔는데, 적극적이고 잘 놀던 다른 유학생들과 달리 수줍음을 많이 타고 말도 적었던 백건우가 윤정희의 눈에 띄었다. 그러던 중 백건우가 윤정희에게 꽃 선물을 건넸고 서로에게 호감을 가졌다.[10] 신상옥 감독이 백건우에게 파리 지리를 잘 모르므로 헌팅할 때 도와 달라며 부탁을 하여 파리까지 동행했다가 업무를 마치고 헤어진다. 그 후, 대한민국에서 오라는 요청이 쇄도하여 급히 귀국한 후 백건우를 까맣게 잊어버리고 만다.

백건우와의 열애 편집

 
윤정희의 남편 백건우.

1974년 서강대학교 총장 신부 도움으로 프랑스로 유학을 가게 되고, 평범한 학생으로 소르본느 대학교에서 유학을 시작했다. 어느 날 친구와 영화를 본 후 대한민국 교포들이 자주 찾는, 짜장면이 유명한 광명식당으로 갔다. 식사를 마치고 일어나려는 순간 백건우가 들어오는 것을 보며 놀라고 말았다. 둘은 연락을 한 적도 없었는데 우연히 2년 만에 만난 것이었다.[11] 이후 둘의 연애가 시작되고, 유명세 탓에 주변 사람들에게 알리지는 못하고 비밀리에 연애를 이어 갔다. 어느 날 대사관 초청 모임에 가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가 마지막에 둘만의 시간을 보냈고 백건우가 이곳에 집을 마련하자는 제안을 해와, 처음엔 결혼 전엔 그럴 수 없다며 거부했으나 사랑이 커지자 곧 몽마르트 언덕에 작은 방 하나를 얻게 되었다. 부모님에게도 알리지 않고 비밀리에 같이 생활했다. 언론에 알려지지 않기 위해 차에서 내릴 때도 다른 방향으로 내리는 등 보안을 유지했다.[12] 비밀 연애를 이어가던 중 부모님처럼 모시던 화가 이응노 선생 앞에서 둘의 결혼 계획을 알리면서 둘의 관계가 만천하에 알려졌다.[13] 그렇게 두 사람은 결혼했고, 파리에 정착했다. 파리에서 사실상 실직자였던 탓에 백건우의 비서 역할을 도맡아 했다. 음악회를 가면 사진 촬영, 인터뷰 등등 스케줄이 많은데, 남편이 연습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다른 일을 정리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래서 같이 있으니 휴대전화도 2대가 필요 없어 하나를 같이 썼다고 한다.[14]

슬하에 장녀 하나만 두었으며, 장녀는 백건우처럼 음악계로 진출해 바이올리니스트로 활동 중이다.

16년 만의 복귀 편집

이후에도 대한민국과 프랑스를 오가며 20여편의 영화에 출연했지만 1994년에 출연한 영화 《만무방》 이후 점차 추억 속의 배우로 기억되던 중 영화 데뷔 44년차, 마지막 영화 촬영 16년 만에 2010년 이창동 감독의 작품 《》에 주연으로 출연하였고, 프랑스 칸 영화제에 초대되어 10분간 기립 박수를 받았다.[15] 많은 언론들이 《시》를 주목했고 여우주연상도 노려볼만 하다는 평가가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윤정희는 여우주연상보다는 모든 제작진이 즐거움을 공유할 수 있는 황금종려상을 타길 바랐다고 말했다.[16] 영화제에서 좋은 평가를 받은 것만으로도 만족한다고 말했다. 이 영화제에서 심사위원장을 맡은 팀 버튼 감독과 많은 대화를 나눈 것도 화제가 됐다.[17] 16년간 영화 출연을 하지 않았으나 은퇴를 한 것이라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고 말한다. 90대가 되어서도 매력 있는 역할이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고 말했다.[18] 그리고 이 영화는 윤정희의 마지막 작품이 됐다.

알츠하이머 투병과 사망 편집

2019년알츠하이머병으로 투병 중이라는 사실이 백건우를 통해 알려졌고, 백건우가 스타다큐 마이웨이에 출연해서 근황을 언급했다. 마지막으로 출연한 영화인 《》 촬영 당시에도 치매 증상을 보이는 등, 10년 넘게 알츠하이머병으로 투병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건강 악화로 2023년 1월 19일에 타계했고, 백건우와 장녀가 임종을 지켰다.

학력 편집

영화 출연 작품 편집

방송 출연 편집

1971년
  • 《제1회 봄맞이 올스타 온퍼레이드》 (KBS)
1973년
  • 《스타쇼 - 윤정희아워》 (MBC)
1992년
  • 《임백천의 뮤직쇼》 (KBS COLL FM)
  •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 (MBC)
1994년
  • 《김한길과 사람들》 (MBC)
  • 《문화집중 스튜디오D》 (MBC)
  • 《투맨쇼 두남자와 만납시다》 (SBS)
1996년
  • 《정보특급 금요베스트10》 (SBS)
1998년
  • 《행복채널 - 금요초대석》 (KBS)
2010년
  • 《황금어장 - 무릎팍도사》 (MBC)

