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년 190년 191년 - 192년 - 193년 194년 195년
연대
170년대 180년대 - 190년대 - 200년대 210년대
세기
전 1세기 1세기 - 2세기 - 3세기 4세기
서기 192년의 다른 기년법
간지 신미년~임신
단기 2525년
그레고리력 192년
CXCII
불기 736년
이슬람력 443 BH~442 BH
황기 852년
히브리력 3952~3953
아시리아력 4942년
에티오피아력 186~187

연호 편집

기년 편집

사건 편집

  • 음력 1월 정축(丁丑)일[1]에 후한에서는 크게 사면을 내렸다. 원술(袁術)이 보낸 장수 손견(孫堅)이 양양(襄陽)에서 유표(劉表)를 공격하여 손견이 전사하였다. 원소(袁紹) 및 공손찬(公孫瓚)은 계교(界橋)에서 싸워, 공손찬 군대가 크게 패하였다. (계교 전투)[2]
  • 음력 1월, 신라에서는 국량(國良)에게 벼슬을 내려 아찬으로 삼고, 술명(述明)을 일길찬으로 삼았다.
  • 5월 22일(음력 4월 23일, 신사(辛巳)일), 동탁(董卓)을 주살(誅殺)하였고 삼족(三族)을 멸하였다. 사도 왕윤(王允)을 녹상서사(錄尚書事)로 삼고 조정을 총괄하게 하였으며 사자 장종(張種)을 보내 산동(山東)을 위무하였다.
  • 음력 4월, 청주(青州)의 황건적동평(東平)에서 연주(兗州) 자사(刺史) 유대(劉岱)를 공격하여 죽였다. 동군(東郡) 태수(太守) 조조(曹操)가 수장(壽張)에서 황건적을 크게 무찔러 항복을 받아냈다. 신라의 수도에 눈이 왔는데, 깊이가 3척에 달했다.
  • 6월 7일 (음력 5월 10일, 정유(丁酉)일) 후한, 크게 사면을 내렸다.
  • 6월 17일(음력 5월 20일, 정미(丁未)일), 정서장군(征西將軍) 황보숭(皇甫嵩)이 거기장군(車騎將軍)이 되었다.
  • 음력 5월, 동탁의 부곡(部曲)[3] 장수 이각(李傕)·곽사(郭汜)·번조(樊稠)·장제(張濟) 등이 반동을 일으켜 수도를 공격하였다. 신라에서는 크게 물난리가 나서 산이 무너진 곳이 10여 곳이었다.
  • 6월 28일(음력 6월 1일 무오(戊午)일), 장안성(長安城)을 함락하였고, 태상(太常) 종불(種拂)·태복(太僕) 노욱(魯旭)·대홍려(大鴻臚) 주환(周奐)·성문교위(城門校尉) 최열(崔烈)·월기교위(越騎校尉) 왕기(王頎)가 모두 전사하고, 관리와 백성 중에 죽은 자가 수만여명이었다. 이각 등은 모두 스스로 장군(將軍)이 되었다.

문화 편집

탄생 편집

사망 편집

참고 문헌 편집

각주 편집

  1. 서기 192년의 정축일은 율리우스력 1월 19일(음력 12월 17일) 및 3월 19일(음력 2월 18일) 등이 있다.
  2. 손견-유표 간의 양양전투 및 손견의 사망시기에 대해서는 이설이 있다. 손견 항목 참조.
  3. 부곡(部曲)은 후한 말에 지방의 치안을 위해 장군(將軍)이나 호족이 거느리도록 인정했던 군부대 또는 그들의 집단을 말한다.