TV 드라마 편집

CF 출연 작품 편집

1988년
1992년
1994년

경력 편집

  • 1995년 제19회 몬트리올영화제 심사위원[19]
  • 1998년~2006년 청룡영화상 심사위원
  • 2000년 프랑스 도빌국제영화제 심사위원
  • 2006년 부천판타스틱국제영화제 심사위원
  • 2006년 제17회 디나르영화제 심사위원
  • 2010년 제12회 뭄바이 국제영화제 심사위원

수상 편집

평가 편집

《시》는 오직 윤정희였기에 가능했다. - 르 몽드(Le Monde)

파격적인 캐릭터의 여주인공은 윤정희가 아니면 안 된다 - 신상옥 감독

윤정희는 여배우가 예쁘다라는 사실만으로도 프리미엄을 얻던 시절에 이미 예외적인 존재임을 스스로 알린 배우이다. - 평론가 변인식

미묘한 뉘앙스와 감수성으로 가득찬 윤정희의 연기는 여우주연상을 받을만하다 - 르 피가로(Le Figaro)[31]

마음을 움직이는 윤정희의 연기는 정말 감동적이었다. - 팀 버튼[32]

같이 보기 편집

각주 편집

  1. 무릎팍 도사' 윤정희, "90대에도 배우 인생 계속할 것 Archived 2014년 4월 16일 - 웨이백 머신 tv데일리 2011년 4월
  2. 국내 최초 인터뷰 전문 미디어 - 인터뷰365
  3. 무릎팍 도사' 윤정희 "팀 버튼 심사위원장, 영화 좋다고 하더니.." 아시아경제 2010년 6월
  4. “50萬원짜리얼굴 뉴페이스尹靜姬”. 경향신문. 1966년 6월 22일. 
  5. “윤정희 회고록 - “데뷔 첫해, 22편 찍었어요””. 2002년 1월 23일. 2023년 1월 20일에 확인함. 
  6. 윤정희 vs 윤여정, 원조 女스타 칸서 맞대결 스타뉴스 2011년 4월
  7. 윤정희 "신성일, 부를 때 호칭은 여전히 '미스 윤'" 스타뉴스 2010년 6월
  8. 은막의 스타' 윤정희 "전성기 시절, 사생활 없었다 tv리포트 2010년 6월
  9. 무릎팍 도사-김연아와는 또 다른 아름다움 보여준 윤정희 미디어스 2010년 6월
  10. 윤정희 "남편 백건우와 몽마르트 언덕에서 동거부터" tv 리포트 2010년 6월
  11. 윤정희, "남편 백건우와 몽마르뜨 언덕에서 동거 시작" 깜짝 고백 Archived 2014년 4월 16일 - 웨이백 머신 아트뉴스 2010년 6월
  12. 윤정희 "남편 백건우와 몽마르트 언덕에서 동거부터 tv리포트 2010년 6월
  13. 윤정희 "남편 백건우, 첫 만남부터 운명이었다" 조이뉴스 2010년 6월
  14. 윤정희 "파리에서 나는 실직자... 남편 비서였다" 스타뉴스 2010년 6월
  15. 무릎팍도사' 윤정희 "팀 버튼 심사위원장, 영화 좋다고 하더니.." 아시아경제 2010년 6월
  16. 윤정희 "'시', 황금종려상 받을 줄 알았다" 스타뉴스 2010년 6월
  17. '무릎팍 도사' 윤정희 "팀 버튼 심사위원장, 영화 좋다고 하더니..." 아시아경제 2010년 6월
  18. 윤정희, "90세가 되어도 여전히 매력적인 배우로 남겠다" 가슴 뭉클 Archived 2014년 4월 16일 - 웨이백 머신 tv데일리 2010년 6월
  19. ‘윤정희씨 몬트리올영화제 심사위원 참석 《동아일보》, 1995년 9월 6일
  20. 「大日(대일)영화상」施賞(시상) 《경향신문》, 1967년 9월 18일
  21. 作品賞(작품상)에『산불』 《동아일보》, 1968년 2월 29일
  22. 작품상 '화녀' 차지 영화예술상 시상 《동아일보》, 1971년 4월 28일
  23. 아시아영화제 한국 6부문 수상 남우주연상 남궁원 《경향신문》, 1972년 5월 20일
  24. 韓国(한국) 男(남)·女(여) 主演賞(주연상) 河明中(하명중)군·尹靜姬(윤정희)양 《매일경제》, 1973년 5월 19일
  25. 賞福(상복)터진 영화「겨울女子(여자)」 作品(작품)·감독·技術賞(기술상) 휩쓸... 《경향신문》, 1977년 11월 21일
  26. 감독상 金鎬善(김호선)·신인상金英蘭(김영란) 《동아일보》, 1977년 11월 19일
  27. 윤정희, 리즈 테일러 받은 카이로영화제 평생공로상 수상 《마이데일리》, 2010년 12월 1일
  28. '시' 윤정희, 4회 아태영화상 女주연상 수상 《스타뉴스》, 2010년 12월 2일
  29. 윤정희, 시네마닐라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 수상 《스타뉴스》, 2011년 11월 20일
  30. ‘시’ 윤정희, LA영화평론가협회 여우주연상 수상 《매일경제》, 2011년 12월 12일
  31. 시' 각본상 수상에 칸 프레스센터 탄식 흘러 스타뉴스 2010년 6월
  32. 이창동 “‘시’ 각본, 국내서도 인정..팀버튼 매우 감동” 뉴스엔 2010년 6월

외부 링크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